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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무능한 적국 왕자였다-180화 (180/232)

180화

하지만 아직 성문은 열리지 않았다.

자신들이 물러서지 않으면 성문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사울은 베일에게 검을 겨누며 말했다.

“베일! 성문을 넘어가려면 우릴 쓰러뜨려야 할 거다!”

이유 없이 말을 건 건 아니다.

베일이 몇 마디라도 대답해 준다면 그만큼 시간을 벌 수 있다.

몇 분을 버느냐, 아니, 몇 초를 버느냐에 따라 승부가 갈릴 수도 있다.

베일도 사울의 속내를 짐작한 모양이었다.

말은 필요 없다는 듯, 곧바로 검을 휘둘렀다.

사울 일행은 전력을 다해 날아오는 불꽃과 얼음을 막았다.

이번 공격을 막는 건 조금 전보다도 까다로웠다.

자신들의 목숨을 챙기는 건 물론, 성벽까지 지켜야 했으니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사울은 점점 한계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젠장.’

온몸에서 비명을 질러 대기 시작한 지 오래다.

중상을 입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또 무리한 탓이리라.

거기에다 마력도 점점 바닥나는 느낌이었다.

반지가 마력을 보충해 주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반지로 마력을 보충받는 사울은 차라리 나았다.

아이나는 이미 한계에 다다른 지 오래였다.

사울의 실력으로는 본인과 아이나를 함께 지킬 수 없어, 카스텔이 떠맡아야 했다.

때문에 카스텔 역시 점점 힘에 부치는 게 보였다.

반면에 베일은 건재했다.

수많은 공격을 받았음에도 상처 하나 없이 검을 휘두르는 그의 모습은 말 그대로 살아 있는 난공불락의 성 같았다.

“이번에야 말로 죽여 주마!”

베일이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온 그가 검 두 자루를 동시에 치켜들었다.

불꽃에 휩싸인 검은 사울 쪽을, 얼음에 휩싸인 검은 아이나 쪽을 향했다.

카스텔보다는 약한 두 명을 먼저 죽여 버리겠다는 심산이었다.

힘을 아낄 때가 아니다.

이번에 막지 못하면, 다음번은 없다.

사울은 남은 힘을 최대한 마법 검에 쏟아부어 날아오는 검을 막았다.

그렇게 베일의 검과 사울의 마법 검이 부딪친 순간.

쾅!

“으윽!”

막강한 힘에 견디지 못한 사울의 몸이 붕 떠올랐다.

공격을 막아 내어 위력을 크게 반감시켰음에도 한계가 있었던 것이었다.

“아악!”

아이나도 비명과 함께 나가떨어졌다.

카스텔이 도와주었음에도, 제대로 막아 내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사울과 아이나 모두를 쓰러뜨린 베일이 다시 몸을 날렸다.

그런 베일을 막아선 건 카스텔이었다.

“검은 흉성!”

홀로 베일의 쌍검을 막아 선 카스텔.

당장은 베일의 공격을 막아 내는 것 같았지만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사울의 눈에도 카스텔이 점점 지쳐 가고, 또 무너져 가는 게 보였다.

아이나는 부상이 큰지 피를 흘리며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었다.

사울은 검을 지팡이 삼아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때마침 베일이 카스텔을 날려 버린 뒤,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도저히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이대로는 자신이 죽거나, 혹은 성문이 열릴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와아아!”

“놈들이 물러간다!”

요새 곳곳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적이 아닌 아군의 환호였다.

아직 날이 저물지 않았고, 적 병력이 모두 소모된 것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적들이 물러간다면, 이유는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구원군이 나타났거나, 혹은 조나단이 세드를 물리쳤거나.

“설마…….”

베일도 사울과 비슷한 생각을 한 듯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대로 시간을 끌면 정말 베일 혼자 요새에 남겨질 수도 있다.

아무리 베일이 율렌 섬 최강자라도 혼자만의 힘으로 적 요새 한가운데서 살아남을 수는 없다.

지금까지 베일이 홀로 마음껏 날뛴 것도 요새 바깥에서 계속 성문 쪽을 공격하고 두들겨 주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적이 물러가고, 바깥에서의 지원이 완전히 끊긴다면?

요새 전체가 베일 한 명을 잡기 위해 달려들 것이다.

율렌 섬 최강자로 불리는 ‘마검사 베일’도 그것만은 감당하기 힘들었다.

무언가를 결심한 베일이 힘을 집중시켰다.

목표가 된 사울도 잠깐 동안 회복된 힘을 짜내 베일의 공격을 막을 준비를 했다.

