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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나르샤
“무, 무슨 소리를……!”
“지는 놈이 다 잃는다. 난 도박은 싫어하는데, 이 말이 그렇게 좋더라.”
화르르르륵-.
승한의 성화와 베에모의 마화가 섞여 요동쳤다. 승한의 손에서 마화와 성화가 섞이며 일어나는 열기가 전해졌지만, 눈살을 조금 찌푸릴 뿐이었다.
“어디 한 번 해 보자고, 도박.”
**
화르르륵-.
구구구구-.
성화와 마화가 섞여가던 중에는 승한과 베에모 둘 모두 어떠한 움직임도 취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잘못 움직였다가는 그대로 열기에 온 몸이 녹아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화끈한데.’
승한은 손에서 느껴지는 열기의 고통에 점차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베에모 역시 고통에 소리를 지르다 어느 순간부터는 고통에 익숙해졌는지 그저 마화의 힘을 이끌어 내고 있을 뿐이었다.
성화와 마화는 치열하게 싸웠다. 승한의 이마에는 물론, 온 몸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었다. 성화의 힘을 이렇게까지 오래 사용해 본 적은 처음이었다.
성화는 마화를 집어삼키고, 마화는 성화에게 정화되지 않기 위해 싸웠다. 어느 순간 마화는 성화를 자신과 같이 검게 물들이려고 들이닥쳤다. 그럴 때마다 승한은 성화의 힘을 더욱 이끌어내 마화의 힘을 정화시키고자 애썼다.
두 힘은 서로 상극이었다. 성화가 마화의 힘에 반대되는 상극의 힘이듯, 마화 역시 성화의 힘에 반대되는 상극의 힘이었다. 성화를 오염시킨 힘은 결코 성화에 뒤지지 않는 어두운 힘이었다.
“힘들어 보이는군.”
평온을 찾은 베에모가 승한을 향해 이죽거리며 입을 열었다. 승한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린 채 베에모와 눈을 마주했다.
“이제 주둥이가 좀 움직이냐?”
“큭큭. 허세 떨기는. 점점 네놈 성화가 약해지고 있지 않으냐?”
베이모의 말처럼 승한의 성화는 점점 색이 붉어지고, 크기가 약해지고 있었다. 성화는 본래의 힘에 가까울수록 황금색에 가까웠는데, 붉은색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은 힘이 점차 약해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처음엔 조금 당황했지만 아직 네놈은 성화의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 잘 봐라. 내 성화가 네놈의 성화를 점차 갉아먹고…….”
베이모는 이죽거리며 웃더니 갑작스럽게 표정을 굳혔다. 승한의 표정이 전혀 변화가 없었고, 당연히 승한의 성화를 집어 삼키리라 생각했던 자신의 마화가 아무런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왜…….”
“야.”
승한이 씩 미소를 지었다.
“잘 먹을게.”
그 순간, 승한의 성화가 크게 일어났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꺼져가는 불같던 성화의 색이 황금색으로 빛나면서 크기가 몇 배로 불어났다.
승한의 성화가 베에모의 마화를 집어삼켰다. 아니, 정확히는 마화의 힘에 담겨져 있던 불순한 기운을 정화시켰다고 보는 게 더 정확했다. 그로 인해 승한의 성화는 베에모가 가지고 있던 마화의 힘을 본래의 성화로 만들어내고 그 힘을 점차 흡수해 나갔다.
“히, 힘이…….”
베에모는 황급히 손을 저어 승한을 떨쳐내려 했다. 하지만 이미 베에모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마화의 힘은 승한의 힘과 교감하여 조금씩 빠져 나가고 있었다.
승한은 베에모의 마화를 정화하고 그 힘을 흡수할수록 자신의 힘도 덩달아 회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니, 힘을 회복하는 게 아니었다.
힘이 더 늘어나고 있었다. 텅 비어있던 힘이 조금씩 차오르면서, 그 힘의 한계도 덩달아 늘어났다.
‘혹시 그 때처럼……?’
승한은 6스테이지에서 성화의 힘이 처음으로 손에 닿았을 때, [광휘]의 레벨이 올랐던 때를 떠올렸다. 지금도 그 때와 닮았다면 닮았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라 같은 현상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순간 들었다.
[광휘]의 레벨 하나는 5만 타임 포인트 정도였지만 성화는 무려 50만 타임 포인트가 넘었다. 그나마도 원래대로라면 다른 헌터들의 경우에는 100만이 넘는 타임 포인트가 필요했다.
만약 이번에도 같은 과정을 겪으며 능력의 레벨이 오른다면 50만이 훌쩍 넘는 타임 포인트를 얻는 셈이었다. 아니, 그 이상으로 레벨을 점점 올릴 경우 더더욱 많은 타임 포인트를 이득볼 수 있을 것이다.
‘……아닌가 보군.’
