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타임-14화 (14/223)

0014 / 0223 ----------------------------------------------

4. 반복

꿈속의 물건을 밖으로 가지고 나간다? 우스운 일이지만,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그야말로 혁명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당장 이 물약만 하더라도 값어치로 따지자면 얼마가 나갈지 상상하기가 어려웠으니까.

한결 몸이 편안해진 승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남색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을 열고 남색 문 밖으로 나가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새하얀 순백의 공간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그 많고 많은 문들이 다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아니, 전부는 아니었다. 단 하나, 보라색 문 하나가 남아있었다. 이미 승한이 열고 나왔던 남색 문은 문을 닫음과 동시에 사라져있었다.

“이게… 진짜 문인가?”

단 하나 남은 문.

승한은 보라색 문으로 다가갔다. 이 문이 4스테이지의 통과에 필요한 진짜 문이라면, 문을 여는 순간 꿈에서 깨어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승한은 또 다른 능력을 하나 얻게 되겠지.

‘무슨 능력일까?’

기대, 그리고 두려움.

반대라면 반대랄 수 있는 두 가지 감정이 승한의 가슴에서 들끓었다. 차라리 이 모든 게 꿈이라면, 아무 것도 아니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능력도, 괴물도, 아무 것도 없이. 평소처럼 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이미 그런 바람이 소용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괴물이 나타나고, 네 번째 꿈을 꾸게 된 순간부터 승한은 이 굴레가 멈추려면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어쩌면 멈추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멈추지 않는다면…….’

내가 멈추겠다.

승한은 보라색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앞서 문을 열었던 것처럼, 문을 앞으로 열어 젖혔다.

승한의 꿈은 거기까지였다.

**

[4스테이지를 통과하였습니다.]

[‘능력 - 광휘(光輝)’를 획득하였습니다.]

승한의 눈이 번쩍 떠졌다. 언제나와 같은 이른 아침이었는데, 창밖은 꽤 어두웠다. 폭우가 쏟아진다더니, 하늘이 시커먼 구름에 가려져 있었다.

눈을 뜬 승한은 그 자리에 누워 천장과 창밖을 바라봤다. 그의 머릿속에는 방금 전까지 꿈속에서 겪었던 일들이 하나씩 떠오르고 있었다.

‘광휘(光輝)라…….’

네 번째 능력, [광휘].

승한의 머릿속에는 이미 4스테이지를 통과하며 보상으로 얻은 능력이 입력되어 있었다. 그것이 어떤 능력인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까지도.

이전 세 번의 꿈은 이런 능력을 애써 무시했다. 꿈을 통해 능력을 얻는다는 게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미 한 번 괴물들을 만나고, 꿈을 통해 얻은 능력으로 괴물들을 쓰러뜨렸던 승한은 더 이상 이런 능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오히려 괴물들과 싸우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다.

“응?”

막 이불을 걷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승한은 손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느낌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화들짝 놀라며 이불을 걷고 일어났는데, 혹시나 하던 생각이 사실로 밝혀졌다.

“……미친.”

기다란 은빛 장검. 분명 꿈 속에서 타임 포인트를 지불하고 획득한 장비였다. 승한은 혹시 자신이 꿈에서 깨어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우리 집인데…….’

너무나도 익숙한 방 안이다. 어릴 때부터 승한이 살던 집, 승한의 방 그대로였다. 더군다나 승한은 분명 4스테이지를 통과하였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결국, 타임 포인트를 지불해서 얻은 장비가 현실에 나타났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승한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말이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매끈한 검신, 마지막에 쓰러뜨린 거대한 뱀을 베고 묻어있던 피는 한 방울도 없었다. 처음 타임 포인트를 지불하고 장검을 구입한 상태 그대로였다.

‘혹시 물약도?’

승한은 츄리닝 바지의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혹시 검뿐만 아니라 물약도 함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서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물약은 주머니에 없었다. 검도 검이지만, 이미 한 번 물약의 효능을 직접 몸으로 겪었던 승한은 주머니에 없는 물약의 존재가 아쉽게 느껴졌다.

‘어쩔 수 없지.’

아무래도 꿈속에서 사용한 아이템은 현실에 반영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장비는 부러지지 않는 한 소모품이 아니니 현실에까지 반영이 되고 말이다.

