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며칠 후.
사울은 과거에 한 번 만난 적 있던 아론과 재회했다.
“다시 뵙습니다, 전하.”
“오랜만이군. 그대의 아버지는 잘 지내는가?”
“네, 무탈하십니다.”
지난번에 만났을 땐 휴전 중이었지만, 지금은 전쟁 중이다.
서로 예의를 차려도 긴장감만은 숨길 수 없었다.
사울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광전사 사태에 대한 정보, 그리고 협의할 것이 있다고 들었다.”
“네, 전하.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아버님, 그리고 아버님의 동료들에게 전권을 받고 왔습니다.”
“그대가 여기에서 말하고 결정한 것에 모두들 따르겠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전하.”
말하자면 전권 사신이다.
물론 그 권한의 범위는 어디까지나 ‘반 안소니 백작파’ 귀족들에 한정되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작은 권한은 아니었다.
“알겠다. 나 역시 이 자리에서 결정된 약속은 꼭 지키겠다.”
“감사합니다.”
“우선 그대들이 알아낸 것에 대해 알고 싶군.”
“일단 이것을 읽어 보십시오.”
아론이 서신을 내밀었다.
안소니 백작과 그 일파에 대한 각종 정보들이었다.
안소니 백작과 그 일파가 가멜다 왕국에서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특히 카멜 산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가에 대한 내용들이었다.
서신을 다 읽은 사울이 냉정히 물었다.
“흥미로운 내용이군. 이 내용들을 증명할 증거는 있나?”
사울의 질문에 아론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어느 정도는 갖추었습니다.”
“이 정도의 일을 터뜨리려면 확실한 증거가 필요할 것인데?”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원을 부탁드리려 합니다.”
“무슨 지원 말인가?”
“분명 안소니 백작 쪽에서 중립 지대에서도 활동했을 겁니다. 그 부분을 파고들면 좀 더 확실한 증거를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마침 사울은 안소니 백작 쪽에서 중립 지대에서 활동한 것에 대해 알고 있었다.
“킬리안 비셔스가 중립 지대에서 활동했다는 증거라면 있다만.”
“그거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킬리안 비셔스와 안소니 백작 사이의 연결 고리는 아직 불명확하지 않나?”
“아버님과 다른 분들이 그 점을 규명하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립 지대에서 증거를 찾아낼 수만 있다면, 안소니 백작을 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닐 겁니다.”
그럴듯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사울은 저쪽의 계획에 끌려다닐 마음은 없었다.
“내가 돕는 만큼 그쪽에서도 우릴 도와야겠다.”
“무슨 도움을 원하십니까?”
“이번 사태에 관련된 정보라면 무엇이든. 혹은 가멜다 왕국이 그동안 중립 지대에서 벌인 활동에 대한 정보라도 괜찮다.”
“그건…….”
“네가 전권 사신이라고 하지 않았나. 나의 도움을 약속받으려면 그 정도의 대가는 치러야지?”
말을 꺼낸 사울 스스로도 쉽지 않은 요구임을 알고 있었다.
말하자면 적국과 붙어먹어 조국의 정보를 누설해 달라는 요구이니까.
이 사실이 드러나면 진상이 어떻든, 관련자들은 적국에 조국의 정보를 팔아 치운 세작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대단히 어려운 요구.
그렇기에 사울은 굳이 이런 요구를 했다.
이 정도의 요구까지 받아들여진다면 그만큼 저들을 믿고, 협조할 수 있다는 뜻일 테니까.
고민 끝에 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전하.”
“책임질 수 있나?”
“이왕 제게 주어진 권한이니, 모두를 설득해 보겠습니다.”
“좋다. 이번 일만 잘 풀리면 전면적인 협조도 충분히 가능할 테지.”
이렇게 사울은 가멜다 왕국의 일부 세력과 본격적인 협상을 해 나갔다.
아론이 몇 차례 사울과 만남을 가졌고, 이야기는 차근차근 진행되어 나갔다.
사울 또한 가멜다 왕국과의 교류를 아르멜에게 모두 맡기지 않고 스스로 이곳저곳을 살피는 등 많은 시간과 관심을 쏟았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마침내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그럼 당분간 그대들과 나는 협조하는 것으로 결정하겠다.”
“감사합니다, 전하.
아론과 사울 사이에 협약이 맺어졌다.
