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하얀 까마귀라니.”
“킬리안 말씀이십니까?”
“그래, 아군을 공격한 자들이 그 킬리안의 하얀 까마귀였다는군.”
킬리안이 이끌던 조직 하얀 까마귀는 다르센 왕국에서는 거의 붕괴되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그런 그들이, 이런 상황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킬리안과 악연인 사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분명 킬리안은 대단히 유능하고 위험한 놈이지만, 그래 봐야 깡패 조직의 우두머리야. 스스로 이런 일을 기획하고 주도하여 움직일 리는 없어. 그렇다면 킬리안도 장기짝일까.’
킬리안은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니다.
특히 스스로 원해서 장기짝 노릇 따윌 할 인물은 더더욱 아니었다.
“생각보다 일이 더 복잡해진 것 같군.”
“어떻게 하실 겁니까?”
사울은 잠시 생각하다 아르멜에게 명령했다.
“일단 누님께 이 사실을 알리고 첩보를 부탁드려. 이곳뿐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킬리안이 허튼짓을 하려 들지 몰라.”
“알겠습니다.”
이후로도 카스텔과 사오니엘은 몇 번의 사냥을 더 성공했다.
덕분에 크고 작은 피해를 입으면서도 문제없이 진군을 계속할 수 있었다.
여전히 반란군은 왕국군과 정면 대결을 시도하지는 못했다.
야전은 물론, 작은 요새나 성을 끼고 있던 자들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철수하거나 싸우기도 전에 피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비교적 일이 순조롭게 풀린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울은 마냥 마음을 놓지 못했다.
이제 반란군의 본진이라 할 만한 사제타도 그렇게 멀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종합해 보면, 적들은 사제타에서 한 방에 결판을 지을 모양이었다.
그것도 몰릴 대로 몰려 어쩔 수 없이 치르는 결전이 아니라, 철저히 준비하고 자신 있게 결전을 치르는 느낌이다.
무언가 비장의 한 수를 준비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현재의 전력으로 왕국군을 물리칠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홉킨스 가문이나 그 배후에 있는 자들이 근거 없는 자신감만 가지고 이렇게 행동할 만큼 어리석진 않을 것이다.
“반란군이 사제타를 버리진 않겠지.”
“그럴 가능성은 없을 겁니다, 전하.”
“나라면 사제타에서 결전을 시도하진 않을 거야. 성벽이 높은 것도 아니고, 물자나 병력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닐 테니까.”
“역시 반란군에게 믿는 구석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그래, 하얀 까마귀가 저들과 한 편이라는데, 설마 깡패를 믿고 반란을 일으키진 않았겠지. 그 믿는 구석이 무엇이든, 사제타에선 분명 정체를 드러낼 테고.”
“네.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 같습니다.”
“항상 그랬지.”
최근 사울은 자신, 나아가 율렌 섬을 둘러싼 상황이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눈앞의 원수나 적을 죽이거나 눈앞의 적국만 이긴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오랜 전란으로 인하여 생겨난 수많은 문제들이 소용돌이치며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 복잡한 실타래를 푸는 방법은 무엇일까.
지금 사울이 할 수 있는 건 한 가지뿐이다.
모든 실체가 드러날 때까지 계속 싸우고, 이기는 것.
마음을 다잡으며 사울은 계속 병력을 진군시켰다.
마침내 왕국군은 사제타의 코앞에 당도했다.
* * *
홉킨스 가문 영지의 중심이자 이젠 반란군의 본거지가 된 도시, 사제타.
다시 봐도 그렇게 크거나 웅장한 도시는 아니었다.
규모도, 도시를 둘러싼 성벽이나 성문도 왕국 수도나 주요 도시보다는 훨씬 작았다.
하지만 규모가 작아도 얕볼 수는 없다.
왕국군보다 수는 적지만 반란군의 사기는 높아 보였고, 군기도 엄정하게 잡혀 있었다.
게다가 성을 끼고 있는 건 물론, 사제타 주변을 맴돌며 왕국군을 견제하는 별동대도 있었다.
사제타의 코앞에서 일단 진군을 멈춘 사울은 다시 한번 회의를 가졌다.
“아군의 숫자는 약 5천. 적의 숫자는 사제타 안과 별동대를 다 합쳐도 2천이 넘진 않을 거예요. 저쪽에서 성벽을 끼고 있다 해도 전력은 확실히 아군의 우위지요.”
“그렇습니다. 전하.”
