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일단 주변을 살피며 좀 더 정보를 모아 보도록 해요.”
사울은 회의를 마친 뒤 주변을 수색했다.
몇 개의 마을을 뒤졌고, 결과는 똑같았다.
살펴본 모든 마을이 폐허가 되었고 생존자는 전무했다.
“전하, 이웃 마을에서도 생존자를 찾지 못했답니다.”
“이곳 상황과 마찬가지인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두 번째로 방문한 마을을 둘러 보았다.
지진으로 마을이 통째로 무너지거나 불이라도 나서 잿더미가 되진 않았다.
대신 모든 집들이 난장판이 되었고, 눈에 띄는 마을 주민 모두가 죽어 있었다.
신경 쓰이는 건, 시체가 적다는 점이었다.
마을 규모를 고려할 때, 주민들이 전멸했다면 시체가 지금보다 두 배는 더 많아야 했다.
“마을 사람 절반은 광전사가 되고, 나머지 절반은 죽은 건가.”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사망자 숫자가 얼추 맞아떨어집니다.”
아르멜의 동조에 사울은 고개를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작은 마을 몇 곳이 공격을 받았는데도 이렇게 큰 피해를 입었어. 이런 일이 사제타보다 더 큰 도시에서 벌어진다면…….”
사울은 자신이 아는 가장 큰 도시를 떠올렸다.
다르센 왕국의 수도 레디아.
가멜다 왕국의 수도 카토리아.
둘 모두 수만의 인구가 거주하는 큰 도시다.
그곳 주민들의 절반, 혹은 모두가 광전사가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율렌 섬 역사상 최악의 학살 사건이 벌어지고도 남으리라.
‘세네카는 그런 참상이 벌어지는 걸 바라는 건가.’
복수를 삶의 목표로 삼은 사울이라지만, 최악의 학살극이 벌어질지 모를 가능성을 모르는 척할 수 없었다.
그리고 사태는 점점 사울이 생각한 나쁜 방향대로 흘러갔다.
“전하, 큰일입니다!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가 광전사의 습격을 받았답니다!”
“피해는?”
“광전사를 물리쳤지만, 아군의 피해가 심각하다고 합니다.”
당장 달려가고 싶었지만, 지금은 함부로 움직이기 어려웠다.
조사 등을 이유로 이곳저곳에 병력을 나누었는데, 함부로 움직였다가 수많은 광전사와 맞닥뜨리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을 겪을 테니까.
“전하, 일단 병력을 집결시켜야겠습니다.”
“그래야겠군. 모두들 약속된 집결지로 이동한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수색 중인 자들도 하루빨리 집결지로 모이라 하라.”
“알겠습니다!”
다행히 집결지로 모이는 중 공격을 받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모든 병력이 모인 뒤에야 사울은 피해를 본 주둔지로 향했다.
주둔지의 상황은 처참했다.
주둔하고 있던 절반가량이 사망하거나 당분간 전투에 투입될 수 없을 만큼 큰 상처를 입었다.
부대를 지휘하던 부대장도 부상을 입어 사울에게 상황을 보고하기 전 간신히 예를 취할 정도였다.
“그대들도 광전사의 습격을 받았는가?”
“그렇습니다. 간신히 공격을 막아 냈습니다만…….”
“적들은 전멸하였나?”
“네, 전하.”
사울은 전멸한 광전사들을 살폈다.
이번에도 평범한 마을 사람이 말 그대로 미쳐 날뛰다 비참하게 목숨을 잃은 모습들이었다.
“처참하군.”
“그렇습니다. 심지어 인근 마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우리 부대도 그 마을과 안면을 튼 병사들이 여럿 있었는데…….”
“이런 일이 다른 지역에서도 벌어지고 있다는 걸 아는가?”
“그렇습니까? 광전사에 대한 건 얼마 전 왕국 정보부에서 보고를 받았습니다만…….”
“이런 일은 처음도 아니고, 아마 마지막도 아닐 것이다. 어쩌면 이미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모른다.”
사울의 말을 들은 부대장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그런 괴물들이 다른 곳에서도…….”
“그렇다. 난 그것을 막기 위해 움직이고 있고.”
부대장은 한참을 고민했지만, 결국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제가 아는 건 그자들이 말 그대로 ‘광전사’, 미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다른 건 아는 게 없나?”
