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사울의 말에 외교관도 어느 정도는 납득한 모양이었다.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전하의 말씀이 사실이라 해도, 어떻게 카멜 산을 조사하느냐입니다.”
“그렇겠지요.”
카멜 산에 몇 번 가 본 사울은 잘 알고 있었다.
카멜 산은 대단히 폐쇄적인 구조이며, 그 폐쇄성은 상층부로 갈수록 더 심해진다는 것을.
카멜 산 수뇌부에 첩자를 심는 건 가멜다 왕국의 왕실에 첩자를 심는 것보다도 어렵지 않을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건 잘 알아요. 그러니 카멜 산을 직접 조사하는 게 아니라, 그 주변부터 시작할 생각이에요. 중립 지대에 대해 잘 아는 그대의 도움이 필요해요.”
“알겠습니다. 어떻게든 이번 실패를 만회하겠습니다.”
“몸이 회복된 후 다시 이야기하지요.”
외교관과 이야기를 마친 사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막 밖으로 나가니 아미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미스가 먼저 고개를 숙였고, 사울은 그런 아미스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그대의 호의에 감사해요.”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겸손 떠는 게 아니라 진심이다.
아미스는 진심으로 자신과 복잡하고 또 미묘한 관계인 다르센 왕국 사람들을 도우러 왔고, 또 도왔다.
아마 공격받은 게 가멜다 왕국 사람이라도, 혹은 대신전이나 중립 지대의 주민들이라도 똑같이 행동했으리라.
“나도 며칠 이곳에서 머무를 거예요. 도울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말해요.”
사울의 말에 아미스가 즉각 대답했다.
“실은 환자를 돌볼 손길이 부족합니다. 동원할 수 있는 인력은 모두 동원하였지만 역시 그렇습니다.”
“그래요?”
“네. 주변을 경비하고 있는 병사들을 빼서 병실을 더 만들고 환자를 돌보는 데 투입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주변 경계가 소홀해질 것 같은데… 그래서 카스텔 님께 특별히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가장 큰 전력인 카스텔더러 경비를 도와 달라는 말이다.
용기 있는 부탁에 사울은 피식 웃었다.
“선생님이 허락한다면 나도 허락하지요.”
사울의 말에 카스텔은 말없이 사울을 바라보았다.
사울이 완곡하게 ‘경비를 서라’고 명령했음을 알아들은 것이었다.
사울은 다시 한번 못을 박았다.
“괜찮을 거예요. 나도 선생님 주변에 머무를 테니까. 아니, 우리 모두가 마을 입구 쪽에 머무르도록 해요. 마을을 지키는 데도 도움이 되고, 내가 특별히 더 위험해질 것도 없으니까.”
어차피 성벽은 고사하고 목책 하나 없는 마을이다.
마을 안에서 머무르든, 밖에서 머무르든 강적의 공격 앞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반면에 카스텔을 비롯한 사울 일행이 마을 입구에 머무른다면 마을 경비에는 확실히 도움이 될 것이었다.
“…….”
카스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자들도 특별히 반대하지 않자 사울은 아미스에게 말했다.
“이러면 되겠지요?”
“네, 정말 감사합니다.”
“부상자들을 잘 부탁해요.”
그렇게 사울 일행은 마을 입구 쪽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
일행 누구도 그런 사울에게 뭐라 하진 않았다.
하지만 하나같이 의미심장한 표정이나 눈빛을 보냈다.
사울도 일행들의 반응을 눈치챘다.
아미스 앞에서 유독 약해지는 사울의 모습에 다시 한번 의구심을 가진 것이리라.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 해명할 방법이 없다.
어설픈 해명은 통하지 않을 것이며, 깊게 파고들면 민감한 이야기를 꺼내야 할 수 있으니까.
사울은 모른 척 일 이야기를 꺼냈다.
“며칠간 여기 머무르며 정보를 모으고, 앞으로의 계획을 세울 거예요.”
“네, 전하.”
“방비도 튼튼하고 대신전이 멀지 않으니 적들이 또 공격해 올 가능성은 낮을 거예요. 하지만 만의 하나라는 게 있으니 경계를 단단히 해요.”
* * *
며칠 동안 사울은 이번 공격에 관한 것들을 조사하고, 모을 수 있는 정보를 가능한 모으며, 분석했다.
그렇지만 자신을 공격하고 외교 공관까지 박살 낸 자들의 정체는 알 수 없었다.
당장은 카멜 산이 범인이라는 증거도 없었고, 또 다른 세력이 수상한 행적을 보인 흔적도 없었다.
