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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무능한 적국 왕자였다-203화 (203/232)

203화

루시아는 제르넬 요새에서 멀지 않은 페로 요새에 머무르고 있었다.

페로 요새는 군사적인 요충지라기보다는 왕국 정보부에서 운영하는 정보 수집 시설에 가까웠다.

그래서 규모는 작고 주둔한 병력도 많지는 않았다.

대규모의 병력의 기습이라도 받는다면 요새의 안위는 물론, 루시아의 안위마저 위태로울 수 있었다.

그럼에도 루시아는 다소의 위험을 감수하고 페로 요새에 머물렀다.

전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정보를 빨리 얻고 보낼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정보에 밝고 항상 냉철한 루시아였지만, 사울이 갑작스럽게 찾아온 것에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지?”

이유 없이 온 것이라면 책망부터 할 듯 날카로웠던 루시아의 눈빛은 사울의 말에 급변했다.

“누님. 카멜 산이 저를, 나아가 우리 왕국을 공격했습니다.”

“뭐라고?”

안경 너머의 루시아의 눈에 당혹스러운 빛이 스쳤다.

정보에 밝은 루시아에게도 예상 밖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게 무슨 소리냐?”

“믿기 어렵지만… 사실입니다.”

사울은 자신이 그동안 보고 겪은 일들을 들려주었다.

사울의 이야기를 다 들은 루시아는 함께 온 아르멜을 바라보았다.

“왕자 전하의 말씀이 모두 사실이며, 제 의견과도 같습니다.”

아르멜의 의견까지 확인한 루시아는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너희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실로 엄청난 사태야.”

“알고 있습니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카멜 산의 목표는 우리 왕국만인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들이 가멜다 왕국과 손을 잡은 게 아니라고?”

“네, 누님. 오히려 가멜다 왕국도 그들의 공격 목표인 것 같습니다.”

“카멜 산에서 자신들의 멸망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거야?”

사울은 고개를 저었다.

루시아의 생각도 같았다.

하지만 카멜 산이 스스로 멸망하려는 게 아니라면, 지금 벌어지는 일은 대체 뭐란 말인가.

고민하던 루시아는 지금껏 아무 말도 하지 않은 한 명에 주목했다.

사울과 함께 카멜 산에서 여기까지 온 다크 엘프, 사오니엘이었다.

“네가 사오니엘인가?”

“그렇소.”

“만나는 건 처음이군. 하지만 편지로 연락을 몇 번 주고받은 적 있지?”

“그렇소.”

“나는 널 믿을 만한 다크 엘프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에서 누구보다 정확한 의견을 낼 수 있는 위치지. 내 동생이나 신뢰하는 부하보다도.”

“…….”

“내 동생과 신뢰하는 내 부하는 대족장의 주도나 묵인하에 카멜 산이 우리 왕국을 공격했다고 확신하고 있다. 심지어 우리 왕국은 물론, 가멜다 왕국까지 공격했다고 생각하고 있지. 네 의견은 어떻지?”

이런 상황에서 내부자의 의견은 그 어떤 명석한 외부자의 의견보다 신뢰도가 높을 수 있다.

지금 사오니엘이 다른 소리를 하면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은 모두 없던 것이 되거나, 다시 조사를 해야 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사오니엘은 다른 소리를 하지 않았다.

“왕자님의 말씀대로요.”

사오니엘의 대답에 루시아가 탄식했다.

“빌어먹을.”

사울은 루시아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온 걸 처음 들어 보았다.

누구보다도 냉철한 그녀도 순간 감정을 추스르기 어려울 만큼 엄청난 소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루시아는 역시 루시아였다.

순식간에 감정을 수습하고는 다시 냉철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심상찮은 정보가 여럿 있기는 했어. 특히 우리 왕국도, 또 가멜다 왕국도 예기치 못한 혼란이나 소요 사태가 몇 번 있었지. 상당한 능력을 가진 자들이 벌인 일이라 누구 소행인지 의문이었는데… 카멜 산의 짓이라면 모든 의문이 풀리는군.”

루시아는 사울도, 아르멜도, 하다못해 카스텔이나 아이나도 아닌 사오니엘에게 물었다.

“이제 우리 왕국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사오니엘은 카멜 산 출신의 이종족이다.