그래도 날카로운 검 한 자루는 꽤 도움이 될 것이다. 이전처럼 스컬레톤들의 뼈 몽둥이를 빼앗아 싸울 수 없을지도 모른다.

물론, 걸린다면 도검 소지죄로 잡혀가거나 벌금을 물 테지만… 어쩌겠는가? 당장 괴물들과 싸우려면 그럴듯한 무기 하나쯤은 필요한데 말이다.

승한은 일단 방문을 잠그고 창문을 닫았다. 혹시라도 가족들이 자신이 검을 들고 있는 걸 보거나, 창밖에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보여 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승한은 네 번째 능력, [광휘(光輝)]를 사용해보았다. 승한의 머리와 몸은 이미 어떻게 해야 능력을 사용할 수 있을지 이미 알고 있었다.

우우우우=.

손에 힘을 집중하고 힘을 발현하자, 승한의 손에서 작은 빛이 생겨났다. 세 번째 능력인 [강화]도 무색의 빛이 흐르긴 했지만, [광휘]는 좀 더 태양빛에 가까운 밝은 빛이었다.

[광휘]는 [강화]처럼 승한이 원하는 신체 일부 어디라도 사용할 수 있었다. 손이나 발, 몸 전체까지. [강화]처럼 많이 사용하면 힘에 부담이 컸지만, 사용 범위는 제한이 없었다.

승한의 왼 손에 맺혔던 [광휘]의 빛이 점차 옮겨져 승한이 들고 있는 검에까지 옮겨졌다.

꽤 밝은 빛이었지만, 눈이 부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승한은 이 힘이 가지는 힘을 보다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시간이 어떻게 되지?”

승한은 책상에 놓아둔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이른 아침, 시간은 7시 반이었다. 생각해 보니 이전 주말부터 언제나 같은 시간에 일어나곤 했다.

저번 주말, 세상이 멈추고 괴물들이 나타났던 시간이 대략 11시쯤이었다. 승한은 검을 침대 밑에 챙겨두고는 거실로 나갔다.

“승한이 일어났니?”

“누나? 웬일로 일찍 일어났네?”

“오늘따라 잠이 안 와서. 다시 자려고 했는데, 잠도 안 오더라.”

승한의 누나 승아는 이미 거실에 나와 있었다. 오래간만에 단잠을 자고 있는 어머니를 대신해 아침을 준비하고 있는지,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알바 나가기 전에 밥 먹고 가. 이 누나가 오랜만에 솜씨 좀 발휘했으니까.”

“솜씨는 무슨. 또 계란후라이에 김치찌개 아니야?”

“해 주는 걸 고맙게 여겨. 김치찌개 끓이는 게 어디 쉬운 줄 아냐? 먹기 싫음 말든가.”

항상 같은 메뉴를 만들어 내놓다 보니 승한은 이제 승아가 어떤 요리를 할지 훤히 보였다. 승아도 부정은 하지 않았다.

“오늘 알바 없어.”

“응? 왜? 짤렸어?”

“아니. 오늘 일 있다고 쉰다고 했어.”

“일? 오늘 아무 일도 없지 않아?”

“있어. 아주 중요한 일.”

승한에게는 바로 오늘,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 있었다. 가능하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말이다.

승한은 무슨 일이 있냐는 승아의 말에 얼버무려 대답했다. 승아도 승한이 별로 대답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는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학준이나 다른 애들은 어떻게 하지?’

승한은 가장 친한 친구인 학준을 비롯해 몇 명의 친구들을 떠올렸다.

가족들도 문제지만, 다른 친구들도 걱정이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신과 같은 능력이 없는 친구들이 만약 괴물을 마주친다면 위험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승한과 친한 몇 명의 친구들은 지난 번 스컬레톤들의 등장에 무사할 수 있었다. 주말인데다가 그리 늦지 않은 오전 시간대라서 집에 있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혹시라도 괴물들이 나타나는 시간대에 거리로 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위험할 수밖에 없다.

‘시간이 된다면…….’

승한은 스컬레톤이 등장했던 때를 떠올렸다.

세상이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 승한은 원래 있던 위치로 돌아왔다. 그렇다는 것은 즉, 시간이 멈춘 세상에서 승한이 어디로 이동하든 다시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 순간에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뜻이었다.