미지의 적을 찾는 일은 성과가 없었지만, 다른 쪽은 성과가 있었다.
왕국에서 보낸 지원금과 인력들이 속속 도착한 것이었다.
본래는 공관 확대를 위해 보내졌지만, 상황이 바뀐 만큼 그들의 임무도 바뀌었다.
“전하. 공관이 공격받았다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그러니 그대들, 그리고 그대들이 가지고 온 자금으로 공관 복구에 나서야겠어요.”
“저희는 어차피 중립 지대에서 일하러 온 것입니다만… 자금을 다른 용도로 써도 문제없겠습니까?”
“내가 결정한 일이니 문제가 생기면 모든 책임은 내가 질 거예요.”
“알겠습니다.”
사울은 인력 배치를 새로 했다.
어느 정도 회복된 부상자들은 대신전으로 옮겼고, 사울은 새로 도착한 인원들과 함께 공관으로 향했다.
대신전에서 파견한 병력은 공관으로 향하는 가는 길에도 사울을 호위해 주었다.
그 덕분인지, 혹은 이미 적들이 떠난 덕인지 사울은 아무런 공격 없이 공관에 도착했다.
“으음. 말로는 들었지만…….”
“생각보다 더 처참하군.”
공격받은 공관의 모습을 본 자들이 모두들 한마디씩 했다.
겉보기에는 허름하지만 나름대로 철저히 관리되던 공관은 말 그대로 폐허나 다름없었다.
건물 대부분이 불에 타거나 파괴되었고, 수습 못 한 시체들까지 굴러다니는 처참한 꼴이었다.
“일단 시신부터 수습해요.”
“네, 전하.”
시신을 제대로 묻어 주고 장례를 치를 여유는 없었다.
수습한 시신들은 모두 화장되었다.
이럴 줄 알고 데려온 신관이 타들어 가는 시신들에 마지막 기도를 해 주었다.
그리고 공관 복구가 시작되었다.
말이 ‘복구’지, 사실상 처음부터 다시 지어야 했다.
아니, 폐허를 청소하고 새로 지어야 했기에 처음부터 짓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인력과 자금은 부족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 틈을 타 또다시 적들이 공격해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대신전의 병력도 함께라 별일이 없었지만, 그들 역시 곧 대신전으로 돌아가야 했다.
다행히 공관 복구가 시작되고 얼마 후, 추가 지원이 왔다.
“조나단 형님이 그대들을 보냈다고?”
“네, 전하!”
조나단이 보낸 응원군이 도착한 것이었다.
응원군을 지휘하던 기사가 조나단의 편지를 내밀었다.
조나단의 편지 내용은 간단했다.
사울에 대한 치하가 거의 절반, 그리고 자신 덕분에 위기를 넘길 수 있게 되었다며 스스로를 치켜세우는 내용이 절반.
그리고 마지막에 짧게 ‘그 사람’을 언급했다.
‘루시아 누님께도 감사 편지를 보내라. 널 빨리 도우라고 성화가 대단했다.’
아무래도 감사 편지 두 장을 써야 할 것 같았다.
한 장은 형님에게, 또 한 장은 누님에게.
‘이번 생에선 형제 복은 있는 것 같군.’
사울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응원군에게 명령했다.
“지금 대신전의 병력이 지키고 있는 곳은 내일부터 너희들이 지켜야 할 곳이 될 거다. 잘 살펴보고 경계하도록.”
“네, 전하!”
응원군이 도착하자 대신전의 병력은 곧 돌아갔다.
하지만 응원군 덕분에 주변 경비가 더욱 강화되었다.
지난번 외교 공관을 쑥대밭으로 만든 전력 정도로는 다시 공격해 오기 어려울 것이다.
일단 사울은 공관 재건을 명령했다.
예전 규모만큼 건물을 다시 짓고, 방비가 더 튼튼히 했다.
동시에 카멜 산 조사도 시작했지만, 이번에도 쉽지 않았다.
이런 일로 카멜 산을 의심하는 게 알려져서는 안 되기에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여야 했고, 그만큼 정보를 얻기가 어려웠다.
카멜 산 조사를 시작하고 일주일.
사울은 지금까지의 성과를 살펴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 아는 정보가 아니면 신뢰도가 턱없이 낮은 정보뿐이군.”
사울의 푸념에 아르멜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왜 이렇게 성과가 없냐고 묻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군. 나로서도 카멜 산의 정보를 얻을 방법이 떠오르지 않으니.”
카멜 산에 직접 접근하지 않고 주변을 맴돌며 정보를 얻는 건 한계가 뚜렷했다.