카스텔도 그런 사울 곁에 섰다.

“……!”

베일은 말없이 검을 휘둘렀다.

마지막 일격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막강한 공격.

하지만 정교함이나 정확함은 부족했다.

사울도, 카스텔도 뒤를 생각하지 않고 공격을 막는 것에 집중했다.

그 덕분에 죽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

목숨은 건졌지만 몸 곳곳이 불길에 그슬리고, 얼음 칼날에 다치거나 얼어붙었다.

하지만 지금 사울은 아픔마저 느끼지 못했다.

그의 눈에 보이는 건 어느새 사라진 베일의 모습이었다.

“마검사가 도망친다!”

사울에게 마지막 공격을 날림과 동시에 베일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리곤 성문 위로 이동한 뒤, 자신을 막아서는 군대를 헤치고 공격을 막아 내며 몸을 날렸다.

제르넬 요새의 성벽 높이는 20m가 넘었다.

그럼에도 베일은 망설임 없이 성벽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무사히 착지했다.

마나를 익숙하게 다루는 단련된 전사라 가능한 일이었다.

요새에서 무사히 탈출한 베일은 후퇴하는 가멜다 왕국군에 합류했다.

“놈들을 살려 보내지 마라!”

후퇴하는 적병을 노리고 성벽 위에서 화살과 마법 세례가 쏟아졌다.

그렇게 제르넬 요새 서문을 노린 치열한 공방전이 마무리되어 갔다.

“…….”

사울은 말할 기력도 없었다.

쓰러지지 않고 서 있는 것부터가 가적이었다.

그런 사울에게 한 장교가 달려왔다.

무언가 보고를 하려던 장교는 온몸에 상처를 입은 사울의 모습에 크게 놀랐다.

“저, 전하!”

보고를 해야 할지, 당장 사울을 후송해야 할지 고민하는 장교에게 사울이 말했다.

“보고하라.”

사울이 보고도 못 받을 만큼 위중한 건 아님을 안 장교가 보고했다.

“네, 전하. 서문뿐만이 아니라 남문 쪽에서도 적들이 물러가고 있습니다!”

“형님의 작전이 성공했나?”

“아직 자세한 정보는 들어오지 않았지만, 아군의 공세에 남문 쪽 적이 무너진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렇군.”

서문뿐만이 아니라 남문 쪽의 적까지 무너졌다.

조나단이 한 건 해 낸 모양이었다.

“다행이군…….”

보고를 받은 사울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서 전하를 모셔라!”

* * *

며칠 전에 비하면 사울의 부상은 크지 않았다.

후방으로 옮겨지고, 침대에 누울 때까지 의식을 잃지는 않았다.

며칠 전보다 심각한 건 아이나였다.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고, 후송된 후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이나의 상태는 어떤가?”

“다행히 목숨은 건지셨습니다.”

“그래… 정말 다행이군.”

확실히 목숨을 건진 걸 다행으로 여길 만큼 치열한 싸움이었다.

사울 본인은 물론, 아이나까지 죽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리고 카스텔도.

“선생님은?”

“부상을 입었지만, 아이나 아가씨만큼 부상이 크지는 않다고 합니다.”

“그런가.”

세 명 중 사울의 상태가 가장 나았다.

아이나는 의식불명, 카스텔도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다.

아이나도 카스텔도 왕자인 자신을 지키려다 큰 부상을 입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복잡했다.

특히 카스텔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카스텔이 내 목숨을 몇 번이나 구해 주었을까.’

전생에 자신의 목숨을 앗아 간 상대에게 몇 번이나 목숨을 빚지는 것.

참으로 신기한 기분이었다.

그때 전령이 도착해 알렸다.

“보고 드립니다!”

“형님이 보냈나?”

“네, 조나단 왕자님께서 적장 메로빙거 자작을 물리치셨습니다!”

“자작의 목을 베었나?”

“안타깝게도 죽이지는 못하셨습니다.”

“그런가.”

역시 메로빙거 자작도 보통 인물은 아니었다.

조나단과 로타, 아르멜 등 유능한 인재들이 모여 필사의 기습 작전을 펼쳤음에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니.

안타깝지만 솔직히 예상한 결과이기도 했다.

“형님은 무사하신가?”

“네, 곧 돌아오실 겁니다.”

“알았다.”

전령의 보고대로 오래잖아 조나단이 돌아왔다.

사울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그런 조나단을 맞이했다.

“형님, 무사하셨군요.”

