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무능한 적국 왕자였다-192화 (192/232)

192화

아미스의 이야기는 이랬다.

가멜다 왕국의 한 신관이 귀족 부하가 술김에 고백한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의 주인이 킬리안과 교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이다.

이 귀족 부하는 악마 토끼풀 중독으로 소중한 사람을 잃은 적이 있었고, 이에 자신의 주인과 킬리안이 교류하는 것에 크게 분노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 일을 막을 수도, 떠날 수도 없어 괴로워하다 술김에 신관에게 아는 것을 고백했고, 그것이 아미스의 귀에까지 들어온 것이었다.

“근거가 없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군요. 하지만 그 말을 한 당사자를 만나지 않는 한,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는 그 신관님을 믿습니다. 그분은 무심결에 들은 이야기만을 가지고 확신할 만큼 경솔한 분이 아닙니다. 실제로 조사를 해 보고, 확신이 생겼다 하셨죠.”

“그 말인즉, 가멜다 왕국 귀족과 킬리안이 손을 잡았다?”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미스가 어떤 사람인지는 겪을 만큼 겪어 보았다.

결코 경솔하거나 서투른 사람이 아니며, 공적인 일은 철두철미한 사람이다.

그런 아미스가 확신을 가졌다는 건 가벼이 넘길 일이 아니다.

게다가 아미스는 가멜다 왕국 출신이지 않은가.

또 빛의 교단을 통한 인맥까지 있다면, 중립 지대에서 가멜다 왕국의 정보를 얻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사울이 말했다.

“그대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정말 심각한 일이에요.”

“알고 있습니다.”

“킬리안이 그냥 가멜다 왕국에 숨어 있는 것뿐이라면 별일이 아닐 수도 있지요. 하지만 놈이 가멜다 왕국의 귀족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보통 일이 아니에요. 하물며 전쟁이 한창인 데다 중립 지대까지 악마 토끼풀 문제로 시끄러운 지금이라면 더더욱 그렇지요. 그대는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나요?”

아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멜다 왕국에는 해가. 그리고 왕자님의 나라에는 득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이시지요.”

“정확해요. 나는 그대가 말해 준 정보를 가지고 이 일을 조사할 거예요. 정말 가멜다 왕국과 킬리안이 손을 잡았다면… 우리 왕국은 큰 명분을 얻게 되겠지요. 전황이 비슷한 지금 같은 때에 우리에게 큰 명분이 주어진다면, 그로 인하여 전쟁의 승패가 갈릴 수도 있을 테고요.”

“…….”

“대체 왜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가요?”

질문을 받은 아미스가 조용히 말했다.

“전하께서는 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그대가 가멜다 왕국 출신이라는 것도.”

“대체 어떻게 그 사실을 아셨습니까?”

“그게 그렇게 놀랄 만한 일인가요?”

“…제가 아는 한 교단에서 제가 가멜다 왕국 출신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네 분뿐입니다. 그중 절반은 돌아가셨고, 다른 두 분도 제 출신에 대해 남에게 이야기할 분들이 아닙니다.”

사울은 속으로 혀를 찼다.

물론 사울도 아미스가 자신의 정체를 떠벌리고 다녔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과거를 철저히 비밀로 한 줄은 몰랐다.

사울은 재빨리 그럴듯한 변명을 떠올렸다.

“운이 좋았어요. 때론 예상치 못한 사람에게서 예상치 못한 정보를 얻을 때도 있는 법이니. 누굴 탓할 필요는 없어요. 내가 그 정보를 얻은 건 어디까지나 우연이었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대가 허락하지 않으면 비밀을 지켜 주겠어요. 내 부하들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부탁드립니다.”

사울은 그런 아미스에게 넌지시 물었다.

“하지만 궁금하군요. 그대의 출신을 꼭 감출 필요가 있나요? 어차피 율렌 섬은 다르센 왕국과 가멜다 왕국 그리고 중립 지대 뿐인데.”

아미스는 한숨과 함께 말했다.

“저는 과거를 버렸습니다.”

“꽤나 괴로운 과거가 있는 모양이군요.”

“네, 좋은 기억도 있지만, 슬픈 일이 더 많았습니다.”