특히 카멜 산의 윗선이 이번 일에 개입되었다면 그만큼 일 처리를 철두철미하게 하지 않았겠는가.
역시 카멜 산에서 직접 정보를 얻거나, 최소한 내부자의 협조라도 얻어 내지 않는 한 가망이 없어 보였다.
“차라리 내가 카멜 산에 다시 한번 가 볼까?”
아르멜이 그런 사울을 만류헀다.
“전하, 그건 안 됩니다.”
“너무 위험하니까?”
“네. 만에 하나 세네카가 이 일에 개입되었고, 전하께서 카멜 산으로 가신다면…….”
“나는 죽은 목숨이다?”
“그렇습니다.”
과격한 표현이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만에 하나 세네카가, 혹은 카멜 산 상층부의 누군가가 자신을 노리고 있는데 스스로 카멜 산으로 간다면?
말 그대로 죽음의 함정으로 직접 들어가는 꼴이다.
“내가 아닌 다른 첩자를 잠입시켜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지.”
“그렇습니다. 왕국에 속한 이종족 중 카멜 산에 잠입해도 의심을 사지 않을 만한 자가 있을지…….”
외부인이 들어가는 게 어렵다면 방법은 결국 하나뿐이다.
“내부자를 이용하는 방법뿐인가?”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내부자라…….”
사울은 카멜 산의 내부자, 그것도 지위가 높은 자들을 여럿 알고 있었다.
세네카의 호위대장인 드워프 모데아라던가.
하지만 사울이 개인적으로 아는 카멜 산의 이종족들은 모두 카멜 산에 충성하는 자들이었다.
그것이 카멜 산이라는 조직에 대한 충성이든 세네카 개인에 대한 충성이든 왕국의 첩자 노릇을 할 것 같진 않았다.
제아무리 매력적인 미끼를 던진다 해도 말이다.
“아무래도 우리 대신 정보를 찾아 줄 내부자부터 찾아야겠어.”
“알겠습니다.”
방침을 정한 사울은 카멜 산의 인사들에 대한 조사에 나섰다.
무언가 약점이 있거나, 큰 보상을 대가로 기꺼이 첩자 노릇을 해 줄 탐욕스러운 자가 있다면 일이 쉽게 풀릴 수 있다.
하지만 첩자가 되어 줄 만한 자를 찾기 어려웠다.
사울 본인이 직접 카멜 산을 몇 번이나 방문한 경험을 떠올리고, 그 외의 정보들을 종합하고 분석해도 첩자가 되어 줄 만한 자는 나오지 않았다.
이종족들에 해박한 아이나에게도 조언을 구해 보았지만, 대답은 신통치 않았다.
“죄송합니다. 저희 가문과 친하게 지내는 이종족이 여럿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중 카멜 산의 수뇌부이거나, 그와 연결된 자는 없는 것으로 압니다.”
“그렇군요.”
카멜 산에 매달리는 게 시간 낭비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사울은 카멜 산을 향한 의심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근거 없이 오기를 부리는 게 아니다.
생각을 거듭해도 현 상황에서 가장 수상한 건 역시 카멜 산이다.
카멜 산과 관련 없다는 증거라도 나오지 않는 한, 의심을 버릴 수는 없었다.
결국 사울은 도움을 받기로 했다.
“누님께 도움을 요청해야겠어.”
“어떻게 말입니까?”
“분명 왕국 정보부에서는 카멜 산의 정보를 얻기 위해 애를 많이 썼다고 들었어. 누님이라면 무언가 방법이 있을지 몰라.”
아르멜은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분명 왕녀 전하라면 무언가 알고 계실지 모릅니다. 하지만…….”
“왕국 정보부에서 카멜 산에 정보원을 갖고 있다면 대단히 중요한 자원일 것이고, 만에 하나 내가 망치면 엄청난 손실일 거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물론 사울도 잘 알았다.
혹시나 왕국 정보부에서 힘들게 만든 카멜 산의 정보망을 사울이 망친다면, 그래서 카멜 산과 왕국 사이가 벌어진다면?
지금까지 쌓은 모든 공으로도 갚기 어려운 큰 실패다.
그 사실은 사울이 누구보다 잘 알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스스로 카멜 산에 가는 것 못지않게 위험한 선택지다.
그렇지만 사울은 강행하기로 했다.
“다른 방법이 있다면 그렇게 했을 거야. 내 말뜻 알겠지?”
다른 방법도 없고, 꼭 해야 하는 일이다.
아르멜은 그런 사울의 말을 알아들었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