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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변화
‘그 시간 안에, 보스를 잡는다.’
추가적으로 안석환의 도움이 있다면 분명 도움은 될 것이다. 안석환은 평촌동쪽에 있는 보스를 잡았을 정도로 실력이 있는 헌터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의 도움을 무작정 기대할 수는 없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구디역에 있는 거대 거미가 남색 이하일 경우였다.
꺄아오-.
빠르게 날아간 주작은 금천구를 지나 구로구로 접어들었다. 그러던 중, 땅 아래에 움직이는 사람이 한 명 보였다.
“잠깐만요.”
승한이 손가락으로 땅 아래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자 윤재가 주작을 아래로 내려 보냈다. 땅 아래에 있는 헌터들 역시 주작을 발견했는지 움직임을 멈추고 주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 목소리가 닿을 만큼 주작이 아래로 내려갔다. 총 세 명의 헌터들 중, 한 명은 철제 갑옷을 입고 있는 헌터였는데, 아무래도 타임 포인트를 통해 여러 장비들을 구한 모양이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안양에서 올라오는 중입니다. 구로3동에 보스가 등장했고, 지원 요청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 구디역에 말입니까?”
세 사람은 화색을 띄우며 승한이 타고 있는 주작을 바라봤다.
“그렇지 않아도 저희도 그 쪽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금천구쪽을 맡으신 분들입니까?”
“네. 금천구 독산동을 담당한 전한솔이라고 합니다. 저도 구로동에서 지원이 들어왔다는 이야기에 가던 참입니다. 방향이 같으니, 태워 주실 수 있습니까?”
전한솔의 요청에 승한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모르니, 한 손이라도 많은 편이 좋을 테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전한솔이 화색을 띄우며 주작 위로 올라탔다. 그 역시 육체 능력을 강화한 헌터였는지 묵직한 갑옷의 무게를 무시하고 가볍게 뛰어올랐다.
쿵-.
그 때,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매우 작은 소리였지만 시간이 멈춰있어 사방이 조용한 가운데서는 아주 작은 소리도 들리기 마련이었다.
‘발소리?’
불길한 예감에 승한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이만한 발소리라면 그 덩치도 제법 클 터. 그리고 승한이 알기로 거미들 중 이만한 덩치의 거미는 거대 거미밖에는 없었다.
윤재 역시도 그 소리를 들은 듯, 곧장 주작을 쓰다듬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작이 높이 날아오르고,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날아갔다.
쐐애애액-.
윤재의 다급한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주작은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날았다. 조금 높게 날자, 승한과 윤재를 비롯한 사람들의 눈에 거대한 거미의 모습이 멀리 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은, 승한을 비롯한 모두에게 절망을 주기에 충분했다.
“……보라색?”
구디역에 있다고 하더니 그보다 조금 더 아래쪽까지 내려와 있었다. 아무래도 금천구에서 올라온 거미들과 구로구에 있는 거미들, 그리고 시흥쪽에서 흘러온 거미들까지 모두 먹어치운 모양이었다.
아직 거리가 멀어서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남색의 거대 거미보다 덩치가 훨씬 커보였다. 녀석에게서 느껴지는 존재감은 남색의 거대 거미와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
“보라색…….”
“우려한 대로군요.”
전한솔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역시 보스인 거대 거미에 대해서는 다른 헌터에게 이야기를 들은 듯, 거대 거미의 색을 확인하고는 침음을 삼켰다. 그러면서도 무기인 단창을 꺼내드는 것이 꽤나 용기는 있어보였다.
“그럼, 잘 부타…….”
그 순간, 이어지던 전한솔의 말이 중간에 끊어졌다. 세상이 어그러지고, 목소리와 함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왜 하필 지금!’
승한은 멀어지는 것처럼 일그러지는 보라색의 거대 거미를 보며 속으로 소리쳤다. 지금 당장이라도 보라색 거대 거미를 잡아야 하는데, 하필이면 딱 마주친 이 순간에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
쏴아아아-.
피부를 간질이는 바람에 정신이 번쩍 떠졌다.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바람이 볼을 간질이고,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가 귓가에 선명하게 들렸다.