가멜다 왕국에서는 ‘반 안소니 백작파’가, 다르센 왕국에서는 사울이 주도하여 함께 광전사 문제를 해결하기로.
하지만 사태는 사울의 예상보다 더욱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협의를 마친 아론이 돌아가고 불과 몇 시간도 되지 않아, 다급한 보고가 전달되었다.
“전하, 큰일입니다!”
“무슨 일이지?”
“광전사의 습격입니다!”
광전사의 습격이 처음은 아니다.
그것만이라면, 이렇게 전령이 다급히 뛰어올 필요도 없었다.
“자세히 보고하라.”
“왕국 곳곳에서 광전사들이 아군을 습격했답니다. 그리고… 제르넬 요새가 광전사에게 함락되었답니다!”
“뭐라고?”
사울은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짧지 않은 시간 머물렀기에 제르넬 요새에 대해서는 잘 알았다.
책임자인 조나단이 열과 성을 다해 수비했고, 왕자가 지키는 군사 요충지라 적지 않은 지원도 받았다.
몇 번의 전투로 피해를 입긴 했지만, 그 이상의 지원을 받은 덕분에 요새 전력은 예전보다 더 강하면 강하지 약하진 않았다.
그런 제르넬 요새가 함락되다니.
“아군 피해는?”
“조나단 전하께서는 무사히 대피하셨답니다. 하지만 절반 이상의 병력을 잃었답니다.”
“다른 곳은?”
“광전사의 공격을 받은 곳은 어김없이 큰 피해를 입었답니다!”
전령은 자세한 보고를 올렸다.
자세히 들으니 더욱 기가 막혔다.
다섯 곳이 넘는 아군 요충지가 광전사의 공격을 받았고, 모두 패했다.
심지어 극소수의 생존자만 살아남고 전멸한 부대도 있었다.
이곳저곳을 합쳐 아군이 입은 병력 손실만 1만 명이 넘을 만큼 피해가 극심했다.
“그럼 나에게 내려진 명령은 없는가?”
“주둔지를 지키며 대비하고, 혹여나 적의 공격을 받으면 지역을 사수하는 것 보다 전하의 안전과 전력 보존을 우선시하라는 왕녀 전하의 명령입니다.”
“알았다. 물러가라.”
전령이 물러가고, 사울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또 저들이 우리보다 한발 앞서고 있군…….’
서두른다고 서둘렀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지금은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상황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경거망동했다간 목숨마저 위태로울 수 있다.
그렇잖아도 사울은 카멜 산에서 노리는 목표 중 하나일 테니까.
일단 사울은 경계 태세를 명령하고 대기했다.
움직이더라도 무언가 확실히 안 후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상치 못한 손님이 찾아왔다.
“그게 사실인가?”
“네, 전하. 세드 메로빙거 자작이 전하를 뵙길 청합니다.”
아들이자 외교 사절 노릇을 하던 아론이 아니라, 그 아버지인 세드가 사울을 찾아온 것이었다.
국경 책임자 중 한 명이라 결코 경거망동할 수 없는 위치였음에도 말이다.
일단 사울은 경계를 철저히 한 뒤 손님을 맞이했다.
세드는 자신을 따르는 백여 명의 무리와 함께 사울을 찾아왔고, 먼저 홀로 사울을 맞이했다.
“다시 뵙소, 전하.”
예를 표하는 세드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온몸이 피와 먼지로 더럽혀져 있고, 갑옷은 절반이 부서지거나 날아갔으며, 차고 있는 검은 검집만 남아 있었다.
전장에서 목숨만 간신히 건져 달아난 꼴이었다.
“어떻게 된 건가?”
사울의 질문에 세드는 공손히 대답했다.
“보는 그대로요. 전투에서 패하여 간신히 목숨만 건졌소.”
“광전사에게 당한건가?”
“광전사라… 그렇소. 버서커에게 당했소.”
“버서커?”
“‘광전사’를 만든 자들은 그 존재를 그렇게 부르더군.”
버서커.
비로소 사울도 광전사의 진짜 이름을 알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적들이 먼저 움직인 것 같소.”
“안소니 백작 말인가?”
“안소니 백작도 그렇고, 다른 자들도 그렇고. 왕국 곳곳에서 반 안소니 백작 세력이 체포되거나 공격을 받아 죽었다고 하오.”
“그대도 공격을 받았나?”