“그동안 지나쳐 온 곳들은 확실히 제압했고, 머잖아 후속군이 주둔할 테니 후방을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여기서 이기면 반란군은 재기 불능에 빠질 거예요. 그런데 반란군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사제타에 전력을 집중시켜 우릴 막는 것을 택했지요. 즉, 이 전투는 우리가 원한 것이면서, 동시에 반란군이 원한 것이기도 해요. 이것이 결코 방심해선 안 되는 이유예요.”
회의장에 모인 모두가 사울처럼 신중론자는 아닐 것이었다.
하지만 사울의 타당한 논리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알겠지만 하얀 까마귀가 반란군과 협조하고 있어요. 나는 그 수괴인 킬리안 비셔스와 직접 싸워 보았고, 그를 이 왕국에서 몰아낸 사람이에요. 하지만 킬리안과 그 조직은 결코 얕볼 자들이 아니에요. 또한 홉킨스 가문이 깡패만 믿고 반란을 일으키진 않았을 거예요. 전장에서 예상 밖의 사태가 벌어질지 모른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요.”
“네, 전하!”
“나에게 비장의 카드가 있듯 저쪽에도 무언가 숨겨 둔 카드가 있을 거예요. 그 점을 명심하고 신중하면서 철저히 적들을 공략하고, 반역자들을 모조리 토벌하도록 해요.”
“명심하겠습니다!”
이렇게 전투 준비가 시작되었다.
사울은 부하들과 의논 끝에 전력 대부분을 사제타 공격에 투입하기로 했다.
어지간한 공성 병기 몇 대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할 ‘카스텔’ 같은 인적 자원도 적극 동원 하기로 했다.
사울은 직접 공성전에 참여하지 않고 중군에 남았다.
대장으로서 비교적 안전한 위치에 머무르는 것이라 할 수도 있었지만, 마냥 안전한 건 아니었다.
불리한 적들이 사울의 목을 벰으로서 역전을 노릴 가능성도 적지 않으니까.
이 점을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중군의 병력이 너무 적지 않습니까? 반란군이 어떤 수를 쓰든 전하가 계신 이곳을 들이치기라도 한다면…….”
“전장에서 모든 걸 완벽하게 대비할 순 없어요. 성벽 위를 오르는 병사들도 있으니 나 또한 그 정도의 위험은 감수하겠어요.”
누구도 이미 굳은 사울의 뜻을 돌리지 못했다.
그렇게 전투가 시작되었다.
“진군하라!”
“반란군들을 모조리 베어라!”
지휘관들의 외침과 함께 왕국군이 일제히 사제타로 진군했다.
사제타 주변은 대부분 평지라 많은 병력을 투입하는 데 별 문제가 없어 5천의 병력 중 4천 이상이 성벽을 깨는 데 투입되었다.
“쏴라!”
“우리의 땅을 지키자!”
반란군들도 기세등등하게 맞섰다.
화살과 마법 세례가 쏟아지고, 공성 병기와 수성 병기가 각각 성벽이나 상대 진영을 무너뜨리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그야말로 치열한 대전투였다.
“검은 마녀다!”
“마녀를 막아라!”
선봉대에 참여한 카스텔도 큰 존재감을 보였다.
카스텔은 무작정 성문을 파괴하거나, 성벽 위로 오르려 하진 않았다.
대규모의 전장에서는, 특히 공성전에서 적 성을 공격하는 상황에서는 개인의 힘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막강한 개인’의 힘을 가장 효율적으로 발휘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카스텔은 잘 알고 있었다.
시선을 돌리고 또 적 전력을 분산시키는 것이었다.
“저기 검은 마녀다! 으악!”
“어서 쏴!”
카스텔은 일부러 성문 근처를 맴돌며 적들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성문 위와 그 주변을 지키는 병사들을 먼저 공격했고, 빈틈이 생기면 성문이나 성벽까지 공격했다.
때문에 반란군은 카스텔 ‘개인’을 견제하기 위해 상당한 전력을 투입해야 했다.
아무리 튼튼한 성문이나 성벽이라도 카스텔이 작정하고 힘을 모아 공격하면 파괴될 수 있다.
적지 않은 전력이 카스텔 공격에 나섰지만, 카스텔은 무너지지 않았다.
돌이든 화살이든 마법이든 날아오는 모든 공격을 막거나 피하며 성벽 위에 공격을 퍼부었다.
그렇게 카스텔 한 명에게 당한 반란군은 적지 않았고, 전력 손실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출혈이 더 컸다.
“정말 대단하군.”
마법으로 시력을 높여 그 광경을 지켜본 사울은 감탄했다.