시간이 멈춘 세상에서 괴물들을 죽이면, 그 자리에서는 괴물들이 나타나지 않는다. 승한이 계단으로 스컬레톤들을 유인해 쓰러뜨린 자리에는 스컬레톤들의 무덤이 그대로 남아있기도 했다.

‘어차피 괴물들을 많이 쓰러뜨려야 타임 포인트를 획득할 수 있다. 가능한 거리로 나가 괴물들의 수를 최대한 줄여 놓아야 해.’

가족들인 승아나 어머니의 주위는 물론, 가능한 이 주위에 있는 친구들에게 위협이 될 만한 괴물들도 쓰러뜨릴 수 있을 만큼 쓰러뜨려야한다. 멀리 사는 친구들은 몰라도, 걸어서 갈 수 있을 만한 거리에 사는 친구들까지는 어떻게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승아가 보글보글 끓는 찌개를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벌써 식사 준비가 끝난 모양이었다.

“누나, 오늘 어디 나가?”

“응? 이따 점심에 약속 있긴 한데. 잠깐 카페 갔다가 쇼핑하기로 했지.”

“오늘은 그냥 집에 있어.”

“어, 왜? 무슨 일 있냐?”

“비도 오고, 당장 지난주에만 하더라도 괴물들이 나왔었잖아? 또 그 녀석들이 나타나면 어떻게 해?”

“에이, 설마. 또 나타나려고?”

“모르는 거지.”

“됐어. 그거 무서우면 어디 나가지도 못해. 일주일씩이나 안 타나났으면 더 안 나타나지 않을까?”

일주일 씩이나 나타나지 않은 게 아니라, 일주일에 걸쳐서 나타나는 것이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승한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승한의 생각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세 번의 꿈을 꿀 때마다 한 번씩 괴물들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실제로 괴물들은 승한이 꿈을 3스테이지까지 통과했을 때 처음 등장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어.’

안일하게 생각했다가 가족을 잃어버린다면 승한은 자신을 원망할 것 같았다. 아버지 없이 자란 가족인 만큼, 승한에게는 어머니나 누나인 승아나 더 없이 소중했다.

“그래도… 오늘은 나가지 마.”

“아니, 괜찮다니까?”

“누나!”

드르륵-.

결국 승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목소리가 커진 것과는 반대로 눈은 측은하게 가라앉았다.

“부탁해.”

“어, 어…….”

평소에는 큰 목소리를 내지 않던 승한이었다. 어릴 때부터 누나인 승아의 일이라면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돕고, 말도 잘 들었다.

밖에서는 어떤 성격일지는 몰라도 승아가 아는 승한은 자신의 말에 토 달지 않는 착한 동생이었다. 승한이 누나인 자신을 얼마나 아끼는지 승아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런 만큼, 승한이 승아에게 언성을 높이는 경우는 없었다. 정말로 승아가 잘못 된 일을 하려고 할 때나, 정말 많이 걱정이 될 때가 아니면 말이다.

“알았어. 안 나갈게.”

결국 승아가 입술을 삐죽이며 자리에 앉았다. 불만 가득한 표정이긴 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입 아프게 이야기 해 봤자 이럴 때 승한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는다.

승아는 식탁 한쪽에 놓아둔 자신의 핸드폰을 들어 친구에게 연락을 넣었다. ‘왜 못 나와?’라는 친구의 메신저에 ‘몰라, 동생이 나가지 말래.’라는 우스꽝스러운 답장을 그대로 보냈다. 물론 그 뒤에 짜증난다는 말을 덧붙이긴 했지만.

승한은 승아를 밖에 나가지 못하게 했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라도 승아가 어디 나가게 된다면 더 골치가 아파질 뻔했다. 승아는 한 번 놀러 나가면 안양인 집에서 서울까지 나가는 바람에 어떻게 구하러 갈 수도 없었다.

‘어머니야 늘 집에 계시니…….’

승한은 승아가 차려놓은 밥상에 수저를 들었다. 승아가 안방에서 자고 있는 어머니를 불렀지만, 모처럼의 주말에 늦잠을 자려는지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아침 식사를 하는 건 승한과 승아, 둘뿐이었다. 찌개와 몇 가지 밑반찬으로 든든하게 배를 채운 승한은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침대 밑에 있는 검을 꺼내, 창밖을 바라봤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1시가 가까워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