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제 뒤로 오십시오.”
사울이 움직임과 동시에 카스텔은 양손을 뻗었다.
그녀의 양손에 맺혀 있던 마나 덩어리가 거미줄처럼 수백 가닥으로 흩어져 적들을 덮쳤다.
“피, 피해라!”
보기만 해도 어마어마한 위력의 공격임을 안 적들은 즉각 하던 행동을 그만두고 대응에 나섰다.
하지만 피하는 것도, 막는 것도 쉽지 않았다.
잘게 쪼개져 흩어진 마나는 거미줄처럼 가늘었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힘이 실려 있었다.
거미줄에 닿는 모든 것이 베어지거나 쪼개졌고, 혹은 불에 타오르거나 전격에 지져지기도 했다.
여러 효과를 내면서 위력도 어마어마하고, 거기에다 범위까지 넓은 공격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특히 적의 입장에서는 실로 처참했다.
“크윽!”
“으아악!”
단말마와 함께 죽어 나가는 자도 있었고, 큰 상처를 입었지만 죽지 못해 비명을 내지르는 자도 있었다.
얼핏 봐도 죽거나 큰 부상을 입고 쓰러진 적들이 거의 절반에 달했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그것도 상당한 실력을 가진 적들이 말 그대로 떼죽음을 당한 것이다.
“대단하군.”
감탄한 사울이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킬리안의 기술을 따라 해 보았습니다.”
“어쩐지 낯이 익더라니.”
전장을 살피는 사울의 눈에 모데아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큰 상처도 없고, 복면 역시 벗겨지지 않았다.
“모데아를 집중 공격 해요.”
“알겠습니다.”
모데아를 잡거나, 죽이거나, 정체라도 확실히 파악해야 한다.
카스텔이 자신을 노린다는 것을 깨달은 모데아가 휘파람을 불었고, 몇 명이 모데아 주변을 둘러쌌다.
하지만 카스텔의 공격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번에는 거미줄이 아닌, 굵은 마나의 촉수가 모데아를 덮쳤다.
모데아도 지지 않고 화살을 날렸고, 그의 부하들도 마찬가지로 날아오는 공격을 막으며 모데아를 지키려 했다.
하지만 카스텔이 전력을 당한 공격을 완전히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쾅!
강력한 힘이 실린 마나의 촉수가 그대로 모데아가 있던 곳을 깔아뭉갰다.
잔뜩 흙먼지가 피어오르다 가라앉은 끝에, 모데아의 모습이 드러났다.
“역시.”
방금 전 공격의 여파로 복면이 절반 이상 벗겨졌다.
드러난 얼굴은 틀림없는 모데아였다.
“모데아! 더 이상 네 정체를 숨길 순 없다!”
“…….”
“투항하면 네 목숨을 살려 주는 건 물론, 카멜 산의 안위도 보장하겠다!”
사울은 모데아가 자신의 말을 들을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생각이 맞았다.
다시 모데아는 휘파람을 불었고, 그 직후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쫓아가고 싶었지만, 무작정 쫓기엔 이쪽의 전력이 너무 부족했다.
사울 일행은 제 자리를 지킨 채 도망치는 적들을 공격했고, 몇 명을 더 쓰러뜨렸다.
그렇게 전투는 끝났다.
* * *
“…….”
엘프 첩자는 말없이 사울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얼굴은 숨기고 있지만, 복면 아래 드러난 눈동자만 봐도 적잖이 놀란 표정을 짓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사울이 그런 엘프 첩자에게 말했다.
“네 이름은 뭐지?”
“…사오니엘.”
“사오니엘. 이제 내 정체는 알았을 테고, 저기 선생님의 정체도 짐작했겠지.”
“왕자인 당신이 선생님이라 부르는 자라면… 역시 카스텔이오?”
“그렇다.”
엘프 첩자, 사오니엘은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복면을 벗었다.
사울 일행도 모두들 복면을 벗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더 이상 얼굴을 가려 봐야 아무 의미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정체를 드러낸 엘프, 사오니엘은 짙은 갈색 피부를 한 다크 엘프 남성이었다.
한때 다크 엘프는 사악한 종족이라는 말도 있었다지만, 상식이 부족하던 옛 사람들의 어리석은 이야기일 뿐이다.
피부색은 외모의 차이일 뿐, 본성이나 성품과는 아무 상관 없다.
사오니엘은 몇 번이나 한숨을 내쉬며 사울, 그리고 다른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카스텔과 아르멜은 쓰러진 적들을 수습하러 갔고, 아이나는 사오니엘과 사울 사이에서 만에 하나의 사태를 대비했다.