“너야말로 무사해서 다행이구나. 잘 버텨 주었다.”

전공을 거둔 덕분인지 조나단의 표정은 꽤 득의양양했다.

그래도 자신의 전공을 위해 큰 부상을 입은 사울 앞에서 전공을 자랑할 만큼 생각이 없지는 않았다.

“이제 당장은 위기를 넘겼다.”

“전황은 어떤가요?”

“메로빙거 자작을 죽이진 못했지만 부상을 입혔다. 아마 그 정도의 상처라면 한동안 전장에 나서는 건 무리일 게다.”

“그렇습니다. 다른 적장이 대신한다고 해도 메로빙거 자작만큼 잘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래. 뿐만 아니라 머잖아 구원군도 도착한다는구나. 며칠만 더 버티면 될 것 같다.”

잠시 숨을 돌린 조나단이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이번에도 보통 일이 아니었더구나.”

“네, 형님. 역시 마검사는 괴물이었습니다. 선생님과 아이나가 아니었다면 살아남지 못했겠지요.”

“그 말이 맞다. 마검사 한 명을 상대하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마리안까지 함께 왔다면 실로 끔찍했겠지.”

베일의 누나인 일명 ‘마궁수’ 마리안 가르시아.

마리안과 만나 본 적은 있지만, 싸워 본 적은 없다.

힘이라면 마리안이 베일에 미치지 못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사울이 본 마리안은 결코 베일보다 덜 위험한 존재가 아니었다.

베일이 무지막지한 강자라면, 마리안은 세심하고 날카로운 느낌이었다.

그런 마리안이 베일과 함께 전장에 나타났다면?

가르시안 남매가 함께 움직이며 사울을, 또 요새를 공격했다면?

요새를 지키기는커녕 살아남기도 어려웠으리라.

“네. 정말 다행입니다.”

“카스텔과 아이나는?”

“저보다 많이 다쳐서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가. 아무튼 고생 많았다. 오늘은 푹 쉬거라.”

“감사합니다, 형님.”

이 정도면 그럭저럭 전황이 잘 풀린 편이다.

사울도 오늘만은 편히 쉬기로 했다.

* * *

“메로빙거 자작이 부상을 입었다고?”

“네, 자작님.”

자신의 진영에서 보고를 받은 베일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 때문이었군. 공격을 멈추고 오늘 전투를 망친 게.”

“…….”

베일에게 보고를 하던 기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확실히 오늘 전투가 예상보다 빨리 끝난 건 세드의 부상 및 철수 때문이다.

하지만 세드는 겁쟁이처럼 굴거나 멍청하게 행동하다 다친 게 아니다.

최선을 다해 싸우다 적의 기세에 밀려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부상을 입은 몸으로도 끝까지 병사들을 지휘했고, 덕분에 물러나면서도 피해를 최대한 줄이는 데 성공했다.

그런 세드의 노고는 조금도 생각지 않고 자기 멋대로 떠들다니.

아무리 구국 영웅이라도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내게 뭐 할 말이라도 있나?”

“아, 아닙니다.”

“훗.”

베일은 기사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짐작한 듯 코웃음을 쳤다.

“그래, 자작은 후방으로 후송되었고, 당분간 지휘는 어려울 것 같다고?”

“네, 당분간 자작의 아드님과 휘하 장교들이 함께 지휘를 할 것이랍니다.”

“자작의 아들이라. 그 애송이 말이군.”

“…….”

베일은 멀리 보이는 요새 서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조금 전까지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던 곳.

조금만 더 싸우면 성문을 무너뜨리거나 왕자나 검은 흉성의 목을 벨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결국 이렇게 되었다.

“오늘 나는 이 전장에서 딱 한 번만 쓸 수 있는 전략을 썼다. 하지만 실패했지. 그것도 메로빙거 자작의 잘못으로.”

“…….”

“이제 적들도 나 혼자 요새 안까지 쳐들어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거다. 오늘 같은 기회는 다시없을 테고, 남은 방법은 무작정 요새를 두들기는 것뿐이군.”

기사는 베일의 눈치를 보다 조심스레 말했다.

“자작님께서 이 소식도 전하라 하셨습니다. 머잖아 적 구원군이 도착할 것 같다고…….”

“확실한 정보인가?”

“거의 확실한 정보라고 합니다.”

“그렇군, 루시아 왕녀가 두 동생을 구하려 애쓰는 모양이지.”

베일도 다르센 왕국 정보계를 주무르는 루시아 왕녀의 명성은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제르넬 요새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도.

한참 요새를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한 베일의 입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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