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가멜다의 왕 크리스티안이 자신의 나라를 떠나 중립 지대에 발을 디뎠다.
그만큼 가멜다 왕국 상황이 심각하다는 뜻이었다.
만일 크리스티안의 신변에 이상이 생긴다면 왕국 멸망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컸다.
솔직히 사울은 크리스티안의 목을 베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지금 크리스티안의 목을 베면, 그 여파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가멜다 왕국은 그대로 멸망할지 모르나, 그 ‘잔당’들이 어마어마한 소요를 일으킬 것이다.
결국 지금은 가멜다 왕의 목을 벨 때가 아닌 듯했다.
실제로 루시아 누님도, 또 아바마마도 사울에게 당부했다.
‘지금은 가멜다 왕국 국왕을 죽일 때가 아니다. 그를 만날 기회가 있다면, 그를 죽일 게 아니라 지키도록 해라.’
“…내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군.”
사울은 명령을 내렸다.
“가멜다 왕을 도우러 간다.”
“알겠습니다!”
이럴 때를 대비해 미리 준비를 했기에 지체 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사울은 항상 함께인 일행들과 정예 병력을 이끌고 가멜다 왕을 맞이하러 갔다.
“가멜다 왕을 도우러 간다고?”
“오래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군.”
행군 도중 휴식을 취할 때마다 병사들이 수군거렸다.
불구덩이에 들어가라는 명령도 기꺼이 따를 충성스러운 정예병들에게도 ‘가멜다 왕 구원 작전’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어쨌든 구원 작전은 진행되었다.
사울이 이끄는 다르센 왕국군은 물론, 가르시아 남매가 이끄는 가멜다 왕국군도 가멜다 왕 구원에 나섰다.
이에 카멜 산에서도 가만있지 않았다.
“전방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가멜다 왕이 있는 곳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가멜다 왕은 수백의 병력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가멜다 왕국의 위세를 생각하면 초라한 규모였다.
그만큼 상황이 어렵고, 또 가능한 신속하고 은밀하게 움직이기 위해 소수의 병력을 꾸린 것이리라.
때문에 적습을 받은 가멜다 왕은 어려운 처지에 빠져 있었다.
적의 숫자부터 가멜다 왕국군보다 더 많았다.
또한 ‘놈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적들 중 버서커가 있는 것 같다고?”
“미친 듯이 날뛰는 빠르고 강력한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럼 버서커가 틀림없군.”
지금껏 중립 지대에서 버서커가 모습을 드러낸 적은 없다.
그런데 지금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그만큼 가멜다 왕을 꼭 잡거나 죽이겠다는 뜻 아니겠는가.
사울은 모두를 독려했다.
“아마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싸워야 하고, 가멜다 왕을 구해야 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적국을 위함이 아니라, 우리 다르센 왕국을 위한 일임을 기억하라!”
“네, 전하!”
가멜다 왕이 다르센 왕국군의 구원을 받는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가멜다 왕국이 다르센 왕국에 숙이고 들어가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사기충천한 다르센 왕국군은 다시 진군했다.
오래잖아 창칼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곧 전투가 벌어지는 광경이 보였다.
“전하, 저쪽입니다!”
“그렇군. 모두들 공격을 준비하라.”
아직 가멜다 왕국군은 무너지지 않았다.
하지만 카멜 산 쪽의 공격도 거셌다.
이대로 가다간 오래잖아 가멜다 왕국군이 무너질 게 분명했다.
“공격하라!”
사울의 명령에 다르센 왕국군이 전투에 끼어들었다.
건국 이래 처음으로 다르센 왕국군이 ‘가멜다 왕을 구하기 위한 전투’에 참여한 순간이었다.
“와아아아!”
함성과 함께 다르센 왕국군이 기세 좋게 적들에게 돌진했다.
적 선봉을 맡은 건 예상대로 버서커였다.
미친 짐승과 다를 바 없는 버서커는 적 지원군의 등장에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하지만 냉정하게 전략적으로 대처하지도 못했다.
다르센 왕국군이 끼어들었음에도, 버서커들은 계속 가멜다 왕국군을 집중 공격 했다.
다르센 왕국군이 코앞에 다가와도 신경 쓰지 않았고, 자신들을 직접 공격한 다음에야 반격을 했다.
양면 공격에 고스란히 노출된 버서커들은 빠르게 제압당했다.