“네. 그저 광전사의 습격을 받고 힘겹게 물리쳤을 뿐입니다. 무언가 새로운 걸 알아내면 꼭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그때 아르멜이 새로운 보고를 해 왔다.
“전하,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이번 일과 관련이 있나?”
“네. 자리를 옮기시지요.”
사울은 아르멜을 비롯하여 최측근만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무슨 일이지?”
“카멜 산 쪽의 정보입니다. 카멜 산에서 왕국과의 모든 연결 통로를 단절했다고 합니다.”
“그런가.”
카멜 산에서 공식적으로 왕국과 연결 고리를 잘랐다.
이는 카멜 산에서도 자신들이 이 모든 사태의 배후에 있다고 자백한 것과 다름없는 행위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다.
“가멜다 왕국 쪽은?”
“가멜다 왕국과의 연결 통로도 단절했답니다.”
“그렇단 말이지.”
가멜다 왕국도 바보가 아니라면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 배후에 카멜 산이 있다는 것도.
물론 그렇다고 당장 다르센 왕국과 가멜다 왕국이 공조하여 이 문제를 처리할 수는 없다.
제아무리 큰 위기가 닥쳐왔다 해도, 손을 잡기엔 삼백 년 전쟁의 원한이 너무 컸으니까.
사울 역시 가멜다 왕국과 손잡는 건 기대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카멜 산이 우리와 가멜다 왕국의 오랜 원한 관계를 믿고 이 일을 시작한 것일지도 모르겠군.”
“우리 왕국과 가멜다 왕국이 절대 손을 잡지 않으리라는 믿음 말입니까?”
“그래.”
“필요하다면 우리와 가멜다 왕국이 손을 잡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사울은 아르멜의 말을 잘못 들었나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진심이야?”
“네, 전하.”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왕국 정보부는 왕국의 존립과 안정을 위해 존재합니다. 지금까지는 가멜다 왕국이 우리 왕국을 가장 크게 위협하는 적이었지만, 이젠 아닐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을 이성적으로 풀어 나갈 순 없는 법이다.
당장 사울 스스로가 그랬다.
가멜다 왕국의 원수들이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데 강적이 나타났다고 그들과 손을 잡는다?
지금은 그럴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물론 사울은 이런 본심을 입 밖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틀린 말은 아니겠지. 하지만 지금으로선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야.”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당연하지. 가멜다 왕국과 손을 잡는다고? 아바마마나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할 생각이지?”
삼백 년 전쟁 동안 쌓인 원한과 불신의 무게는 너무나도 크고 깊었다.
두 나라 모두를 위협하는 강적이 나타났다 해도 말이다.
하지만 아르멜도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상황이 따라 준다면 불가능한 건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도록 해.”
사울은 다시 광전사에 대한 화제로 돌아갔다.
확실히 광전사가 입힌 피해는 막대했다.
가장 큰 문제는, 적이 미리 병력을 준비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지금까지 드러난 바로는 광전사는 거의 다 지역 주민들인 것 같아. 즉 적의 병력을 추적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지. 킬리안이든, 혹은 카멜 산의 정예든 소수로 움직인다면 꼬리를 잡기 어려울 테니까.”
“그렇습니다. 또 적을 베어도 그건 적 숫자를 줄이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소중한 왕국민들을 죽이는 것이니 이래저래 손해를 보는 건 우리 왕국입니다.”
사울은 얼마 전 홉킨스 가문과의 전투를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결국 홉킨스 가문의 반란 역시 이 광전사를 시험하기 위함이었던 것 같아.”
사울의 말에 같은 자리에 있던 아이나가 움찔했다.
“시험이라고요?”
“전장에서 광전사가 가진 힘을 시험하고, 또 홉킨스 가문 영지의 주민들을 이용해 광전사를 어떻게 운용할 수 있을지 시험을 한 게 아닌가 해요. 아마 그대의 부친 역시 그들의 흉계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속아 넘어간 것일 테지요.”
“그자들이……!”
사울은 금방이라도 벌떡 일어날 듯한 아이나를 달랬다.
“진정해요. 모든 일은 확실해야 해요. 확실히 알고, 또 확실히 제거해야 해요.”
“…죄송합니다.”
“아무튼 지금의 광전사 사태는 그저 나타난 적을 물리치는 방식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어요. 광전사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모르겠지만, 주민들을 광전사로 만들 수 있다면 율렌 섬 전체를 광전사로 가득 채울 수 있을 테니까요.”