승한은 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거미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가장 처음 거미들이 나타났을 때, 승한과 윤재, 주희가 있던 장소였다.
“형!”
승한이 윤재를 향해 소리쳤다. 윤재와 주희는 얼떨떨해 하더니 승한의 외침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어, 어?”
“어서요!”
승한이 윤재를 재촉했다. 윤재는 그게 무슨 뜻인지를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윤재가 능력을 사용해 주작을 불러냈다.
보라색 거미. 결국 승한이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여기저기서 몰려든 거미들을 먹어치우던 거대 거미가 보라색이 되어버린 것이다.
화악-.
승한은 윤재가 불러낸 주작 위로 올라탔다. 윤재와 주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의외로 불평을 늘어놓을 줄 알았던 주희가 순순히 따라왔다.
‘하필이면 그럴 때!’
승한은 보라색 거대 거미를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보라색 거미는 구로동에서 금천구 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승한이 기억하기로는 금천구의 독산동 쪽에는 대피소가 하나 있었다.
위치지 좋지 않았다. 어쩌면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 직후, 보라색 거미가 대피소를 급습할지도 모른다. 승한이 아는 거대 거미라면 절대로 군인들이 상대할 수 없었다.
‘마사일이라도 가져오지 않는 이상, 그 녀석은 못 막아.’
남색의 거대 거미만 하더라도 미사일이 아닌 이상 잡지 못할 수준이었다. 아니, 웬만한 수준의 미사일로는 거대 거미의 핵을 단숨에 부술 수 없을 것이다. 남색 거미의 회복력은 [광휘]가 없다면 온 몸이 갈갈이 찢어져도 회복이 가능할 정도이니 말이다.
남색의 거대 거미만 하더라도 그런데, 보라색은 어떨까? 승한은 보라색 거미를 마주했을 때의 느낌을 되새겼다.
‘그 녀석을 다른 헌터들이 막을 수 있을까?’
승한은 보라색 거미를 보는 순간, 그 녀석이야말로 모든 거미들의 근본임을 알 수 있었다. 애초에 검은색이고 빨간색이고 모든 거미들은 보라색 거미로부터 태어난 녀석이었다.
애초에 거대 거미의 색은 보라색이었다. 그 녀석이 흰색으로 나타난 이유는 다른 거미들을 낳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거미들을 알로 부화시키기 위해 힘을 쏟아냈던 녀석이 자식들을 먹어치워 원래의 힘을 되찾았다.
그리고 그 힘은 다른 헌터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잡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꽤나 큰 희생이 따를 것이다.
-김승한씨, 상황 보고 부탁드립니다.
그 때, 승한이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으로 강동훈 소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승한을 비롯한 헌터들에게는 꽤나 긴 시간이 흘렀지만 강동훈 소령에게는 이제 막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 터라 찰나와 같은 순간이었을 뿐이었다.
승한은 귀에 꽂고 있는 이어폰의 마이크를 돌려 입 앞으로 가져왔다.
“별로 좋지 않습니다.”
-좋지 않다니요?
“비산1동과 2동을 비롯한 안양동의 정리는 끝났습니다. 하지만 호계동을 맡은 차상민과 박향근, 이주호씨가 괴물들에게 죽고 그 지역을 저희 세 명이서 막아냈습니다.”
-세 분이 죽었단 말입니까?
강동훈 소령의 음성이 가라앉았다. 아무래도 헌터라는 귀중한 인력을 잃어버렸다는데서 꽤나 충격을 먹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다 막아냈다니 다행이군요.
“전부는 아닙니다.”
-남은 지역이 있습니까?
“안양은 아닙니다. 하지만 금천구 쪽에서 보스가 내려오고 있습니다.”
-보스가요? 다른 괴물들은요?
“없습니다. 보스 한 마리입니다. 하지만… 한 마리라고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 녀석은 다른 괴물들을 잡아먹고 훨씬 강해진 놈이니까요.”
-다른 괴물들을 잡아먹어요?
강동훈 소령은 승한의 말에 어떻게 된 일인지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차피 괴물들은 상식을 벗어난 녀석들이었다. 자기들끼리 잡아먹고 서서히 강해진다고 해도 별로 이상할 게 없었던 것이다.