반면에 이 순간만큼은 다르센 왕국군도 가멜다 왕국군도 서로에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가멜다 왕국 놈들은 공격하지 미라!”
“지금은 다르센 왕국군도 아군이다! 저 괴물들만 공격하라!”
연합군을 결성한 듯 손발이 잘 맞는 가운데, 실력자들도 크게 활약했다.
카스텔은 전장 한가운데 뛰어들어 버서커들을 도륙했고, 사울도 중군에서 아군을 돕거나 적들을 공격하며 지원에 나섰다.
거기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 무리의 지원군이 도착했다.
“전하, 가멜다 왕국 부대입니다!”
전장에서 한창 싸우고 있는 가멜다 왕국군과는 또 다른 부대.
이미 언질을 받은 사울은 상대 부대의 정체를 바로 알아보았다.
“가르시아 남매군.”
그 말대로였다.
가르시아 남매가 이끄는 일단의 부대는 그대로 적군의 중앙을 들이쳤다.
“모조리 쓸어버려라!”
베일은 부대의 맨 앞에서 손수 검을 휘두르며 적 중군에 뛰어들었다.
언뜻 보기에는 무모하기까지 한 행동이었다.
적 중군에는 적지 않은 병력이 있었고, 그것도 버서커 같은 통제가 어려운 자들이 아닌, 정예병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베일의 기세를 꺾진 못했다.
“모조리 죽여 주마!”
양손에 불꽃과 얼음이 휘감긴 검을 휘두르는 베일의 앞을 가로막는 자들은 모조리 불타거나 얼어붙거나, 검에 베여 쓰러졌다.
마리안 또한 대단한 활약을 보여 주었다.
그녀가 활시위를 당길 때마다 어김없이 한 명, 심지어 몇 명의 적이 화살에 맞고 쓰러졌다.
보통 궁수보다 몇 배나 빠른 속도로 활을 쏘면서, 심지어 한 번에 여러 발의 화살을 쏘는 데다 백발백중이었다.
가르시아 남매를 등에 업은 가멜다 지원군은 거칠 것 없이 적들을 처리했다.
선봉을 맡은 버서커도, 중군도 무너지자 카멜 산 군대도 더는 버티지 못했다.
“철수하라!”
결국 중군과 후군 쪽에서 철수 명령이 내려졌다.
사울도, 또 가르시아 남매도 물러가는 적들을 곱게 보내 줄 마음은 없었다.
“추격하라. 가능한 많은 적들을 베어야 한다.”
“네, 전하!”
추격이 이어지며 카멜 산 군은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그렇게 전투를 마무리 지은 사울은 뒤늦게 나타나 큰 활약을 펼친 가르시아 남매와 마주했다.
“전장에서 다시 보는군.”
사울의 말에 베일은 씩 웃었다.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소. 당신과 전장에서 만났는데, 적이 아니라니.”
“동감이다.”
당장은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아직 두 나라는 적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지금은 서로 싸울 때가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가멜다 왕국 소속 기사가 달려와 알렸다.
“가르시아 자작님,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알았다.”
베일도, 마리안도 국왕의 부름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사는 사울에게도 말했다.
“사울 왕자님이십니까?”
“그렇다.”
“폐하께서 사울 왕자님도 뵙길 원하십니다.”
가멜다 왕, 크리스티안이 사울을 부른 것이다.
“…….”
사울은 묘한 기분이었다.
전생 때는 가멜다 왕과 한 번 제대로 만나는 게 소원이었다.
하지만 먼발치에서 본 적이 있을 뿐, 제대로 왕과 만난 적은 없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가멜다 왕은 바뀌었고, 사울은 가멜다 왕국의 하급 장교가 아닌 다르센 의 왕자로 살아가고 있다.
그런 지금, 가멜다 왕이 사울을 만나고 싶어 하고 있다.
아바마마와 누님은 이런 상황을 예측한 듯 미리 언질을 주었다.
가멜다 왕이 만남을 청한다면, 상대가 호의적으로 나온다는 전제하에 응하라고 말이다.
“알았다.”
이렇게 사울은 가르시아 남매, 그리고 자신의 일행과 함께 가멜다 왕을 만나러 갔다.
* * *
가멜다의 왕 크리스티안 그레이엄은 천막에서 사울과 가르시아 남매를 기다리고 있었다.