카스텔이 말했다.
“적들이 그렇게 할 능력이 있었다면, 이미 하고도 남았을 겁니다.”
사울도 동의했다.
“맞아요. 여기까지 와서 할 수 있는 일을 자제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저들에게 능력이 있었다면, 율렌 섬 전체를 광전사로 채워서 두 왕국을 순식간에 무너뜨리려 했을 거예요.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건, 무슨 이유에서든 그럴 능력이 없다는 뜻이겠지요. 아직 우리에게 기회가 있다는 뜻이고.”
아르멜이 말했다.
“기회와 시간이 많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지.”
“그러니 이 일이 끝난 후 다시 싸울 땐 싸우더라도, 지금은 가멜다 왕국과도 함께 움직였으면 좋겠습니다만.”
사울은 아르멜을 타박하진 않았다.
하지만 역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어려운 이야기야.”
“전 가능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진심이야?”
“그렇습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당장이라도 이 일을 시작해 볼 생각입니다.”
가멜다 왕국과 손을 잡는다.
말 그대로 적과의 동침이다.
이래저래 개인적으로 가멜다 왕국에 원한이 큰 사울로서는 더더욱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지금은 적과의 동침이 필요할지 모른다.
적도, 나도 다 죽고 잿더미만 남는다면 복수가 무슨 의미 있겠는가.
사울은 아르멜을 잘 알았다.
아무 근거 없이 저런 말을 할 사람은 아니다.
또 사울 스스로도, 루시아 누님도 믿는 인재이니 딴 맘을 품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지?”
사울의 질문에 아르멜은 생각을 정리한 후 대답했다.
“지금보다 상황을 악화시키진 않겠습니다.”
“그 이상은 보장할 수 없다는 말이군.”
“네, 전하.”
“일이 잘되면?”
“제한적으로나마 가멜다 왕국의 협조를 받거나, 서로 정보 교류라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것만으로도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되겠지요.”
내키지는 않지만, 지금으로선 좋은 방법일 수 있다.
지금 사태를 해결하지 못하면 복수고 뭐고 모조리 날아가 버릴 수 있다.
결국 사울은 결단을 내렸다.
“좋아. 대신 조건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누님께 이야기하고 협조를 받은 후 시작하도록 해.”
적국과 교류를 하거나 제한적으로나마 손을 잡는 일이다.
이런 일을 아르멜 개인적으로 진행하는 건 반역 행위이며, 아무리 사울이 왕자라 해도 혼자서 이 일을 받아들이고 또 허락하긴 힘들다.
사울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
루시아, 필요하다면 아바마마까지.
아르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사울의 뜻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좋아.”
아르멜의 계획을 허락한 사울은 다시 광전사 문제 해결에 고심했다.
지금으로선 가멜다 왕국과 손을 잡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이왕이면 그쪽의 도움이나 개입 없이 해결해야 한다.
그를 위해서는 일이 커지기 위해 적을 잡아야 한다.
나타난 광전사를 잡는 게 아니라, 광전사가 나타나기 전에 괴물을 만드는 놈들을 잡아야 한다.
사울은 율렌 섬 전체의 정세를 다시 살폈다.
섬 대부분의 영역은 국경을 맞댄 두 왕국이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그리고 중립 지대가 있다.
당장 전쟁이 벌어지고 있지는 않은 곳.
카멜 산과 대신전이라는 두 세력에 의해 아슬아슬한 균형이 유지되는 곳.
‘역시 열쇠는 중립 지대야.’
사울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사오니엘에게 한 가지 사실을 확인했다.
“너는 카멜 산에서 광전사는커녕, 그 비슷한 것도 본 적 없다고 했지?”
“그렇소. 이번 일이 터진 후 나도 수없이 생각해 봤지만… 이 광전사라는 존재는 내게도 낯설기만 하오.”
사오니엘은 카멜 산에서 꽤 높은 위치에 있었고, 왕국 첩자 노릇을 위해 이런저런 일들을 맡아 해 오며 수많은 정보를 접했다.
그런 사오니엘도 광전사에 대해서는 조금도 알지 못했다.
광전사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나기까지, 그를 제대로 예측한 사람도 없다.
사울마저도 과거 킬리안을 토벌했을 때 마주쳤던 정체불명의 적이 광전사와 관련되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을 정도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