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저것도 낯익은 광경이다.
아리엘은 말실수를 할 때 꼭 저런 표정을 짓고는 했으니까.
이젠 의심하는 것조차 무의미하다.
분명 눈앞의 신관은 아리엘이다.
어쩌면 아리엘 또한 사울에게서 죽은 ‘롤랜드’를 겹쳐 보고 있을지 모른다.
죽은 오라버니가 적국 왕자로 환생했다고는 상상조차 못 할 테지만.
좀 더 사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다.
물어볼 것도 많고, 이쪽에서 해 주고 싶은 이야기도 많다.
하지만 지금 방 밖에는 부하들이 진을 치고 서 있다.
지금은 그동안 가슴속에 품어 온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다.
사울은 마음을 정리했다.
“좋아요. 당신이 적국의 편을 들 목적이 없다는 건 믿겠어요. 하지만 당신이 이 전쟁을 방해할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건 사실이지요.”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아주 힘든 길이 될 거예요. 어쩌면 다르센 왕국과 가멜다 왕국 모두를 적으로 돌리게 되겠지요. 그렇게 되어도 후회하지 않나요?”
아미스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네. 옳은 일을 위해, 그리고 가엾은 영혼을 구하기 위해 고난을 받아들이는 건 신을 따르는 자의 의무입니다.”
의연하고, 굳건한 눈빛.
그런 아미스를 바라보던 사울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착하지만 온실 속 꽃 같던 소녀가 왕자 앞에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명망 높은 신관이 되었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을 겪고 또 마음고생을 했을까.
“알았어요, 이만 물러가도록 해요.”
“네, 전하.”
그렇게 아미스가 물러가고, 문 밖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다시 들어왔다.
사울은 모두에게 말했다.
“아미스 신관은 자신의 뜻을 꺾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아요.”
“…….”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불편한 침묵을 감지한 사울은 새삼 지금까지의 행동을 돌이켜 보았다.
누가 봐도 이상하다 못해 수상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대로 가다간 불똥이 아미스에게까지 튈지 모른다.
“모두에게 걱정을 끼쳤군요. 미안해요.”
사울의 말에 카스텔이 물었다.
“저 신관과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다른 사람에게도 말할 수 없지만, 카스텔에게는 더더욱 말할 수 없다.
이 자리의 누구보다 자신의 전생과 직결된 사람이니까.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전하.”
“내가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인 건 알아요. 하지만 요즘 이런저런 일이 많아서 피곤했을 뿐이에요. 그렇게 알고 물러가도록 해요.”
사울이 이렇게 나오니 카스텔도 지금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네, 전하.”
“그리고 아미스 신관과 관련된 문제는 당분간 지켜보려고 해요. 그녀를 관찰하는 건 좋지만, 어떤 형태로든 건드려서는 안 되요. 모두들 내 말 알아들었지요?”
“알겠습니다.”
“그럼 모두들 물러가요. 쉬고 싶으니.”
* * *
“휴우…….”
모두를 내보낸 사울은 홀로 남은 방 안에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사를 넘나드는 전장에서 목숨 걸고 싸운 게 불과 얼마 전인데, 그때보다 더 지친 느낌이다.
몸이 지치다 못해 영혼까지 지친 느낌이랄까.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지.”
자신의 운명이 특별하다 못해 신의 유희거리가 되었다고 생각한 게 처음은 아니다.
전생의 기억을 가진 채 환생한다는 것부터가 책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이야기이니까.
거기에다 죽은 줄 알았던 여동생과 다시 만나기까지 했다.
아미스가 아리엘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20년의 시간을 넘어 수많은 일을 겪은 끝에 가련한 소녀가 강인한 신관이 된 것일 테지.
머릿속을 뛰어다니는 생각은 정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슴으로 느껴지는 감정을 정리하는 건 어려웠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사울이 해 온 모든 일은 전생의 자신의 죽음.
또 전생의 가족들까지 모두 죽었다는 것을 전제로 해 왔다.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여동생이 다시 나타났다.
사울로서는 그동안 자신이 만들어 온 모든 게 금이 가는 기분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머릿속으로는 정리가 되었다.
아무것도 모른 척 아미스에게 접근하며 과거에 대한 정보를 얻고, 또 ‘사울 왕자’로서 할 일을 다 하면 된다.
