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사울은 묶인 채 꿇어앉은 포로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반란군이다. 적군이라면 포로에게 자비를 베풀 수도 있지만, 반란군에게는 자비를 베풀 필요가 없지.”
“…….”
“너희들이 입을 열지 않는다면 모두 반역죄로 재판을 받을 것이다. 물론 살아남지 못하겠지. 하지만 자백을 하면 반역자가 아닌, 일반 포로로 대우해 주겠다. 그럼 목숨은 건질 수 있을 것이다. 명심해라. 기회는 한 번뿐이다.”
사울은 선택권을 주었고 포로들은 선택했다.
절반 정도는 입을 열겠다고 했고, 나머지 절반은 굳게 입을 닫았다.
“그런가.”
사울은 일단 입을 열기로 한 포로들을 심문했다.
그리고 입을 닫은 포로들은 카스텔이 맡았다.
온건한 심문과 마법 정신 제압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렇게 사울도 카스텔도 정보를 얻었다.
두 정보를 비교해 본 사울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심문한 포로들에게 말했다.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군.”
맨정신의 포로들이 이야기한 것과 정신이 제압된 포로들이 강제로 토해 낸 정보가 거의 일치했다.
그만큼 믿을 만한 정보라는 뜻이다.
“항복하고 자백한 포로와 항복하지 않은 반역자들은 따로 구금하라.”
포로들이 끌려가는 광경을 바라보며 사울은 얻은 정보들을 점검해 보았다.
먼저 이번 반란은 영주 가문이 직접 주도한 게 확실해졌다.
영주군들이 그렇게 증언했고, 영주 던칸과 소영주 칼랜드가 앞장서 반란을 일으켰다고 했다.
홉킨스 가문의 다른 구성원들과 대부분의 가신들도 반란에 참여했다.
소수 반대하는 자들은 이미 숙청되거나 도망쳤다고 한다.
‘만에 하나 홉킨스 가문이 이미 꼭두각시가 되었을 가능성도 사라졌군.’
왕국 법에서 연좌제는 거의 인정되지 않는다.
가족 중 반역자가 나왔다 해도, 혐의가 없는 가족들은 기껏해야 지위 박탈이나 추방이지 죽이는 법은 없다.
하지만 이번 반란은 사실상 홉킨스 가문 전체가 주도하거나, 혹은 참여했다.
반란이 진압되면 영주의 직계 가족 중 살아남는 건 아이나뿐이지 않을까.
‘정말 이상한 일이야. 영주씩이나 되는 자가 이런 무모한 반란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다니. 이종족이 개입한 것 같지만 지금으로선 큰 도움을 받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역시 또 다른 흑막이 있는 걸까.’
수수께끼는 또 있었다.
바로 ‘광전사’였다.
복면으로 정체를 감춘 무리는 이종족이라고 밝혀졌다.
카멜 산이 직접 보낸 자들이든, 다른 곳에서 왔든 정체가 어느 정도 밝혀진 것이다.
하지만 ‘광전사’는 수수께끼였다.
광전사와 함께 움직이던 이종족은 모두 죽었고, 살아남은 포로들도 광전사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그렇다고 아예 낯선 존재는 아닌 것 같다는 게 더더욱 신경 쓰였다.
한참 생각하던 사울은 마침내 ‘광전사’와 비슷한 것을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해 냈다.
“선생님.”
“네, 전하.”
“예전에 킬리안의 본거지를 토벌했을 때 기억나요?”
사울의 말에 카스텔도 기억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하얀 까마귀의 본거지에서 본 정체불명의 존재 말입니까.”
“그래요.”
사울이 홉킨스 가문과 함께 지내던 때의 일이다.
멀지 않은 중립 지대에서 본거지를 만든 하얀 까마귀의 토벌에 나섰고, 본거지를 무너뜨렸다.
그 과정에서 사울은 정체불명의 존재와 마주친 적이 있다.
보통 병사보다 강한 힘을 가졌고, 미친 듯이 싸우며 아픔조차 느끼지 않는 것 같은 존재.
마법이나 연금술 같은 힘으로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가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끝내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존재.
그런데 오늘 전장에서 본 광전사는 그때 본 자들과 흡사했다.
“킬리안의 짓일까요?”
카스텔의 말에 사울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증거가 더 필요해요.”
아직은 모든 게 불분명했다.
수수께끼는 사제타 성문이 열린 뒤에야 풀릴 수 있을 듯했다.
* * *
반란군의 본거지, 사제타.
영주이자 반란을 일으킨 장본인인 영주 던칸의 저택은 자연스럽게 반란군의 기지가 되었다.
“별동대도 실패했는가.”