“빌어먹을.”
사오니엘은 금방이라도 도망치고 싶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지금은 도망칠 수도 없다.
사울과 아이나 두 실력자가 잔뜩 경계한 채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내가 뭘 어찌해야 되겠소?”
“뭘 어떻게 하고 싶나?”
“…잘 모르겠소.”
“확실한 건 방금 전 너를, 그리고 우릴 공격한 건 모데아라는 사실이다. 모데아가 누구인지는 잘 알고 있지?”
“물론이오.”
“그럼 모데아가 너와 우리를 함께 공격 했다는 게 무슨 뜻인지도 잘 알겠군.”
“빌어먹을.”
사울은 사오니엘의 무례한 언동을 탓하지 않았다.
지금은 예의 따위를 차리기보다는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게 더 중요했다.
얼마 후, 조사를 나갔던 카스텔과 아르멜이 돌아와 보고했다.
“적들을 조사해 보았나?”
“네. 자결한 자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었기에 조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역시 우리가 본 건 모데아가 틀림없는가?”
“그렇습니다. 모데아와 그의 직속 부하들이 이번 일을 벌인 게 틀림없습니다.”
“그럼 세네카와의 관련성은?”
가장 중요하고 또 민감한 질문에 아르멜은 사오니엘을 흘긋 바라보고는 대답했다.
“심문한 자들은 모두 모데아의 명령을 받았다고만 했습니다.”
“세네카에게 명령을 받았다고 한 자는 없나?”
“네, 전하.”
사울은 사오니엘에게 물었다.
“네 생각은?”
“…대족장님이 나와 그대들을 공격한 게 아니냐고 묻고 싶은 것이오?”
“그렇다.”
“나라고 어떻게 알겠소.”
“확실한 대답이 아닌, 지금 네 생각을 듣고 싶다는 거다.”
사오니엘이 천천히 대답했다.
“대족장님이 개입한 것 같소.”
“세네카가 우릴 공격한 것이다?”
“그렇지 않겠소? 모데아는 대족장님의 호위대장이라 대족장님의 명령만 듣소. 그렇다면 모데아 혼자만의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이진 못했을 거요.”
“결국 이 모든 게 세네카의 짓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이군.”
“내 의견일 뿐이오.”
사오니엘의 말대로 아직 확실한 물증은 없었다.
하지만 사울의 생각 역시 사오니엘의 의견과 거의 같았다.
이곳에 오기 전 벌어진 일들.
그리고 지금 겪은 습격.
모두들 정교하고 치밀하며, 나아가 강력한 전력이 동원되었다.
지금 사오니엘을 습격한 것도 사울과 카스텔이 달려왔다는 뜻밖의 변수가 아니었다면, 아마 음모를 꾸민 측의 뜻대로 결판이 났을 것이다.
이런 일을 꾸미고 행동할 수 있는 자는 카멜 산에서도 소수일 것이다.
그 소수의 용의자 중, 가장 유력한 건 역시 대족장 세네카다.
정말 세네카가 이 모든 일의 흑막이었다면…….
“…….”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사실이라면 너무나도 충격적인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충격에 휩싸여 멍하니 있을 겨를이 없었다.
“일단 움직이지요.”
“네, 전하.”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
최대한 빨리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는 것 외에는.
* * *
중립 지대에서 카멜 산의 입김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다.
즉 중립 지대에서 사울이나 사오니엘, 그리고 그 일행이 안전한 곳은 없게 되었다.
대신전도 안심할 수 없었다.
물론 에스타나 아미스가 카멜 산과 손잡고 사울을 공격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하지만 그 부하들 중에서는 이미 카멜 산에 포섭된 자가 있을지 모른다.
사울은 대신전으로 향하지 않았다.
대신 왕국령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길을 골라잡았다.
언제 추격자가 따라붙을지 모르니 서둘러야 했다.
카멜 산에서 작정하고 대군이라도 보낸다면, 소수의 인원만으로 맞서 싸우기는 어려울 테니까.
다행히 사울 일행이 탄 말은 튼튼했고, 어느 정도 여행 준비도 해 왔다.
사오니엘을 만난 곳에서 한참 달리니 지형도 익숙해졌다.
혹시나 있을 추격자의 존재를 피하기 위해 잠자는 시간도 최대한 아끼면서, 말에 박차를 가했다.
덕분에 추격자를 만나지 않고 국경 지대에 도달할 수 있었다.
“누구냐?”