-그럼 안양시 내에는 더 이상 괴물들이 남아있지 않은 겁니까?
“몇 마리쯤 남아 있다면 모를까, 적어도 안양시 내에 있는 헌터들은 맡은바 구역을 모두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저와 윤재 형, 이주희씨는 지금 금천구 대피소를 향해 가는 중입니다.”
그 때, 지원을 요청하려던 승한에게 강동훈 소령이 의외의 말을 전했다.
-그쪽은 이제 군인들에게 맡기십시오.
“네?”
-수고하셨습니다. 맡은바 지역의 수비와 호계동까지 지원을 가셨던 것까지 보상을 드리겠습니다. 이제 남은 괴물들은 저희 군대에게 맡기십시오.
아무래도 강동훈 소령은 아직까지 헌터들보다는 군대의 힘이 훨씬 크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여기서 헌터들이 더 나서 수당을 챙겨가는 것보다는 군대가 나서 괴물들을 잡는 게 금전적으로도 훨씬 싸게 먹힐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런 강동훈 소령의 생각은 당연했다. 사실상 정부가 헌터들의 가치를 높게 본 이유는 지금처럼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헌터들이 미리 괴물들을 잡아놓기 위함이었지 그들의 힘이 군대에 비해 특출하게 강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헌터들의 가치 여부는 시간이 멈춰 있을 때 그들만이 움직일 수 있다는 특수성 때문이지 그들의 전투력 여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까지 모르고 있었다. 이번 괴물들을 잡으며 헌터들이 얼마나 더 강해졌는지를. 당장 승한만큼은 아니더라도 윤재나 주희 역시도 이전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능력의 레벨이 상승해 있었고, 다른 헌터들 역시 장족읠 발전을 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강동훈 소령님! 지금 그 명령에 따른 인명 피해가 얼마나 될지 알고 계시는 겁니까?”
-헌터 분들이 수고해 주신 건 알지만, 지금부터는 군대가 나설 때입니다. 애초에 헌터 분들과의 계약은 시간이 멈춰 있을 때라는 특수한 상황을 전제로 했습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후부터 승한씨를 비롯한 헌터분들께서 일을 해 주신다고 해도 그에 따른 보상은 지급해 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승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해를 못 할 건 아니었다. 헌터들의 수는 많고, 예산은 정해져 있었으며, 헌터들이 활약을 할수록 예산은 깎여나갈 테니 말이다. 그리고 강동훈 소령을 앞세운 정부의 말처럼 헌터들이 진정으로 필요한 상황은 지금이 아니었다.
하지만…….
“보상은 됐습니다.”
-김승한씨?
“분명하게 말하겠습니다. 금천구 대피소에 대기한 군인들만으로는 괴물을 못 막습니다. 물론 금천구가 강동훈 소령이 맡은 구역은 아니겠지만… 헌터들의 도움을 받으라고 대피소에 전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미사일을 써야 할 겁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그건 조금 뒤에 알게 될 겁니다.”
어차피 보라색 거미는 곧 대피소를 들이닥칠 것이다. 그 때 가서 정부의 이런 말에 의해 헌터들이 움직임을 멈추게 되면, 대피소에서 발생할 인명과 재난적 피해는 엄청날 것이다.
시간이 멈춰 있을 때에는 거미들에 의해 사람이 죽든, 건물을 비롯한 물건이 부서지든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다시 시간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될 테니까.
하지만 지금부터는 아니었다. 헌터들이 투입되지 않아 생기는 인명적, 재난적 피해는 고스란히 정부를 비롯한 시민들이 떠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피해를 생각해 보면 헌터들의 존재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연락을 넣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대피소로 향하고 있는 보스의 정체와 전력을 파악한 후, 헌터들의 투입 여부를 신속히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강동훈 소령의 권한 안에서는 헌터들의 투입을 독단적으로 정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될 것이다.
‘골치 아프게 됐군.’
보라색 거미가 얼마나 강할지 알 수 없는 지금, 다른 헌터들의 개입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승한도 골치가 아플 수밖에 없었다. 여차하면 혼자서 보라색 거미를 잡을 수 없다고 판단될 경우, 군대에게 모든 걸 맡기고 도망칠 생각까지 할 필요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