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가멜다 왕국 수도 카토리아의 함락.
처음에는 ‘함락설’이었지만, 오래잖아 기정사실이 되었다.
여기저기에서 카토리아와 그 주변 지역이 버서커의 공격으로 함락되었다는 정보가 쏟아진 결과였다.
나라 수도의 함락이 꼭 국가의 멸망을 의미하진 않는다.
하지만 수도가 함락되고, 국왕이 빠져나오지 못했다면 정말 국가가 멸망할 수도 있다.
가멜다 왕국은 건국 이래 최악의 위기를 맞이한 것이었다.
여느 때였다면 다르센 왕국에서는 이 틈을 노려 가멜다 왕국의 숨통을 끊으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겨를이 없었다.
다르센 왕국을 향해 버서커의 공격도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수도나 그 주변이 공격을 받진 않았지만, 중요한 지역이나 군사 거점들이 공격받고, 함락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결국 사울에게도 국왕의 특명이 전달되었다.
“이것이 아바마마의 명인가.”
“네, 전하.”
아바마마의 명령은 분명했다.
이 모든 사태의 원흉으로 지목된 카멜 산을 공격하여, 책임이 있는 모든 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것.
적국의 숨통을 끊는 것보다도, 이 일을 우선시하라는 명령이었다.
실제로 사울을 비롯한 여러 인재들이 이 일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다르센 왕국에서 가장 뛰어난 군인으로 꼽히는 드레이크 러셀 백작 같은 거물도 있었다.
말 그대로 국력을 총동원하여 이 ‘버서커 사태’를 해결하는 것을 우선하기로 하였다.
심지어 그를 위해 가르시아 남매와 공조하는 것 역시 허락받았다.
때맞춰 카멜 산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든 이종족이여. 지금이야 말로 인간의 압제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 움직일 때다…….’
사울은 중립 지대, 나아가 율렌 섬 곳곳에 뿌려진 격문을 읽어 보고는 혀를 찼다.
“대족장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군.”
율렌 섬의 모든 이종족에게 봉기를 촉구하는 격문은 세네카의 이름으로 작성되어 있었다.
세네카 스스로 허락하지 않고 이런 문서가 작성되고, 또 퍼져 나갈 리 없다.
나아가 카멜 산에서도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중립 지대에 위치한 모든 세력에 카멜 산을 따르라는 요구가 전달되었다.
물론 대신전에도.
“전하,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알았다. 참석하지.”
사울은 자리에서 일어나 대신전의 영빈관으로 향했다.
도착하니 모일 사람들은 거의 다 모여 있었다.
에스타, 아미스, 가르시아 남매까지.
사울도 그들과 함께 자리에 앉았고, 이내 손님도 도착했다.
“…….”
영빈관에 발을 들여놓은 건 카멜 산에서 보낸 사절이었다.
엘프, 드워프, 오크 등 여러 이종족으로 구성된 사절들은 사울과 가르시아 남매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물론 사울이나 가르시아 남매의 얼굴을 모를 수는 있다.
하지만 모른다기 보다는,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눈치였다.
사절들은 가볍게 예를 취한 뒤 에스타에게 말했다.
“대신관님, 대족장님께서는 하루빨리 답변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에스타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대들이 뿌린 격문은 읽어 보았습니다. 지금 그대들은 두 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하려는 게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저희들은 지난 수백 년의 압제를 끝내기 위해 혁명을 시작했습니다.”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 것입니까?”
“혁명에 동참하십시오. 그러면 대신전과 대신전에 속한 지역의 안위는 보장할 것이며, 나아가 혁명 후 이 율렌 섬에서 보다 원활한 활동까지도 보장하겠다고 대족장님께서는 약속하셨습니다.”
“동참하지 않는다면?”
“동참하지 않는 자는 적이며, 적에게 자비를 베풀 순 없다는 게 대족장님의 말씀이십니다.”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어떻게 대답할지 이미 합의가 끝났음에도, 에스타는 대답을 망설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대답하든, 대신전이 직접 전쟁에 개입하게 되는 상황이니까.
얼마 후.
마침내 에스타가 결심을 굳히고는 말했다.
“나는, 그리고 이 대신전은 더 이상 카멜 산과 함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카멜 산에 선전 포고를 한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그대들이 그렇게 받아들인다면 어쩔 수 없지요. 아무튼 우리 대신전은 더 이상 카멜 산과 함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들이 이 ‘혁명’이라는 이름의 만행을 그만두기 전까지는.”
에스타의 단호한 대답에 사절들은 시선을 돌렸다.
사울과 가르시아 남매 등을 본 사절들이 말했다.
“저들을 믿고 대족장님을 배신하는 겁니까.”
사울이 입을 열었다.