“네, 영주님. 소수의 병력만 귀환했고, 나머지는 전멸했습니다.”
“알았다.”
전령을 내보낸 영주 던칸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사울 왕자는 만만치 않군.”
던칸 곁에 있던 소영주 칼랜드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래서 제가 이번 작전을 반대하지 않았습니까. 아버님.”
“전황을 일거에 뒤집으려면 그 방법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적의 기세가 쉽사리 꺾일 리 없으니, 그렇다면 예상치 못한 시기에 기습을 하는 게 최선이었다. 카멜 산에서도 내 생각에 동의하여 적게나마 지원군을 보낸 게 아니냐.”
“그렇긴 합니다만.”
던칸의 가신 중 한 명이 말했다.
“영주님. 카멜 산의 본격적인 도움은 언제 받을 수 있답니까?”
“조만간 우릴 도우러 오겠지. 조만간…….”
다른 가신들이 불만을 터뜨렸다.
“상황이 이렇게 급박한데 카멜 산에서는 뭘 하고 있는 겁니까?”
“맞습니다. 우린 그들을 믿고 이번 일을 벌인 게 아닙니까?”
“당장 성이 떨어지진 않겠지만 오래 버티긴 어려울 겁니다. 사울 왕자를 노리는 작전도 실패했고, 적의 공격이 계속되면 결국은 성이 떨어질 겁니다!”
던칸도, 칼랜드도 불만을 터뜨리는 가신들과 생각이 비슷했다.
도움 없이는 오래 버티기 어려운데, 정작 카멜 산의 도움은 생각보다 미미했다.
만에 하나 카멜 산이 자신들을 버린다면 꼼짝없이 반역자로서 떼죽음을 당할 판이다.
모두들 고민에 빠진 가운데, 경비병이 찾아와 알렸다.
“영주님!”
“무슨 일이냐.”
“카멜 산의 사절이 영주님을 뵙고 싶다고 합니다.”
마침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에 이보다 반가운 손님은 없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전하는 경비병의 표정이 심상찮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그게… 사절이 스스로를 소개하기를 킬리안 비셔스라고…….”
킬리안 비셔스.
이 자리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자는 없다.
한때는 세력을 거의 잃고 쫓겨나기도 했지만, 지금은 전쟁을 틈타 다시 상당한 세력을 모았다는 사실도.
그런 킬리안이 카멜 산의 사절로서 나타났다는 건 상상을 초월한 일이었다.
모두들 놀라다 못해 경악했지만 두 명만은 예외였다.
던칸과 칼랜드였다.
“아버님.”
“이제 놈도 더 이상 정체를 숨길 마음이 없나 보군.”
던칸은 모두에게 알렸다.
“모두들 놀랄 건 없다. 얼마 전부터 킬리안과 카멜 산은 손을 잡았다고 한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다. 비밀로 해 달라고 하여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지만, 놈이 모습을 드러냈다면 더 숨길 필요는 없겠지.”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킬리안이 강하고 능력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약하고 능력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악명 높은 범죄자가 되지 못했을 테니까.
“그를 불러와라.”
“그와 함께 온 자들은 어떻게 할까요?”
“함께 온 자들?”
“네, 대여섯 명 정도가 함께 왔습니다.”
“그 정도라면 굳이 막을 필요는 없겠지. 모두 불러와라. 경비병도 더 배치하도록.”
“알겠습니다.”
곧 킬리안이 일행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도 킬리안과 만나 본 적은 없었지만, 그가 발을 들인 순간 모두들 상대가 진짜 킬리안임을 알았다.
평범한 여행자의 복장을 했지만, 다소 마른 얼굴에 소름 끼칠 만큼 날카로운 눈빛은 모두가 익히 들어 온 킬리안의 외모 그대로였다.
킬리안의 충복인 제온과 칼립소, 그리고 몇 명의 부하들이 그를 뒤따르고 있었다.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킬리안은 한 번 주변을 둘러본 뒤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킬리안 비셔스라고 합니다.”
말투나 행동거지나 깡패 두목치고는 놀랄 만큼 예의 발랐다.
하지만 무언가 알 수 없는 섬뜩한 느낌에 모두들 본능적으로 긴장했다.
킬리안도 킬리안이거니와, 그가 데려온 부하들의 모습도 예사롭지 않았다.
제온과 칼립소는 물론 다른 부하들도 무언가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풍겼다.
팽팽한 분위기 속에서 킬리안이 입을 열었다.
“저를 환대해 주시진 않는군요.”
던칸에 앞서 칼랜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만나서 반갑소, 킬리안.”
“네, 반갑습니다. 제 눈이 맞다면, 당신이 소영주 칼랜드군요.”
