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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여섯번째 꿈
“배덕자들?”
흔히 배덕자는 배신자와 비슷한 의미이지만 저주받은 자들을 가리킬 때 쓰이곤 했다. 아무래도 나르샤와 자칼, 가렝과는 다른 길을 걷는 이들인 모양이었다.
‘그럼 저들도 마족인가?’
승한은 바짝 긴장했다.
수가 몇이나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자칼이나 가렝과 같은 수준의 마족이라면 결코 쉽게 볼 수 없었다. 지성을 가지고 있고, 적어도 좀비 거인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위험한 녀석들이었다.
“뭐 하냐! 얼른 뛰지 않고!”
“뭐?”
“싸울 셈이냐? 저 놈들 수가 몇인데! 일단 도망쳐라!”
자칼과 가렝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뛰어갔다. 승한은 다급히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뒤쪽으로 한 무리가 뒤따라 오는 게 느껴졌다.
‘대체 수가 몇이나 되는 거지?’
승한은 자칼과 가렝의 속도에 맞추어 뛰었다. 그 뒤를 따라붙는 한 무리의 마족들이 점차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자칼이 이를 악물며 뒤를 돌았다.
“안되겠군.”
자칼이 발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가렝 역시 손톱을 드러내며 뒤를 돌아섰다.
승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까부터 계속해서 가까워지는 적들을 힐끔힐끔 돌아보던 승한은 방금 전부터 차라리 싸우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척-.
빛이 없는 어둠 속이라 제대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새로운 마족들은 승한과 나르샤, 자칼과 가렝의 주위를 빙 둘러 포위했다. 어둠 속에서 그림자처럼 어둑하게 보이는 그들을 보며 자칼과 가렝은 이를 드러냈다.
“참 멀리도 오셨군요, 나르샤님.”
“이 목소리는…….”
나르샤가 깜짝 놀랐다.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목소리가 익히 아는 목소리였다.
“자르고 장로님까지 배덕의 무리에 합류하신 거요? 아니, 애초에 그들을 이끌고 있는 게 당신이었나?”
“자칼, 가렝. 둘 다 오래간만이구나. 설마하니 너희들이 나르샤님을 빼돌릴 줄은 몰랐어.”
“빼돌리다니! 너희들이 하려는 짓이 정녕 멀쩡한 짓이라고 생각하나? 종족을 희생시켜 양분을 아포피스에게 나누어주고 그 몸뚱이를 다른 무엇도 아닌 한낱 좀비로 만들다니! 그것이 장로라는 놈이 할 짓이냐!”
동굴이 쩌렁쩌렁 울릴 만큼 울분에 가득 찬 목소리였다. 자칼은 자르고라는 마족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이를 갈았다.
승한은 그의 말에서 지금까지 자신이 베어온 좀비 거인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같은 종족을 희생시켜 좀비로 만들었다고 하니, 아마도 좀비 거인들의 정체가 바로 그들일 것이다.
‘결국 종족 간의 분열인 건가?’
종족의 분열과 아포피스의 부활, 승한은 생각보다 규모가 큰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 거대한 뱀의 동굴이 단순한 동굴이 아닌, 곧 부활할 아포피스가 봉인된 것이라는 점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막지 못하면… 다 죽겠군.’
아직까지 아포피스가 뱀 모양의 이 동굴이라는 확신은 할 수 없지만 아포피스라면 보통 마족과는 차원이 다를 것이다.
“그래서, 저것들을 막으면 되는 건가?”
“……그래. 막아야지. 나르샤님이 다치지 않도록.”
승한은 검과 방패를 들어올렸다. 수가 정확히 몇이나 되는지 알 수 없지만, 예민해진 감각은 마족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대충이나마 알려주었다.
‘못 해도 삼십은 넘어.’
마족이 평균적으로 어느 정도 힘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승한이 알고 있는 마족은 자칼과 가렝뿐. 나르샤는 전투가 불가능한 마족인 듯했다.
승한은 대충 자칼이나 가렝과 같은 수준의 마족이 서른이라고 생각했다.
‘할 만한데.’
씨익, 미소가 지어졌다.
그 순간.
승한의 몸에서 환한 빛이 흘러나왔다.
화아아아악-!
승한의 몸에서 눈이 부술 만큼 환한 [광휘]의 빛이 흘러나왔다. 그 빛은 순식간에 어둠으로 깔려 있던 동굴 안을 환하게 밝혔다.