“말은 바로 해야지. 배신을 한 건 카멜 산이다. 두 나라의 분쟁에 개입하지 않는 대가로 이종족에게 평화와 자치권을 주었는데, 그것을 저버린 건 너희 아닌가?”
“당신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오.”
“아니, 나도 그리고 여기 가르시아 남매도 끼어들 자격이 있다. 너희들이 주도한 ‘버서커’ 공격으로 두 왕국 모두 큰 피해를 입고 있으니까.”
사절은 말없이 사울을 노려보다 다시 에스타에게 말했다.
“이 일을 후회하게 될 거요.”
그러자 베일이 맞받아 말했다.
“후회하게 될 건 네놈들이다. 그리고 빨리 꺼지지 않으면, 전장에서 죽는 게 아니라 이 자리에서 모조리 목을 베어 버리겠다.”
베일의 말이 단순 협박이 아님을 깨달은 사절들은 더 버티지 않았다.
사실상 대신전과 카멜 산 사이에 선전 포고가 오간 가운데, 카멜 산의 사절들은 물러갔다.
그리고 에스타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대신전도 참전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울이 에스타를 위로했다.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아미스도 입을 열었다.
“이왕 결정된 일이니 우리도 서둘러 움직여야 합니다. 다른 무엇보다 대신전에 속한 모든 마을의 경비와 관리를 강화해야 합니다. 제가 그 일을 맡겠습니다.”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
아미스는 사울과 가르시아 남매에게도 부탁했다.
“다른 것들은 크게 문제될 게 없을 겁니다. 문제는 군사적인 부분입니다. 이럴 때를 대비해 대책을 세워 두긴 했지만… 지금 대신전의 전력으로는 대신전 자체를 방위하기에도 버거운 게 사실입니다.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사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전이 약속을 지켰으니 우리도 힘껏 돕겠어요.”
“감사합니다.”
곧 모두들 회의실로 옮겨 회의를 시작했다.
사실상 대신전과 카멜 산이 서로 선전 포고를 주고받은 이상, 조만간 중립 지대도 전쟁터가 될 것이다.
우선 중요한 건 아군 세력을 최대한 확보하는 것이었다.
“아바마마께서도 중립 지대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계시니 가능한 도움을 아끼진 않을 거예요. 문제는 나라의 전력을 기울여 중립 지대를 돕기엔 녹록치 않다는 점이지요. 가멜다 왕국 수도가 버서커에게 함락당했다면, 우리 왕국도 똑같은 일을 당하지 말란 법이 없으니.”
카스텔이 사울에 이어 말했다.
“이전에 말씀드렸듯 ‘버서커’의 운용에는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맞아요. 그렇지 않았다면 왕국 사람들을 모조리 버서커로 만들어 두 나라 모두를 쓸어버렸겠지요. 하지만 지금 적들은 가멜다 왕국 쪽은 적극적으로 공격하고, 다르센 왕국 쪽은 신중히 공격하고 있어요. 즉 적들이 운용할 수 있는 전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뜻이지요.”
세드가 사울의 말을 이어받았다.
“옳은 말씀이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우리 왕국이 당한 피해는 너무나도 크오. 왕국 수도까지 함락당한 게 사실이라면 사실상 왕국에서 그들을 막을 사람은 없단 뜻이오.”
“가멜다 왕국 쪽을 수습하고 싶단 말인가?”
“그렇소. 가멜다 왕국이 완전히 멸망하는 것만은 막아야 하지 않겠소.”
가멜다 왕국의 멸망을 막는다.
확실히 지금은 그쪽으로도 고려를 할 필요가 있었다.
가멜다 왕국이 완전히 멸망하면 다르센 왕국의 힘만으로 이 사태를 처리해야 할 테니까.
“상황을 수습한다면, 어떻게?”
마리안이 말했다.
“우리 왕국의 수도가 버서커에게 함락당했다 해도, 폐하께서는 무사하실 수 있어요.”
“그렇겠지. 상황이 급박할수록 국왕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여겼을 테니.”
“폐하께서 살아남으셨다면 분명 폐하를 지키고 있는 세력이 있겠지요. 어떻게든 그런 사람들을 찾아내 합류할 수만 있다면 왕국의 멸망만은 막을 수 있겠지요.”
사울은 냉정히 물었다.
“이미 너희들의 국왕이 변을 당했다면?”
“그럼 후계자가 뒤를 잇겠지요. 설마 폐하와 모든 왕족들이 한 명도 남김없이 목숨을 잃진 않았을 테니.”
“그렇다면 국왕이나 그 후계자들을 찾는 걸 우선시할 건가?”
“그래요.”
세드나 가르시아 남매는 상황을 수습하겠다고 했지, 도와 달라고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들에게는 대신전과 사울의 도움이 필요했다.