“전쟁 때문인가요?”

사울의 의미심장한 질문에 아미스는 천천히 말했다.

“네.”

사울은 더 질문을 할 수도 있었다.

죽은 가족에 대해서.

자신이 죽은 후에 대해서.

하지만 사울은 더 묻지 않았다.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게 두려웠다.

또 과거를 버린 여동생의 상처를 후벼 파고 싶진 않았다.

“솔직히 나는 그대의 생각에 반대하는 게 많아요. 특히 난민이나 탈영병 같은 자들을 그대처럼 자애롭게 대할 수는 없어요.”

“…….”

“그렇지만, 한 가지는 동의해요. 전쟁은 슬픔을 만들고, 휘말린 모두를 상처 입히지요. 나도, 그대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그런 사울을 빤히 바라보던 아미스가 문득 쿡 하고 웃었다.

그러곤 곧바로 무례한 태도를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아니에요. 그나저나 왜 웃은 건가요?”

“그게… 전하께서는 제가 아는 누구와 정말 닮으신 것 같습니다.”

사울은 이렇게 묻고 싶었다.

‘그 닮은 사람이 당신의 오빠인가요?’

물론 사울은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언젠가는 자신의 정체를 밝힐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그 날이 아니다.

“조금 전 왜 전하께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고 여쭈어보셨지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지금 대신전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사람은 전하뿐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날 믿는다는 말이군요.”

“네, 지금도 저는 전쟁에 참여하거나, 어떤 나라의 편을 들 의사가 없습니다. 하지만 악마 토끼풀 문제는 결코 좌시할 수 없습니다. 킬리안이 정말 가멜다 왕국의 귀족과 손을 잡고 있다면… 전하의 힘을 빌리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명한 생각이에요. 약속하지요. 이 일은 가능한 그대나 대신전이 휘말리지 않는 방향으로 처리하겠어요.”

“감사합니다, 전하.”

할 말을 마친 아미스는 인사와 함께 훈련장을 빠져나갔다.

그런 아미스를 바라보던 사울은 문득 가슴이 저릿해졌다.

“아리엘…….”

* * *

사울은 자신의 방에 돌아오기 무섭게 일행을 소집했다.

모두들 모인 가운데, 사울은 아미스와 나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개인적인 이야기는 빼고, 공적인 부분만 말이다.

모두들 사울의 말에 적잖이 놀랐다.

“킬리안과 가멜다 왕국 귀족이 손을 잡았다는 말씀이십니까?”

“내 의견이 아닌 아미스의 의견이지만. 아미스는 그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어. 그녀의 말이 꼭 맞다는 법은 없지만, 조사해 볼 가치는 충분하겠지.”

아르멜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은 아닙니다. 킬리안은 율렌 섬의 공적이니까요. 어디에 있든 안전을 보장받으려면 그의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어야 할 겁니다. 그것이 가멜다 왕국이라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지요.”

“맞아, 그리고 여전히 아미스는 이 전쟁에 개입하고픈 마음이 없는 것 같았어. 그럼에도 킬리안 이야기를 꺼냈다는 건, 그만큼 악마 토끼풀 문제가 심각하다는 뜻이지. 자신의 신념을 어느 정도 포기할 만큼.”

아이나도 말했다.

“어쩌면 이번 일로 이번 전쟁의 전황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모두들 동의했다.

모든 전쟁에서 명분이 승패를 좌우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팽팽한 전쟁일수록, 명분의 힘이 큰 법이다.

“맞아요. 더군다나 킬리안은 어둠의 세력이나 피닉스와도 연결 고리가 있지요. 그런 킬리안과 가멜다 왕국의 연결 고리를 찾아내기만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굉장한 명분이 될 수 있을 거예요. 만에 하나 킬리안과 가멜다 왕국, 그리고 어둠의 세력이나 피닉스와의 연결 고리까지 찾아낸다면… 교단이나 카멜 산. 혹은 둘 다 왕국 편으로 만들 수도 있을 거예요.”

아르멜도 이번 일에 긍정적이었다.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문제는 가멜다 왕국에 웅크리고 있는 킬리안과 귀족의 관계를 어떻게 파헤치느냐인데.”