사울 일행이 예고 없이 국경 성문에 들이닥치차 경비병들이 경계하며 외쳤다.
그러나 곧 일행의 정체를 알게 되자 놀라며 서둘러 성문을 열어 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어찌 이리 다급하게 오신 겁니까?”
“주변에 별일은 없는가?”
“네, 여전히 긴장 상태이긴 합니다만…….”
“알았다.”
국경을 넘었지만 아직도 안심할 수는 없다.
사울 일행은 국경에서 멀지 않은 제르넬 요새를 목적지로 정했다.
전력도 충실하고, 여전히 조나단이 지키고 있어 그나마 안심하고 쉴 수 있는 장소였으니까.
다행히 사울 일행이 제르넬 요새에 도착할 때까지 별다른 일은 없었다.
“아니,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냐?”
여전히 제르넬 요새를 책임지고 있던 조나단은 놀란 표정으로 사울을 맞이했다.
“형님, 큰일입니다. 그것이…….”
사울은 옷을 갈아입을 새도 없이 자신이 겪은 일들을 들려주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조나단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뭐라고? 세네카 대족장이 우리 왕국의 외교 공관을 공격하고, 나아가 널 공격한 것 같다고?”
“그런 것 같습니다.”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냐?”
숨을 돌린 사울은 차근차근 자신이 겪은 일을 설명했다.
그리고 함께 보고 겪은 일행들도 그런 사울의 증인으로 나섰다.
사오니엘까지도 말이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
“형님께서 믿기 어려워하시는 게 당연하지요. 하지만 사실입니다. 최소한 세네카의 호위대장인 모데아는 이번 일에 관여하였고, 나아가 일을 주도한 것 같습니다. 대족장의 호위대장이 이번 일을 주도했다면 대족장 역시 이 일에 대해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지요. 그런데도 모데아가 움직였다면, 결국 대족장이 직접 명령했거나 묵인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카스텔도 사울을 거들었다.
“저도 직접 보았습니다.”
“으음…….”
한참 고민하던 조나단이 말했다.
“그럼 내가 어찌하면 좋겠느냐?”
“일단 형님께서는 요새 경비를 더 엄격히 하시고, 특히 주변 이종족을 잘 살펴 주십시오. 왕국 영토 안에서도 카멜 산과 연결된 자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알겠다. 그럼 넌 어찌하겠느냐?”
“하루만 쉬었다가 곧바로 누님께 가 볼까 합니다. 이건 다른 사람이 아닌, 제가 직접 전해야 할 소식이니까요.”
“그게 좋겠다.”
자신이 할 말을 다 한 다음에야 사울은 조나단과 요새의 안부를 물을 겨를이 생겼다.
“형님은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요새를 복구하느라 바쁘다. 전황이 어떻게 흘러가든, 한 번은 더 큰 전투가 일어날 것 같다고 하여 요새를 더욱 보강하고 있다.”
창밖을 내다보니, 요새 곳곳에서 병사들과 일꾼들이 요새를 고치는 모습이 보였다.
지난번 전투 때 파괴된 곳을 고치는 수준을 넘어, 요새를 더욱 튼튼히 개축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네 말대로라면 카멜 산이 가멜다 왕국과 손을 잡았다는 뜻이냐?”
“그런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들어온 정보대로라면 가멜다 왕국도 카멜 산에게 공격받은 것 같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카멜 산이 놈들과 손을 잡았다면 가멜다 왕국 놈들이 가만있을 리 없지. 벌써 카멜 산과 함께 공격해 왔을 거다. 그렇다면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니냐? 카멜 산이 뭘 믿고 우리와 가멜다 왕국 양쪽을 동시에 공격한다는 말이냐?”
“저도 의문입니다.”
카멜 산은 분명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인간 왕국 입장에서 적으로 두기 껄끄러운 세력일 뿐이다.
율렌 섬의 두 인간 왕국 중 한 곳만 작정하고 덤벼도 카멜 산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패망할 것이다.
그런데 두 나라를 함께 공격한다?
솔직히 말해 자살행위를 하는 것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혹시 놈들이 외부 세력과 손잡은 게 아닐까?”
“외부 세력이라면… 대륙 말입니까?”
“그래.”
가능성 없는 소리는 아니다.
율렌 섬 밖에는 율렌 섬보다 몇 배나 큰 사드온 대륙이 있고, 강한 나라와 세력도 여럿 있다.
사드온 대륙에 위치한 일개 상단인 ‘에센 상회’가 철광석 독점 무역을 무기 삼아 율렌 섬에서도 위세를 부렸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