비록 왕국의 첩자 노릇을 하고 있지만, 첩자가 된 이유 역시 카멜 산의 안위를 위해서라고 했다.

카멜 산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게 흘러가는 상황에서, 자신이 카멜 산과 다르센 왕국의 연결 고리가 됨으로써 사태가 최악으로 흘러가는 건 막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루시아가 그런 사오니엘에게 먼저 의견을 구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지금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온건한 의견부터 듣고 싶다는 것이다.

“…….”

큰 기회를 얻은 사오니엘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실권으로 따지자면 사울도 루시아에 미치지 못한다.

지금 자신이 어떤 의견을 내고, 루시아가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카멜 산의 운명이 좌우될 수 있다는 뜻이다.

사울도, 다른 자들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만큼 카멜 산에 속했던 자의 의견이 궁금했고, 또 들을 가치도 충분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생각을 정리한 사오니엘이 말했다.

“대족장님은 살아나기 어렵겠지요.”

“이 자리에서 너와 사울이 말한 정보 모두, 혹은 대부분이 거짓이 아니라면.”

“…저는 카멜 산의 배신자입니다. 그런 제게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대족장님을 살리고 싶습니다.”

듣고 있던 사울은 뜻밖이라고 여겼다.

사오니엘이 그저 자신의 영달만을 위해 첩자 노릇을 한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대족장의 안위부터 걱정할 줄이야.

루시아의 대답은 냉정했다.

“대족장의 안위와 카멜 산의 안위를 바꾸어도 좋다는 말인가?”

“…역시 그런 겁니까.”

“지금까지 한 일만으로도, 그리고 일이 더 커지지 않는다 해도 카멜 산은 책임을 져야 한다. 책임을 지는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우두머리가 목숨을 내놓던가, 카멜 산이 불바다가 되던가. 너희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신뢰를 먼저 깨트린 곳은 카멜 산이고, 반론의 여지는 없다. 아마 가멜다 왕국에서도 똑같이 생각하겠지.”

사오니엘은 대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면서, 또 눈물까지 머금으면서 말했다.

“다른 방법이 없군요.”

“그래. 설령 대족장이 이번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단순히 묵인만 한 것이라도 책임을 면할 순 없다. 상황을 전혀 몰랐거나, 혹은 불순분자들에게 이미 제압당한 상태라면 참작의 여지가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을 겁니다.”

“내 생각도 같다. 결국 대족장이 책임을 져야겠지.”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울은 세네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절감했다.

첩자 노릇을 하던 자가 그를 위해 눈물까지 보였다.

하물며 진심으로 세네카에게 충성을 다하는 자들이라면 기꺼이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겠는가.

그 정도의 인망과 능력을 가진 자가 자신을 죽이려 했고, 나아가 왕국을 공격한 것이다.

‘대체 왜 세네카는 이렇게 무모한 일을 한 거지?’

세네카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따질 단계는 지났다.

문제는 왜 이런 일을 했느냐이다.

두 나라의 전쟁이 격해진 틈을 타 무언가 이익을 노리려 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세네카 정도의 능력과 세력이 있다면 좀 더 은밀하게 움직이고, 설령 발각되어도 사태를 최악으로 만들진 않을 만한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대체 왜 일을 이렇게 만든 것인지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루시아도 사울과 생각이 비슷했다.

“카멜 산의 힘을 다 합쳐도 우리 왕국이나 가멜다 왕국이 가진 힘의 절반, 아니 반의 반도 되지 않겠지.”

“네, 누님.”

“대족장이 4분의 1, 아니, 두 왕국을 합치면 8분의 1도 안 되는 카멜 산의 힘만을 가지고 이런 일을 벌이진 않았을 테고.”

“그렇습니다. 분명 조력자가 있을 겁니다. 문제는 그 조력자가 누구이며, 또 얼마의 힘을 가지고 있느냐는 점입니다. 조나단 형님은 섬 밖의 대륙 쪽에서 개입한 게 아닌지 의심하시더군요.”

사울은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했던 의견.

루시아의 생각도 같았다.

“지금 대륙의 정세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열 곳 가까운 강대국이 서로를 견제하면서 불인한 평화를 유지하고 있으니까. 대륙에서 율렌 섬의 전쟁에 직접 개입하려면 대륙의 모든 나라의 뜻이 모이거나 혹은 묵인하에 어떤 강대국이 본격적인 군사 행동을 벌여야 가능할 것인데… 지금으로선 그럴 가능성은 없다. 하다못해 대륙 쪽에서 별달리 수상한 움직임도 보인 적이 없으니.”