하지만 혼란한 마음은 도무지 진정되지도, 정리되지도 않았다.
“아리엘… 아미스…….”
* * *
쫓겨나듯 사울의 방에서 나온 일행들은 따로 한자리에 모였다.
모두의 시선이 한 명에게 쏠렸다.
가장 오랫동안 사울을 모셔온 집사 그레이였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아르멜의 질문에 그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겠소.”
“당신은 집사로서 누구보다 오래 전하를 봐 오지 않않습니까?”
“물론이오. 난 전하의 모친께서 돌아가신 직후부터 전하를 모셨소. 전하가 아기일 때부터 지금까지 쭉 전하를 모셨지. 하지만 생각을 거듭해도 그 아미스라는 신관과 전하 사이에 어떤 접점도 떠올릴 수 없소.”
“전하께서 정말 일면식도 없던 신관을 상대로 그런 모습을 보이셨다는 말입니까?”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소. 전하께서 저런 모습을 보이신 것도 처음 있는 일이라…….”
이어 일행의 시선은 사울을 두 번째로 오래 봐 온 카스텔에게 향했다.
그러나 카스텔도 고개를 내저었다.
“모르겠습니다.”
모두들 의아해하는 가운데, 아이나가 의견을 냈다.
“우리가 한번 그 신관을 조심스럽게 만나 보는 게 어떨까요?”
그레이가 반론했다.
“전하께서 그 신관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하셨잖습니까?”
“전하께서는 그 신관을 ‘건드리지 말라’고 하셨어요. 해코지를 하자는 게 아니라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아보자는 말이에요.”
이야기를 꺼낸 아이나도, 다른 사람들도 억지 논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아이나의 의견에 반대하지 않았다.
당장 사울을 찾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다.
모두의 생각이 일치했고, 결국 모두 합심하여 아미스를 찾아갔다.
“아미스 신관이 우릴 만나 줄지 모르겠군요.”
아르멜의 걱정에 카스텔이 단호하게 말했다.
“만나도록 해야지요.”
“…….”
다행히도 카스텔이 협박을 할 필요는 없었다.
면담 요청을 받은 아미스가 선선히 요청을 받아들인 덕분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아미스는 모두가 올 줄 알았다는 듯,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채로 말했다.
아미스는 대신전의 일반 신관들이 쓰는 방을 쓰고 있었다.
지저분하지는 않지만 작고 검소한 곳이라 몇 명이 둘러앉은 것만으로도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미스의 질문에 먼저 대답한 건 카스텔이었다.
“당신과 전하의 관계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존댓말을 할 뿐, 예의는 무시하다시피 한 카스텔의 기세는 살벌했다.
카스텔의 살벌한 기세를 견딜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아미스는 그 ‘드문 사람’ 중 하나였다.
“…….”
카스텔과 눈이 마주친 아미스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지지 않겠다는 듯 눈을 피하지 않는 아미스의 눈길에서 카스텔은 심상찮은 감정을 읽었다.
자신을 죽이고 싶다는 살기는 아니다.
그렇다고 적대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분노? 증오?
어쩌면 그것과 비슷할지 모르지만, 그렇게까지 격렬한 감정 또한 아닌 것 같다.
굳이 말하자면 ‘불편함’이랄까.
아미스의 동요는 오래가지 않았다.
금방 마음을 수습한 듯, 카스텔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여러분들이 왜 찾아오신 줄은 짐작하고 있습니다. 모두들 궁금하시겠지요. 사실 저도 궁금합니다. 전하께서 절 그렇게 대하신 이유 말입니다.”
“정말 전하와 오늘 처음 만난 게 맞습니까?”
“네. 분명 오늘 처음 전하를 뵈었습니다. 이전에는 대면한 적도, 먼발치에서 그분을 뵌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전하께서 그런 모습을 보이셨다는 말입니까?”
“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 아미스는 진실을 말하고 있다.
카스텔마저도 더 이상 추궁하지 못하는 가운데, 그레이가 말했다.
“아미스 신관. 나는 여기 있는 누구보다 오랫동안 전하를 모셨소. 그런 나도 전하께서 그렇게 행동하시는 걸 본 적은 없소. 뭐랄까… 전하께서는 마치 죽은 사람이 살아난 것을 본 듯하셨소. 정말 전하와 어떤 형태로든 접점이 없는 거요?”