“그렇소. 피난에 성공한 내 동지들이 찾아와 사실을 알렸지만, 그 직후 버서커들이 우리 부대를 덮쳤소. 살아남은 건 우리가 전부요.”
다르센 왕국 이곳저곳이 버서커의 공격으로 쑥대밭이 되었듯, 가멜다 왕국에서도 심상찮은 움직임이 있다는 보고는 있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까지 엄중해지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더군다나 안소니 백작의 소행이라고 보기엔, 이상한 점도 있었다.
“안소니 백작은 대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이런 일을 벌인 것이지?”
‘반 안소니 백작’ 파벌을 소탕한 건 전시에 적국 왕자와 내통한 혐의 등을 뒤집어씌우면 큰 무리 없이 마무리 지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버서커를 이용해 자국 부대를 공격한 건 이야기가 다르다.
아무리 안소니 백작의 권력이 막강해도, 국왕의 명령도 없이 자국 국경 부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그 책임자를 죽이려 한 행위를 용서받을 수 있을까?
사울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고, 세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도 잘 모르겠소. 언젠가 안소니 백작이 보복을 시도할 건 예상했지만… 설마 이런 사태가 벌어질 줄은 몰랐소.”
사울은 당장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보다, 당장의 현실에 전념하기로 했다.
“그럼 지금 찾아온 게 ‘반 안소니 백작 파’의 생존자 전부인가?”
“내가 알기로는 그렇소. 몇몇 살아남은 동지들이 있을지 모르나, 왕국을 탈출하는 것도 쉽지 않을 거요.”
“그럼 그대들은 내 보호를 받고 싶은 건가?”
“그렇소. 허락하신다면.”
아르멜이 사울에게 조언을 했다.
“저들이 우리 왕국에 귀순을 한다면 받아들이지 못할 건 없습니다.”
아르멜의 말에 세드는 고개를 저었다.
“조국을 배신할 수는 없소.”
“그렇겠지. 하지만 적국의 인물을, 그것도 백 명 가까운 인원을 이유 없이 받아 줄 수는 없다. 망명이나 귀순이 아니라면.”
“…잠시만 시간을 주시면 안 되겠소?”
“며칠 정도라면 시간을 주지.”
“알겠소. 사흘 안으로 대답을 하리다.”
세드가 물러가고, 사울은 명령했다.
“저들을 잘 돌봐 주고, 또 엄중히 감시하도록.”
명령을 내린 사울은 고민하고, 또 일행들과 의논해 보았다.
나오는 결론은 하나였다.
“가멜다 왕국에 무언가 큰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아. 물론 아군 피해도 적지 않았지만… 아직 우리 왕국의 주요 인사가 적국이나 중립 지대로 탈출했다는 말은 없었으니. 가멜다 왕국에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 같아.”
“세드 자작과 그 일행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버리거나 제거할 게 아니라면 일단 우리가 데리고 있어야지. 저들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가멜다 왕국의 정보만 해도 엄청날 테니.”
“알겠습니다.”
세드 자작의 피난은 시작에 불과했다.
다음 날부터 사울은 빗발치는 전령들의 보고에 시달렸다.
“가멜다 왕국 쪽의 소식입니다!”
“전하! 가멜다 왕국의 정보원이 보낸 급보입니다!”
빗발치는 보고를 종합해 본 결과, 나오는 결론은 하나였다.
가멜다 왕국 전역이 ‘버서커’의 공격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
동시에 중립 지대 쪽의 망명객들도 점점 늘어갔다.
심지어 개중에는 예상치 못한 거물도 있었다.
“전하. 크, 큰일입니다!”
“무슨 일이지?”
“가르시아 남매가 소수의 병력과 함께 대신전을 찾았답니다!”
이건 사울도 예상치 못한 소식이었다.
가르시아 남매는 가멜다 왕국의 구국 영웅 아닌가.
그런 구국 영웅이 이 시기에 난데없이 대신전을 찾아왔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소식이 들어온 다음 날.
사울은 대신전에서 달려온 전령의 보고를 들었다.
“가르시아 남매가 날 만나고 싶어 한다고?”
“그렇습니다. 전하.”
가르시아 남매가 대신전에서 회담을 요청한 것이었다.
그것도 현재 사울의 신세를 지고 있는 세드 자작 등과 함께, 그리고 대신전 사람들까지 함께 말이다.
“알았다.”
사울은 대신전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