“그렇소.”
“옆에 계신 분은 던칸 영주님. 그리고 가문 구성원과 가신들도 대부분 이 저택에서 함께 지내고 있다 들었습니다.”
던칸이 입을 열었다.
“카멜 산의 사절로서 왔다고 했는가?”
“그렇습니다. 영주님.”
“우리 또한 카멜 산과 손을 잡았으니 한배를 탄 셈이로군. 우릴 도우러 온 건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릴 도우러 온 게 아니다?”
“네. 여러분들을 모두 죽이러 왔습니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무언가 잘못 들었거나 농담을 한 것인가.
하지만 킬리안은 잘못 들은 것도, 농담도 아님을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그가 손을 휘두르자 날카로운 실이 흘러나와 가장 가까이 있던 자를 훑었다.
“으악!”
비명과 함께 홉킨스 가문의 가신 한 명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네 이놈!”
자리에 있던 모두가 창칼을 빼 들었다.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여 배치된 경비병들까지 무기를 겨누면서 킬리안과 그 일행은 졸지에 완전히 포위된 꼴이 되었다.
하지만 킬리안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미리 말해 두지만, 이건 철저히 내 개인적인 감정 때문입니다.”
“뭐라고?”
“카멜 산에서는 당신들과 손을 잡으라고 했지요. 하지만 내가 거부했습니다. 당신들은 예전에 날 공격하지 않았습니까? 한 번이라도 내게 직접 칼을 들이댄 자와는 손을 잡지 않는다는 게 내 좌우명이라서.”
“건방진 놈! 네 놈의 목을 벤 뒤 카멜 산에 따지겠다!”
말로는 기세 좋게 외쳤지만, 누구도 킬리안에게 섣불리 덤비지 못했다.
죽음의 실을 날리는 킬리안의 악명은 그의 주 활동지 중 하나였던 홉킨스 가문 영지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홉킨스 가문 사람들이 주저하는 가운데, 킬리안도 섣불리 손을 쓰지 않았다.
이대로 시간을 끌면 경비병이 더 몰려들어 불리해질 것임을 알면서도 여유롭기만 했다.
그 태도에 더욱 불안감을 느낀 던칸이 명령했다.
“비상을 걸어라.”
“네!”
경비병이 호각을 불었다.
보다 많은 경비병들이 달려오는 가운데, 킬리안도 손을 썼다.
“시작하지.”
킬리안은 손을 치켜올렸지만, 실을 날리지는 않았다.
그저 손가락을 퉁기며 딱 소리를 냈을 뿐.
그 소리와 함께 킬리안에 데려온 부하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온과 칼립소를 제외한 나머지 부하들이 짐승처럼 으르렁대는가 싶더니, 이내 사방팔방으로 달려들었다.
“영주님을 지켜라!”
무기도 들지 않은 자들이 짐승처럼 달려드는 건 제대로 된 전사나 마법사 상대로는 큰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
훈련된 자가 휘두르는 창칼이나 마법에 막혀 제압되거나, 목이 날아가기 십상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으아악!”
“괴, 괴물이다!”
사방팔방에서 날뛰는 킬리안의 부하들은 말 그대로 짐승, 아니, 괴물들이었다.
엄청난 힘과 속도를 무기 삼아 맨손으로 사람을 찢고 꺾었다.
던칸의 휘하들은 물론, 던칸까지 직접 검을 들고 맞섰지만 상대가 되지 않았다.
불과 다섯 명에 불과한 괴물들은 회의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럴 수가…….”
놀란 칼랜드가 중얼거렸다.
비록 검을 쓰지는 못하지만, 검과 마법에 대한 지식은 남부럽지 않은 그다.
그런 칼랜드가 보기에 이건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몇 명의 괴물이 지금껏 죽인 사람만 자신들의 열 배는 되어 보였다.
그 광경을 즐겁게 바라보던 킬리안이 명령했다.
“우리도 신호를 보내라.”
“네, 두목.”
제온의 손끝이 빛났다.
마법으로 신호를 보낸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택 안팎에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아악!”
“사람 살려!”
던칸도, 칼랜드도, 그들의 부하들도 도무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자신들을 공격하고 있는 저 괴물들은 무엇이며, 다른 곳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 소리는 또 뭐란 말인가.
킬리안이 말했다.
“모두에게 소개합니다. 마법, 연금술, 어둠의 힘이 조합되어 만들어진 새로운 존재, 버서커를!”
“버, 버서커?”
“그렇습니다. 당신들은 완성된 버서커의 기념할 만한 첫 번째 희생자들입니다.”
킬리안이 데려온 괴물들.
‘버서커’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