마족들의 모습이 하나 둘 나타났다. 붉은색 피부를 가진 그들은 승한이 내뿜는 빛을 보고 눈을 가렸다. 대부분 자칼이나 가렝과 비슷한 느낌의 마족들이었는데, 승한은 그 중 자칼과 대화를 나눈 자르고라는 마족을 발견하고는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마족 영감님.”
“이건…….”
턱에 긴 수염을 늘어뜨린 자르고는 승한이 뿜어낸 빛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것은 승한의 바로 옆에 있던 나르샤와 자칼, 가렝 역시 마찬가지였다.
“성화의 빛…….”
승한은 모여드는 시선들을 보며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단순히 몸에서 빛이 나서 본다고 하기에는 마족들과 나르샤의 반응이 이상했다.
‘성화의 빛이라고?’
승한은 단순히 능력 중 하나인 [광휘]를 사용했을 뿐이었다. 지금까지 [광휘]를 사용할 일이 없어서 사용하지 않았는데, 주변이 너무 어둡고 마족들의 수가 많아서 혹시라도 [광휘]를 사용하면 효과가 있을까 해서 꺼내든 능력이었다.
헌데 나르샤는 [광휘]를 ‘성화’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마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간이… 어떻게 성화의 빛을…….”
자르고가 입을 크게 벌리며 승한을 바라봤다. 마족들 중 나이가 가장 많아 얼굴에 주름이 진 그는 승한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다가 나르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르샤님, 대체 이 인간은 누구입니까!”
“그게 저도…….”
“어떻게 인간이 성화의 빛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 힘은 저희들조차도 금지가 된, 나르샤님만이 생에 단 한 번 피울 수 있는…….”
자르고는 말문이 막히는지 말을 잇던 중에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다시 승한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인간, 네 놈은 대체 무엇이냐?”
“……그렇게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뭐?”
“내가 하려는 일은 하나야. 나르샤님을 지키고, 나르샤님이 성화를 피울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영감을 비롯해 이 자리에 있는 배덕자들 모두를 베어야겠지.”
승한의 검에 [광휘]의 빛이 머물렀다. 그 힘에 마족들은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아무래도 마족이라는 존재들은 역시 괴물들과 마찬가지라 악(惡)에 근본을 두고 있는지 [광휘]의 힘에 약한 모습을 보였다.
“이 빛이 성화의 빛이라고 했나? 뭐, 자세한 건 나르샤님에게 물어보면 되겠고…….”
승한이 씩 웃으며 자르고를 향해 달려들었다.
“주둥이 그만 움직이고, 일단 덤벼!”
화아악-!
승한의 방패에 [수호신]의 문양이 떠올랐다. 압도적인 방어력과 [귀신]을 이용한 빠른 돌진을 통해 상대를 밀어버릴 속셈이었다.
승한이 사용한 [광휘]의 빛은 마족들의 몸을 조금씩이지만 묶어두는 효과를 발휘했다. 그들에게는 ‘성화’라 불리는 신비하고 성스러운 힘의 빛이지만, 어디까지나 마족들은 악(惡)에 근원을 두고 있는 종족. 승한의 [광휘]는 바로 그런 존재들에게 더 큰 힘을 발휘하는 힘이었다.
“흩어져라!”
파바밧-.
자르고를 중심으로 뭉쳐 있던 마족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수가 대충 서른 명 정도였는데, 승한은 그 중 자르고를 쫒았다.
우두머리를 먼저 잡아야 한다! 딱 봐도 마족들을 통솔하고 있는 존재는 자르고였다. 승한은 그를 먼저 베어버릴 수 있다면 다른 마족들을 상대하기가 한결 수월해 질 것이라 판단했다.
“내가 만만해 보인 것이냐?”
스윽-.
자르고는 다른 마족들을 제치고 자신을 쫒아온 승한을 향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손을 뻗었다. 순식간에 승한의 검과 자르고의 단단한 손과 손톱이 부딪히며 불을 튀었다.
쩌엉-!
피잇-.
자르고의 손이 길게 베어지며 핏물을 튀었다. 자르고와 승한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자르고는 승한의 검이 생각보다 훨씬 강한 힘을 머금고 있어서, 그리고 승한은 자르고의 손이 생각 이상으로 훨씬 단단해서 놀랐다.
‘베어지지 않았어?’