지금의 카스텔이라면 전성기 못지않은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그동안 쌓은 경험을 고려하면, 어쩌면 전성기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카스텔이 강해지는 건 사울로서도 마냥 달가운 일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녀가 다치지 않고 제 몫을 다 해 주길 바랄 뿐이었다.
“반란군을 모조리 쓸어버려라!”
“와아아아!”
당장의 전황은 꽤 순조로웠다.
카스텔이 있는 곳은 물론, 없는 곳에서도 아군이 밀리진 않았다.
하루아침에 사제타를 점령하긴 어렵겠지만, 이대로면 며칠 안에 성을 함락시킬 수 있을 듯했다.
전투가 너무 쉽게 풀리는 게 석연치 않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할 놈들은 아니야. 뭔가 있는 건가.’
사울은 만일을 대비해 명령을 내렸다.
“적이 본진을 치거나 다른 수를 쓸지 모른다. 철저히 대비하도록.”
“네, 전하!”
명령을 내리면서도, 사울은 오늘 당장 저쪽에서 무언가 수를 쓸 가능성은 낮다고 보았다.
전투 첫 날부터 마음이 풀어지는 군대는 드문 법.
설령 자신을 향해 기습을 한다 해도 오늘은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울의 생각은 빗나갔다.
“전하!”
“무슨 일이지?”
“정체불명의 무리가 접근 중입니다!”
“뭐라고?”
사울은 급히 아르멜이 보고한 ‘정체불명의 무리’를 살폈다.
확실히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무리, 그것도 무장한 무리가 어디선가 나타나 이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게다가 적 별동대 역시 사제타를 공격하는 아군 부대가 아닌, 이쪽으로 향하는 것 아닌가.
아무래도 사울의 목을 노리는 모양이었다.
이런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벌어질 줄은 몰랐다.
“전하, 아군에 신호를 보내야겠습니다.”
이럴 때를 대비해 사울은 미리 신호를 정해 두었다.
신호에 따라 소수의 병력이, 혹은 다수의 병력이나 전 병력이 회군하여 자신을 지키도록 되어 있었다.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사울이 명령했다.
“1단계 신호를 보내.”
“그거면 되겠습니까?”
“충분해.”
사실은 충분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적의 머릿수는 많지 않아 보였지만, 이런 무모한 작전을 수행할 정도면 분명 정예일 것이다.
소수 정예의 돌격은 때론 많은 정예병으로도 막기 어려운 법이니까.
자신의 안위를 확실히 지키는 대신 오늘 공성전을 사실상 포기하느냐.
다소 위험을 감수하면서 공성전을 밀어붙이느냐.
사울은 후자를 택하기로 했다.
도박이라면 도박이겠지만, 저 정도의 적에게 죽진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
곧 사울의 명령에 따라 신호가 보내졌다.
굉음과 함께 마법 불꽃 하나가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1단계 신호, 곧 ‘소수의 지원 요청 신호’였다.
어쩌면 신호만으로도 적들이 물러갈 수도 있다.
이쪽의 전력도 만만찮은 데다가, 구원까지 요청한 것이니까.
하지만 적 별동대도, 또 정체불명의 무리도 물러서지 않았다.
똑바로 사울이 있는 중군으로 짓쳐들어오면서 전투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예전과 딱 반대로군.’
얼마 전 제르넬 요새 공성전에서는 사울이 요새를 수비하면서 별동대로 적 수뇌부를 치는 전략을 구사했다.
지금은 상황이 180도 바뀌었다.
적들이 사울을 쳐서 불리한 상황을 뒤집으려 하며, 사울은 그것을 막아야 한다.
사울은 마법으로 먼저 ‘정체불명의 무리’를 살폈다.
모두들 갑옷을 입고, 복면까지 써 제대로 알아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갑옷이나 복면으로도 숨길 수 없는 외모적 특징이나 체형을 볼 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종족 무리였다.
이어 사울은 별동대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낯익은 깃발이 보였다.
홉킨스 가문의 깃발이었다.
아마 홉킨스 가문의 직속 병력이리라.
‘만만치는 않겠군.’
저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싸워 봐야 알 수 있다.
하지만 달려오는 기세나 질서정연한 움직임을 보면 정예가 분명했다.
게다가 이종족 무리라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 예측조차 쉽지 않았다.
“모두들 적 공격에 철저히 대비하라!”
사울의 명령에 중군은 더욱 방비를 굳혔다.
얼마 후.
“사울 왕자를 죽여라!”
별동대와 이종족 병력이 중군에 도달하며 전투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