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6 / 0223 ----------------------------------------------
11. 제안
그 때, 주희의 중얼거림에 승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승한이 보라색 거미를 잡고 얻은 타임 포인트가 9만이었는데, 고작 1만밖에 되지 않는다는 게 이상했다.
“왜 그렇게 적어?”
“아무래도 그 때 버프를 걸어준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가봐요. 승한 오빠와 윤재 오빠, 그리고 다른 군인들까지 해서 저를 제외하고 총 열 명에게 버프를 걸어줬거든요.”
“버프를 걸어준 사람의 수가 많을수록 획득하는 타임 포인트의 수치가 줄어드는 건가?”
“그런 것 같아요. 윤재 오빠 한 명에게 버프를 걸었을 때는 40퍼센트, 윤재 오빠와 승한 오빠 두 명에게 걸었을 때는 30퍼센트, 이런 식으로 점점 줄어들더라고요.”
“그래?”
아무래도 버프가 만능은 아닌 모양이었다. 10명에게까지 버프를 걸어줄 수 있고 한 사람에게서 10퍼센트의 타임 포인트를 얻어올 수 있다면, 총 100퍼센트의 타임 포인트를 획득하는 셈이었다.
“버프 계열의 능력을 걸어주면 해당 헌터가 획득하는 타임 포인트를 가져오는 거로군요.”
“네.”
“주희씨의 능력은 아무래도 다수의 헌터들과 함께 있을 때 효율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한 명에게 버프를 하거나 열 명에게 버프를 하거나 능력이 같다면, 가능한 많은 헌터들에게 버프를 걸어주는 게 효과적이니까요.”
안석환은 주희의 능력에 대해서 정확하게 파악했다. 타임 포인트의 배분에 대해서든, 능력의 효율을 극대화 시킨다는 점에서든, 그녀의 능력은 다수의 헌터들과 함께 있을 때 빛을 볼 수 있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도 지금은 윤재 오빠와 승한 오빠, 이렇게 둘과 팀을 이루고 있으니까 어쩔 수 없죠.”
“사실 제가 여러분을 보자고 한 이유가 그겁니다.”
“네?”
주희가 깜짝 놀라 묻자, 안석환은 다시금 승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야기가 잠깐 샜군요. 혹시 승한씨가 두 마리의 보스를 잡고 얻은 타임 포인트가 몇 점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꼭 말씀 드려야 합니까?”
“아뇨, 그럴 필요는 없죠.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제가 얻은 타임 포인트보다 훨씬 많은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승한씨는 능력의 레벨을 올리고, 훨씬 강해졌겠죠.”
어차피 안석환이 말하려던 건 승한이 몇 타임 포인트를 얻어서 얼마만큼 능력의 레벨을 올렸는가 하는 게 아니었다. 안석환이 말하고자 하는 건 승한이 다른 헌터들보다 몇 발씩 앞서갈 수 있었던 이유였다.
“승한씨가 얼마나 강한지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사실 제 실력이 꽤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제가 아는 헌터들 중에서는 제가 최고였거든요.”
“칭찬도 너무 과하면 좋지 않습니다. 이제 슬슬 본론을 말씀해 주시죠.”
“정부와는 다른, 헌터들만의 독자적인 단체를 만들 생각입니다.”
승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안석환은 본론을 꺼냈다. 무슨 말을 할까 싶었던 승한은 의외의 말이 나오자 표정을 찡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안석환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감투 하나 쓰실 생각 없으십니까?”
**
안석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다 식어버린 커피를 단숨에 들이키고는 돌아갔다. 승한과 윤재, 주희는 바쁘다며 돌아간 안석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몸에 힘이 빠져서 늘어졌다.
“헌터 연합이라…….”
승한은 안석환이 남기고 간 여운을 중얼거렸다. 갑작스럽게 너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더니 아직까지 머릿속에서 정리가 잘 되질 않았다.
“어쩔 거냐?”
“뭘요?”
“감투 하나 쓰라는데.”
윤재의 물음에 승한은 엄한 카페의 조명을 바라봤다. 예라고도, 아니라고도 대답할 수가 없었다.
“글쎄요……."