적국과 손을 잡는 일이라 사울은 이 문제에 대해 아바마마와 누님에게 보고했고, 답변도 받았다.
지금 사울이 가진 전력과 정보를 가지고 가멜다 왕국을 돕는 건 허락하겠다는 답변이었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많아. 저들을 전적으로 도울 순 없겠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겠지.’
사울은 생각을 정리하고는 말했다.
“일단 정보 제공, 그리고 물자 지원 정도를 해 줄 순 있겠다.”
병력 지원은 불가하다는 말이다.
세드나 가르시아 남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사울의 뜻에 수긍했다.
“감사하오.”
이렇게 다르센 왕국, 대신전, 그리고 가멜다 왕국의 일부 세력까지 손을 잡았다.
당장의 주적인 카멜 산을 상대하기 위하여.
* * *
사울은 우선 병력과 함께 대신전을 떠났다.
대신전과 그에 속한 세력을 지키는 게 최우선 목표였다.
카멜 산에서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멜 산 역시 중립 지대의 민심을 신경 쓴 듯, 곧바로 대신전에 속한 마을 등을 공격해 오진 않았다.
그들의 공격은 두 왕국의 군대에게 집중되었다.
“전하, 3부대도 공격을 받았습니다!”
“버틸 수 있겠나?”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300명의 지원군을 보내겠다. 그 정도로 버텨 보도록.”
“알겠습니다!”
현재 카멜 산에 투입된 다르센 왕국 군은 약 5천 명.
중립 지대 기준으로는 적은 병력이 아니었지만, 지형을 잘 알고 또 이종족의 지원을 받는 카멜 산의 공격을 막아 내는 건 쉽지 않았다.
사울은 일단 적의 공격을 막아 내고 전선을 유지하는 데 신경을 쓰고, 그 이상은 욕심을 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나쁜 소식이 들어왔다.
“전하, 자국 쪽에서 버서커의 공격이 더 거세지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가멜다 왕국은?”
“수도를 포함한 절반 이상이 통제 불능이 되었다고 합니다.”
“알았다.”
중립 지대 밖에서는 ‘버서커’를 이용한 공격이 이어졌다.
들어오는 보고에 따르면 버서커가 된 자들을 베어도, 이후 또 다른 주민들이나 병사들이 버서커가 되는 현상이 이어지고 있었다.
역병처럼 버서커와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전염’되는 경우는 없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이지만, 그것만 믿기엔 상황이 심각했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나쁜 소식만 들어오진 않았다.
“전하, 보고드립니다!”
“무슨 일이지?”
“가멜다 왕국의 크리스티안 국왕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크리스티안 그레이엄.
가멜다 왕국의 국왕.
사울보다 몇 살 위의 젊은 인물이라고 들었다.
“국왕이 살아 있었나?”
“네, 호위 병력과 함께 왕국 남쪽으로 이동 중이랍니다!”
“남쪽이라면 중립 지대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뜻이로군.”
“아군 정보부에서도 그렇게 예측하고 있습니다.”
국왕이 적에게 쫓겨 자국 영토를 떠난다는 건 망국의 위기가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나라를 생각한다면 지금은 국왕이 자국 영토를 떠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국왕이 비명횡사한다면, 그 날이 가멜다 왕국 최후의 날이 될 수도 있으니까.
“가멜다 왕국 쪽에서는 별다른 연락이 없나?”
“지원을 부탁한다고 합니다.”
순간 사울은 어려운 처지에 빠진 크리스티안 국왕의 목을 베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이내 유혹을 떨쳐 냈다.
이미 가멜다 왕국은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다.
지금 다르센 왕국에, 또 사울 본인의 안위에 더 큰 위협이 되는 건 가멜다 왕국이 아니라 카멜 산이다.
스스로 살아남아야, 그리고 현재 자신의 나라인 다르센 왕국이 무사해야 그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
혹시 가멜다 왕국 국왕을 죽여야 한다 해도, 지금은 때가 아니다.
“우리 군대를 가멜다 왕국 영토로 보내긴 어렵지만, 중립 지대의 경계를 넘어온 이후로는 도울 수 있다고 전해라.”
“네, 전하!”
가르시아 남매는 말 할 것도 없고, 세드도 충분히 능력 있는 군인이다.
이 정도 도움만 제공하면 나머지는 알아서 할 것이다.
지원에 대한 결정을 내린 사울은 당면한 문제에 집중했다.
아직 중립 지대에 버서커의 공격은 없다.
그렇다면 버틸 수 있다.
버서커 문제는 다른 아군에게 맡기고, 전선을 유지하면서 가멜다 왕국 쪽의 움직임을 기다리는 게 최선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얼마 후.
마침내 기다리던 소식이 왔다.
“전하, 가멜다 왕국 국왕이 중립 지대에 들어왔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