넓게 펼쳐진 천막 안으로 들어가니 기사와 마법사들의 호위를 받는 한가운데 크리스티안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크리스티안을 본 사울의 첫 감상은 이랬다.
‘들은 대로 젊군.’
가멜다 왕이 젊다는 건 알고 있었다.
23세라던가.
실제로 본 크리스티안의 얼굴은 그보다도 젊어 보였다.
밝은 금발 머리에 티 한 점 없이 깨끗한 얼굴, 선한 눈매까지 외모는 흠잡을 데 없었다.
하지만 난세를 헤쳐나갈 국왕으로서는 다소 유약해 보이기도 했다.
“폐하를 뵙습니다.”
가르시아 남매가 크리스티안에게 한쪽 무릎을 꿇으며 신하로서 예를 표했다.
반면에 사울과 함께 온 카스텔, 아르멜, 아이나 등 다르센 왕국 사람들은 무릎을 꿇지 않았다.
적국 왕에게 지나치게 예의를 차리는 것도, 반대로 지나치게 무례한 것도 금물이었다.
사울은 크리스티안에게 작게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다르센 왕국의 사울 다리우스입니다.”
사울의 일행들도 무릎은 꿇지 않고, 대신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크리스티안은 의자에 앉은 채 자신의 신하와 신하가 아닌 자 모두에게 말했다.
“모두 반가워요. 또 내 목숨을 구해 준 것에 감사를 표해요.”
크리스티안은 먼저 가르시아 남매에게 말했다.
“그대들이 오늘 세운 공은 잊지 않겠어요.”
“임무를 다했을 뿐입니다.”
“내가 카토리아로 돌아가면 반드시 오늘 세운 공을 갚겠어요.”
크리스티안은 가르시아 남매의 공을 치하한 뒤, 잠시 물러갈 것을 명령했다.
적국 왕자가 한 천막에 있는데 먼저 나가라고 하는 건 받아들이기에 따라 기분 나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냉정한 마리안은 물론, 베일도 지체 없이 명령을 따랐다.
자국 내에서도 좌충우돌을 벌이는 것으로 유명한 가르시아 남매지만, 국왕에게는 충성을 다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가르시아 남매가 물러가고, 천막 안에는 크리스티안과 휘하 기사들, 그리고 사울과 그 일행만이 남았다.
“사울 왕자.”
“네, 폐하.”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난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정체불명의 괴물이 수도를 습격하여 쑥대밭으로 만들고, 내 왕국의 수도에서 쫓겨나야 했지요. 내 왕국의 영토에서 안전한 곳을 찾지 못해 중립 지대로 와야 했고, 중립 지대에서도 내 병사들의 도움뿐만이 아니라 적국 왕자의 도움까지 받아야 했지요. 어느 것이든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못 하던 일이에요.”
“저도 그렇습니다. 설마 이렇게 폐하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어느새 크리스티안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앳된 얼굴에 다소 유약해 보일지언정, 자신의 위치와 현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대의 아버지는 나에 대해 뭐라고 말하던가요?”
“폐하를 정중히 모시라 하셨습니다.”
“날 죽일 생각은 없는 건가요?”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카멜 산의 개입 없이 전쟁이 이어졌다면, 또 그런 가운데 제가 폐하를 만났다면 말이 아닌 검과 마법으로 대화를 하였을 것입니다.”
신랄한 사울의 말에 크리스티안 주변 기사들이 흠칫했다.
하지만 크리스티안 본인은 태연했다.
나이도 젊고, 유약해 보이지만 국왕으로서 포부는 있는 사람인 듯했다.
“맞아요. 나 역시 카멜 산의 개입이 아니었다면, 그대와 만나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목을 베라고 명령했겠지요.”
“그렇습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아바마마도 똑같이 생각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센 왕국을 멸망시키는 것보다 카멜 산과 그 우두머리인 대족장 세네카를 상대하는 걸 우선시하고 계십니다.”
“신기한 일이에요. 나와 그대의 나라가 이렇게 쉽게 통하게 되다니. 그만큼 지금 상황이 심각하다는 뜻이겠지요.”
“그렇습니다. 폐하.”
크리스타인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다 물었다.
“그대는 내가 어떻게 움직이기를 원하나요?”
“제가 의견을 이야기해도 되겠습니까?”
“지금은 누구의 의견이든 필요한 때이니까요.”
그 말에 사울은 거침없이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