“아예 생각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네?”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요. 사실 감투 같은 거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감투도 감투 나름이죠. 책임과 의무는 따르는데 막상 좋을 거 하나 없는 그런 자리, 세상에 넘치고 넘치지 않았어요?”
“뭔가 뼈에 사무친 말 같다?”
“대학교 신입생 때 뭣 모르고 학생회에 들었었거든요. 학생회랍시고 할 일은 산더미처럼 많은데, 정작 학생회라는 감투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일만 죽어라 하고.”
대학교 새내기 때를 떠올리던 승한이 고개를 저었다. 다른 친구들은 대학교 생활을 만끽할 때, 학교의 이런저런 행사에 학생회라는 명목하에 끌려 다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럼 거절할 거냐?”
“아직… 생각을 좀 해 봐야죠. 명색이 헌터 연합이라고 만든다는데, 설마 대학교 학생회 같을까요?”
“그건 그렇겠지.”
아무리 그래도 한 단체였다. 더군다나 헌터 연합이란 단순히 안석환 혼자서 생각하고, 만들고 있는 단체가 아니었다.
서울과 경기 지역의 다른 헌터들, 6개 광역시를 비롯한 지방의 헌터들까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던 헌터들 모두가 동참한 거대한 연합이었다.
더군다나 안석환의 말대로라면 조만간 국외의 헌터들과도 연계를 할 모양인 듯했다. 괴물이 나타나는 건 국외도 마찬가지. 더군다나 그곳은 한국처럼 좁은 땅도 아닌 터라 괴물들에 의한 피해가 상당해서 오히려 헌터들의 입지가 한국보다 큰 편이었다.
“그나저나 다짜고짜 감투라니. 어떤 감투인지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고 쓸 건지 말 건지를 정하라니, 안석환도 일처리가 그리 깔끔하진 않네.”
감투라고는 하지만 안석환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 이름만 올리면 되는 거라고 하면서 실력만 있으면 상관없다는 식으로 얼버무렸다.
투명하지 않다. 승한이 감투를 쓰기 꺼려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어쩔 수 없죠. 당장 자리를 잡아가는 단계일 테니까. 안석환도 말 했잖아요? 당장은 유능한 헌터의 확보부터 진행하는 중이라고. 일단 연합과 단체라는 이름으로 헌터들을 모으는 것부터 진행 중이라고.”
“그래서 우리에게도 연합에 들어오라고 제안한 건가?”
“나쁘지 않아요. 개개인으로 흩어져 있으면 이미 단체를 이루고 있는 정부에게 휘둘리기 딱 좋으니까. 헌터들도 연합을 이루면 발언권도 덩달아 커지고, 더 체계적으로 움직일 수도 있을 거고요.”
승한은 안석환이 말한 헌터 연합을 나쁘게 보지 않았다. 당장은 안석환을 비롯한 몇몇 헌터들이 자신의 이득을 위해 만드는 것이겠지만 그로 인해 헌터라는 새로운 계층이 자리를 잡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다른 헌터들에게도 이로운 일이었다.
‘문제는 난데…….’
만약 안석환이 계획한 것처럼 제대로 된 헌터 연합이 만들어 진다면 그 규모는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당장 알려진 바로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헌터의 수는 삼천 명이 넘었다. 전 세계적으로 본다면 그 수는 훨씬 많았다.
무엇보다 현재 헌터라는 직업은 결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입지가 작은 직업이 아니었다. 당장 괴물들의 등장에 정부는 헌터들을 신경 쓸 수밖에 없었고, 도시를 괴물들로부터 막아낸다는 사실에 도시 내에 헌터들의 수가 많을수록 점점 시민들도 안심하는 눈치를 보이고 있었다.
“일단, 며칠 더 두고 보죠.”
“바로는 안 받으려고?”
“네. 일단 연합 자체는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감투 자체는 아직 보류하고요. 안석환도 아마 그 정도는 이해하겠죠.”
어쩌면 독이 든 사과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승한은 헌터 연합에 대한 생각을 잠시 집어넣었다.
아니,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승한에게 걸려온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띠리리리리-.