“역시 그렇군요.”

루시아는 사울에게 다른 것을 물었다.

“네가 관리하던 외교 공관 쪽은 어떻게 되었느냐?”

“재건은 늦추고, 경비를 최대한 강화하라고 연락을 보냈습니다. 필요하면 대신전의 협조도 구하라 했고요.”

“대신전은 이 일과 무관하다고 보는 모양이구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 생각도 같다. 하지만 대신전 일부가 카멜 산과 한패일 가능성은 높지.”

“그래서 믿을 만한 자들하고만 소통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 조치로 충분하다면 다행이겠지만.”

마침내 루시아는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부터 카멜 산을 어떻게 대해야 한다고 보느냐?”

“일단 진상을 확실히 파악하는 게 먼저겠지요. 세네카에게 직접 사절을 보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습니다만…….”

지금 사절을 보내는 건 대단히 어려운 선택지다.

세네카가 이 모든 일의 주범이라면, 왕국이 보낸 사절을 살려 둘 가능성은 극히 낮을 테니까.

세네카가 왕국 사절에게 해코지를 한다면 그거야 말로 그가 이 모든 일을 벌인 주동자라는 확실한 증거다.

문제는 왕국 인재의 죽음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것.

위험한 임무와 죽을 게 거의 확실한 임무는 다르다.

전장이라면 최후의 수단으로 죽음을 각오한 결사대를 운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저 증거를 찾기 위해 자국의 인재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건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적이라면 함정에 빠트릴 수 있지만, 아군을 함정에 빠트리는 건 끔찍한 배신이니까.

사울은 역시 고개를 저었다.

“사절 같은 것을 보내기보단 다른 방법을 찾는 게 좋겠습니다.”

다행히 냉정한 루시아도 사울의 말에 동의했다.

“그게 좋겠다. 꼭 이쪽에서 묻지 않더라도, 저쪽에서 먼저 정체를 드러낼 수도 있으니.”

“확실히 그렇군요.”

지금껏 카멜 산은 철저히 중립을 지켜왔다.

복잡한 정치나 전쟁 문제에는 개입하지 않고, 자신들이 이룩한 이종족의 세상을 지키겠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이제 카멜 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실패하면 카멜 산이 멸망하고, 율렌 섬의 모든 이종족을 지옥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도박을 시작했다.

아무 준비 없이 그 정도의 일을 벌였을 리는 없다.

‘만에 하나 카멜 산이 가진 힘이 상상 이상이라면, 그래서 가멜다 왕국과 다르센 왕국 두 곳 모두와 싸워 이길 자신이 있는 것이라면…….’

순간 나쁜 예감이 들었다.

머잖아 정말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예감 말이다.

그 예감이 맞아 떨어진 듯, 급보가 전해졌다.

“전하! 큰일입니다! 그것이…….”

급한 소식을 가지고 달려온 왕국 정보부 소속 기사는 순간 말을 주저했다.

루시아와 함께 있는 손님들 때문이었다.

“괜찮다. 말해 보거라.”

“네, 알겠습니다.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반란.

그것만으로도 놀라운 소식이었지만, 정말 놀랄 이야기는 따로 있었다.

“누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말인가?”

“홉킨스 남작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미 홉킨스 가문 영지에 있던 왕국 감찰관과 관리들은 전멸했고, 인근에서 주둔하고 있던 왕국군까지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보고가 끝나기도 전에 아이나가 외쳤다.

“아버님께서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이나 홉킨스.

항상 사울과 함께 싸워 온 충복이자 전우.

그런 아이나의 아버지인 던칸 홉킨스 남작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아이나는 당장이라도 기사의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였다.

그런 아이나를 제지한 건 루시아였다.

“아이나.”

“…….”

차갑게 가라앉은 루시아의 목소리에는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아이나마저 위압시키는 힘이 있었다.

한마디로 아이나를 ‘진정’시킨 루시아가 기사에게 물었다.

“틀림없는 정보인가?”

“네, 틀림없는 정보입니다! 이미 폐하께도 같은 보고가 올라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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