전쟁 통에 사울이 직접 가멜다 왕국으로 갈 수는 없다.

사울이 직접 나설 수 없다면, 차선책은 이런 일에 능숙한 사람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사울은 아르멜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누님의 힘이 필요할 것 같은데, 누님이 내 부탁을 들어줄까?”

“전하께서 확신하신다면 왕녀 전하께서도 받아들이실 겁니다. 물론 실패한다면 그에 따른 책임은 저와 전하 모두가 져야 할 테고요.”

“당연하지, 잘못된 정보라면 모든 책임은 내가 질 테니 누님께 전폭적인 지원을 부탁해 봐.”

“알겠습니다.”

짧은 회의가 끝나고, 모두들 각각 임무를 위해 방에서 나갔다.

하지만 카스텔은 곧바로 나가지 않았다.

“내게 할 말이 있나요?”

“네, 전하.”

카스텔은 항상 그렇듯 표정 없는 얼굴로, 하지만 전장에서만큼이나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 아미스라는 신관 말입니다.”

“그녀를 의심하는 건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녀는 좋은 사람이라 생각하고, 전하를 진실되게 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개인적 생각일 뿐이지만.”

사울은 카스텔의 감이 꽤 정확하다고 생각했다.

예의를 차리거나 자신의 감정을 감추는 건 서투를지 모르지만, 타인을 관찰하는 데는 능숙했다.

여자의 감, 아니, 야생의 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아미스의 정체를 생각하면, 이번에도 카스텔의 감은 제대로 맞아떨어진 셈이었다.

“선생님도 그렇게 보고 있다니 다행이군요.”

“저는 그 신관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우리와 생각은 다르지만 전하나 왕국을 적대하는 건 아니니까요. 제가 걱정하는 건 전하입니다.”

“나를? 어째서요?”

“다른 사람들도 저와 같은 생각일 겁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그 신관 때문에 지나치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 있지요. 다시 말하지만, 나는 공사 구분을 못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 신관을 향한 감정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카스텔은 단호한 사울의 표정을 빤히 바라보다 물었다.

“혹시 그 신관에게 마음이 있으십니까?”

사울은 지금 무언가를 먹거나, 마시고 있지 않는 것에 감사했다.

뭐라도 먹거나 마시고 있었다면 입안에 든 것을 카스텔에게 쏟아 내는 희극 속 한 장면을 보여 주었을 테니까.

그만큼 카스텔의 질문은 사울로서는 더없이 황당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전생의 여동생에게 마음이 있냐니.

전생 문제를 제쳐 놓아도 카스텔의 질문은 황당했다.

신관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결혼을 하지 않는다.

또 육체의 나이로 따지면 아미스 쪽이 사울보다 열다섯 살은 더 연상이 아닌가.

“…….”

황당해하는 사울의 모습을 바라보던 카스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건 아니시군요.”

“당연하지요! 선생님은 대체 어디서 그런 황당한 생각을…….”

“귀족이나 왕족 중에서도 취향이 독특한 사람이 적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런 문제라면 걱정할 필요 없어요.”

하지만 카스텔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그 신관에게 그렇게까지 마음을 쓰시는 겁니까?”

“말하지 않았나요? 지금은 밝힐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좀 더 확실히 전하의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카스텔이 아니라면 누가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사울은 카스텔이 무례한 의도로 질문한 게 아님을 알았다.

아마 사울이 무언가 실수를 하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사울은 묘한 기분이 되었다.

아미스 문제로 크게 동요하고 있다는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상황을 이렇게 만든 데 카스텔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는가.

전생의 사울을 죽인 장본인이 카스텔이다.

물론 죽이지 않으면 죽는 전장에서 벌어진 결과였지만, 카스텔 때문에 전생의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언젠가 카스텔에게 그 책임을 묻는 날까지는 모른 척하려 했다.

그 문제에 대한 감정을 내비치지 않고, 착한 제자 노릇을 잘하려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감정이 크게 요동쳤다.

“후우.”

사울은 크게 한숨을 내쉬곤 카스텔을 쏘아보며 말했다.

“아무리 선생님이라지만 이건 너무 무례한 행동인 것 같네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