승한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번호를 확인했다. 모르는 번호였는데, 연락을 받을 곳이 있어서 승한은 곧장 전화 버튼을 눌렀다.
-김승한씨. 저 52향토보병사단 김현수 중령입니다. 지금 시간 되십니까?
**
괴물이 등장하는 매 주 일요일.
헌터들이 괴물을 사냥하고 난 후, 헌터들의 첫 번째 일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헌터라는 존재들이 서 있었다.
뉴스에서 주로 다루는 이야기 중 하나가 바로 헌터와 괴물에 관한 것이었다. 지금 세상은 다른 일에 관심을 주지 않는다. 괴물의 등장과 그 괴물의 등장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헌터들의 존재야말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키워드였다.
-현재 정부는 헌터들의 인력 분배에 대해 논의 중입니다. 또한 헌터들의 입지와 처지에 대한 논란도 끊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헌터 연합에 대한 이야기가…….
띠익-.
벽에 걸려 있던 큼지막한 대형 모니터가 꺼졌다. 뉴스에서 나오던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사라지자 넓고 텅 빈 사무실에 적막이 돌았다.
“헌터 연합이라… 어디서 이야기가 새 나간 거지?”
“어디서든 이야기가 새 나갈 구멍은 많지 않겠습니까? 직접 만나서든, 연락을 취해서든 포섭을 시도한 헌터가 벌써 오백이 넘는데 말이죠.”
“하여간 입이 싼 녀석들이 문제란 말이지.”
치익-.
푹신한 고급 의자에 앉아 값비싼 담배를 물고 있는 정장 차림의 남자는 담배 연기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가 내뱉었다. 그 앞에 서 있는 안석환은 자신도 역시 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피지 마.”
막 담뱃불을 입으로 가져가려던 때,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가 단호히 말했다. 한 번 담배 연기를 내뱉었던 그는 다시금 담배를 입에 물었다.
“난 나 말고 다른 놈들 담배 냄새는 싫거든.”
이기적인 말이었다. 자신은 괜찮지만, 다른 사람은 안 된다는. 하지만 그는 그런 자신의 말을 무척이나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말을 바로 면전에서 듣는 안석환 역시 그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손 안에서 부서뜨리며 그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아니라 회장님.”
“죄송합니다, 안 회장님.”
안석환의 인사에 안철환 회장이 인상을 찡그렸다. 입에 물고 있던 두 모금밖에 빨지 않은 담배를 잿덜이에 비비며 안철환이 물었다.
“내가 널 다시 부른 이유가 뭐라고 했지?”
“돈과 권력이 될 것 같아서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헌터이기 때문입니다.”
안석환은 안철환의 앞에서 기계처럼 대답했다. 입가에 있던 미소는 조용히 지워져 있었다. 표정의 변화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빨랐는데, 안철환은 그런 안석환을 경멸하듯 바라봤다.
“잘 알고 있군. 그런데 일을 이따위로 처리해?”
“죄송합니다, 회장님.”
“아직 날 아버지라고 부르려면 멀었다. 네놈이 제대로 된 성과를 가져올 때까지 아들은커녕, 우리 집안의 사람으로도 인정받지 못할 줄 알아라.”
아들에게 하는 말치고는 지나치게 차가운 말이었다. 하지만 한두 번 들어본 말이 아닌 듯, 안석환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헌터는 새로 떠오르는 핫 키워드다. 어느 기업이든 헌터를 신경 쓰지 않는 기업은 없어. 오죽하면 정부쪽에서 헌터를 빼돌려 기업의 보디가드로 사용하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지금 시대에서 헌터란 지역 단위의 안전을 책임지는 존재였다. 지역 내에서 보유한 헌터의 수에 따라서 부동산의 시세가 달라질 정도이니, 그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정부도 돈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지만, 금전적인 손익만을 추구하는 기업에게 헌터의 존재는 걸어다니는 황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을 잘만 이용할 수 있으면 그 어떤 사업보다도 더욱 많은 돈과 권력을 가져올 수 있었다.
그리고 안철환이 생각한 방법이 바로 안석환을 이용한 헌터 연합의 구축이었다.
“무엇보다 괴물의 사체가 돈이 될 줄 누가 알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