승한은 [광휘]는 물론, [강화]까지 모든 힘을 끌어낸 상태였다. 살이 아니라 바위라도 깔끔하게 베어버릴 자신이 있었는데, 예상치 못하게 자르고의 손을 베어내지 못한 것이다.
어지간히도 단단했다. 파란 거미도 단단하긴 단단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자르고는 반쯤 베어진 손에서 흐르는 피를 막으로 뒤로 물러났다.
“죽여라-!”
자르고는 승한에게 바로 덤벼들지 않고 밑에 있는 마족들을 부렸다. 마족들은 승한과 자칼, 가렝을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우두머리는 숨겠다, 이거지?”
승한은 마족들 뒤로 숨어드는 자르고를 보며 눈을 빛냈다. 그렇다고 그를 잡겠다고 달려들지는 않았다. 가능한 나르샤를 보호할 수 있게끔 거리를 유지했다.
콰앙-.
“크악!”
승한이 달려드는 마족을 향해 방패를 들이받았다. 승한의 힘에 마족 한 명이 뒤로 밀려나고, 승한은 곧장 검을 들고 몸을 회전시켜 주위를 덮쳐오는 마족들을 베어갔다.
서걱-.
피이이잇-.
승한의 검이 마족 한 명의 몸을 길게 베어냈다. 원래는 그대로 허리를 양단해 버릴 생각이었는데, 전부 베어내지 못하고 큰 상처를 입히는데서 그쳤다.
마족들의 피부는 단단했다. 승한의 검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은 강도를 자랑했고, [강화]의 레벨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아져 있었다. 승한은 설사 바위라 하더라도 두부처럼 자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마족들의 피부는 바위보다 단단했다. 그들의 손과 손톱은 바위가 아닌, 강철과도 견줄 만한 것이었다.
‘어지간히도 단단하네.’
승한은 [강화]의 레벨을 좀 더 높여야 하는 건가 고민했다. 지금껏 괴물들을 베는데 큰 무리가 없어서 [강화]의 레벨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마족들을 상대하면서 처음으로 [강화]의 레벨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승한이 마족들에게 밀린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마족들의 피부가 아무리 단단하다고 한들, [수호신]을 두른 승한에 비하면 무른 편이었다. 더군다나 힘과 민첩함에서도 승한이 훨씬 우세했고, 무엇보다 승한에게는 [광휘]의 힘이 있었다.
마족들은 승한이 두르고 있는 [광휘]의 힘을 두려워했다. 괴물들처럼 그 힘을 거부했고, 그 힘에 닿으면 조금이지만 힘을 잃었다. 승한의 검에 [강화]와 함께 빛나고 있는 [광휘]의 힘은 마족들의 몸속에 스며들어 그들을 괴롭혔다.
‘자칼이나 가렝보다는 약한데?’
예상외로 단단해서 놀라긴 했지만 마족들의 수준은 전체적으로 자칼이나 가렝보다는 떨어지는 편이었다. 물론 확연한 차이까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움직임에서 차이가 꽤 많이 났다.
힘이나 움직이는 속도는 비슷했다. 하지만 자칼과 가렝은 싸우는데 필요한 전문적인 무술 같은 것을 익히고 있었다. 반면 다른 마족들은 대부분 본연의 육체만을 믿고 본능에 의지해 싸웠다.
[귀신]을 이용한 승한의 움직임은 마족들의 눈을 현란하게 속이며 움직였다. 간혹 마족들의 손이 승한에게 닿았지만 승한의 피부에 작은 생채기 이상을 내지 못했고, 승한은 곧장 팔을 뿌리쳐 마족들을 떨쳐냈다.
수십 명의 마족들이 달라붙어도 승한 한 명을 어쩌지 못했다. 오히려 승한의 검에 중상을 입고 바닥에 쓰러지는 마족들이 하나 둘 늘어났다.
“크아아아!”
그 때, 뒤쪽에서 자르고가 나르샤를 향해 달려들었다. 자칼과 가렝은 몇 명의 마족들을 상대로 분투하고 있었는데, 그 탓에 나르샤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딜!”
승한의 몸이 그림자처럼 녹아들듯이 사라졌다. [귀신]은 단순히 허공을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었다. 능력의 이름처럼 말 그대로 몸을 귀신처럼 움직일 수 있었다.
마족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승한의 몸이 사라지고, 나르샤의 옆에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