아미스는 다시 한번 골똘히 생각하더니 역시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전하는 물론, 다르센 왕국의 왕족 누구와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정말 이상한 일이군.”
의문이 커져 가는 가운데, 아이나도 나섰다.
“아미스 신관, 조금 이상한 질문이지만, 해야겠어요.”
“말씀하십시오.”
“전하와 당신은 서로에게 익숙한 것처럼 보였어요.”
아미스가 작게 웃었다.
“그랬습니까. 제가 이상한 생각을 한 나머지, 행동으로 드러나 버린 모양이군요.”
“이상한 생각이라고요?”
“네. 전하께서는 제가 아는 누군가를 닮으셨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요?”
“대단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전 오래전 가족을 잃었고, 그 가족과 비슷한 사람을 오늘 만났습니다. 단지 그것뿐입니다.”
수수께끼가 깊어지는 가운데, 다시 아미스가 말했다.
“저는 어디까지나 이 전쟁이 하루빨리 마무리되고 율렌 섬이 평화롭게 되길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그날이 올 때까지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영혼을 구하고 싶을 뿐입니다. 전하께서 아시듯. 저는 가멜다 왕국 출신입니다. 하지만 결코 이 전쟁에서 누군가의 편을 들기 위해 한 행동은 아님을…….”
카스텔이 아미스의 말을 잘랐다.
“지금 가멜다 왕국 출신이라고 했습니까?”
“네?”
“당신, 가멜다 왕국 출신이라고?”
아미스는 그런 카스텔을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알고 계신 게 아니었습니까?”
아미스를 제외한 모두의 시선이 정보에 밝은 아르멜 쪽으로 쏠렸다.
아르멜은 고개를 저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아르멜은 아미스에게 질문했다.
“지금 전하께서 알고 계셨다고 했지요?”
“…네.”
“그런가.”
무언가를 깨달은 아르멜이 고개를 끄덕였다.
급변한 분위기 속에 아르멜이 상황을 정리했다.
“아미스 신관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언제까지 바쁘신 분을 붙잡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니, 모두들 일어나시지요.”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났고, 아미스도 그들을 잡지 않았다.
그렇게 아미스와 헤어진 일행들은 다시 모여 회의를 가졌다.
“설마 그 신관이 가멜다 왕국 출신이었을 줄이야.”
아이나는 놀라워했고, 아르멜도 동의했다.
“확실히 놀라운 일입니다. 전하께서 이미 그 사실을 알고 계셨다는 건 더욱 놀라운 일이고요.”
“왕국 정보부에서 알아낸 게 아닌가요?”
“아닐 겁니다. 아미스에 대해 알아본 바 있고, 전하께 보고한 적도 있습니다. 아미스의 과거는 베일에 쌓여 있었습니다. 범죄자 출신은 아니라는 것 정도만 알아낸 게 고작이었습니다. 최소한 왕국 정보부에서 아는 건 그게 전부입니다.”
다르센 왕국을 통틀어 왕국 정보부 이상의 정보력을 갖춘 곳은 없다.
그만큼 아미스의 과거는 알아내기 어려운 정보였는데 사울이 그 정보를 알아냈다는 것이다.
그것도 왕국 정보부를 통하지 않고.
“왕국 정보부에서도 몰랐던 정보를 전하께서는 어떻게 알아내셨을까요?”
누구도 의문에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하는 가운데, 문득 카스텔이 다른 소리를 했다.
“아미스라는 신관, 그리고 전하의 태도가 마음에 걸립니다.”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카스텔이 말했다.
“내 느낌일지 모르나 그 신관도, 또 전하도 서로에게 익숙한 듯 보였습니다.”
아이나가 물었다.
“아미스 신관이 말한 가족 이야기와 무언가 관련이 있을까요?”
카스텔이 대답하기 전에 그레이가 반론했다.
“그럴 리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가멜다 왕국 출신을 가까이하신 적이 없습니다.”
카스텔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울이 어릴 적부터 보아 왔고, 또 보좌하고 가르쳐 온 두 사람이다.
두 사람이 입을 모아 없다고 하면 진짜로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