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베에모가 가지고 있는 마화의 힘은 승한의 성화에 정화되면서 승한의 힘이 되어 흡수되었지만, 이전처럼 능력의 레벨이 오른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베에모가 가진 마화의 힘은 격렬히 저항했다. 아니, 정확히는 마화가 가지고 있는 힘 중 성화를 더럽혔던 마(魔)의 기운이 성화의 힘에 저항했다고 보는 게 더욱 정확할 것이다. 성화의 힘이 정화되어 사라지지 않게 말이다.
하지만 그 힘은 결국 승한의 힘에 먹히고 말았다. 그 이유는 승한이 가진 [증폭]의 힘과, [올림포스]의 힘 때문이었다.
‘별걸 다 누를 수 있단 말이지.’
구구구구-.
승한이 가진 능력 [올림포스]는 단순히 사물만을 찍어 누르는 힘이 아니었다. 절대적인 방어력과 무언가를 찍어 누르는 힘에는 형태를 가지지 않은 힘조차도 벗어날 수 없었다.
[올림포스]는 성화 속에 숨어있는 마(魔)의 능력마저도 찍어 눌러 그 힘이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게 만들었다. 원래라면 승한이 가지고 있는 성화의 힘은 베에모가 가진 마화의 힘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증폭]을 이용해 성화의 불길과 힘을 더욱 크게 만들고, [올림포스]로 마화 속에 있는 마의 기운을 찍어 눌러 성화와 더욱 비슷하게 만드니 승한이 가진 성화는 마화의 기운을 잠식해 나갈 수 있었다.
“이, 이럴 리가!”
“뭐, 원래라면 네가 이겼을 싸움이긴 한데 말이야.”
꾸구구국-.
승한의 손이 베에모의 손을 아래로 눌렀다. 베에모의 손이 아래로 스르륵 내려가 얼굴을 훤히 드러냈다.
“내가 가진 능력은 성화 하나뿐이 아니라서 말이야.”
“대체 그 힘은 뭐냐!”
베에모도 느끼고 있었다. 이미 진작부터 말이다.
승한이 가진 어떤 힘이 마족들을 찍어 누르고, [백검]으로 대부분의 마족들을 쓸어버렸을 때부터 승한이 심상치 않은 힘을 사용한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 힘을 크게 신경쓰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래봤자 어차피 자신이 가진 마화의 힘이 승한을 불태울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마족인 그에게 있어서 가장 두려운 힘은 성화였지 그밖에 다른 힘은 안중에도 없었다.
하지만 이게 대체 뭐란 말인가?
승한이 가진 어떤 힘이 성화 속에 있는 악마의 기운을 찍어 눌러버렸다. 그 힘은 애초에 베에모가 성화를 제어할 수 있었던 근간이어서 그 힘이 눌러진 이상 성화의 주도권은 승한에게로 넘어갔다.
결국 베에모는 눈을 뻔히 뜨고 성화의 힘을 승한에게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자존심 강한 마족인 베에모에게 있어서 두 번 다시없을 굴욕이었다. 베에모가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고, 신이자 부모라고 생각했던 이가 주었던 힘을 빼앗겼으니 말이다.
“서, 성화가…….”
“고맙다, 아주.”
탁-.
콰앙-!
승한은 멍하니 있던 베에모의 머리로 손을 올려 그대로 땅 아래로 머리를 처박았다. 콘크리트 바닥 아래가 금이 가벼 부서지고, 베에모의 머리가 그 아래로 들어갔다.
화륵-.
베에모의 머리를 잡고 있던 승한의 손에 성화의 불이 타올랐다. 이전과 큰 차이는 없었지만, 조금이나마 황금색에 가까워진 성화를 보며 승한은 미소를 지었다.
‘레벨은 오르지 않았지만… 분명 성화는 강해졌다.’
성화(聖火)라는 힘은 애초에 승한이 6스테이지를 진행하면서 성화를 각성하면서 보았던 붉은 천사가 가지고 있던 힘이었다. 그녀는 아포피스를 봉인하면서 성화의 조각을 떼어 그를 봉인하는 매개체로 사용했다.
성화의 힘은 너무나도 거대했지만, 붉은 천사는 자신의 힘을 작고 작은 여러 조각으로 나눌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 조각 중 하나가 바로 아포피스를 봉인하고 있는 조각이었고, 또 다른 조각 중 하나가 바로 나르샤라는 마족이 가지고 있는 성화의 힘이었다.
또 다른 악마는 그 성화의 조각을 일부 떼어내어 자신의 힘을 섞어냈다. 하지만 승한은 그 힘을 자신의 성화로 정화시켰다. 애초에 승한이 가지고 있는 성화의 힘이 베에모가 가지고 있던 성화의 조각보다 더욱 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베에모가 가지고 있던 성화의 조각을 흡수한 지금, 승한이 가지고 있던 성화의 조각은 더욱 크기를 키울 수 있었다. 아마도 베에모가 가지고 있던 성화의 조각이 조금만 더 컸다면 이전과 같이 성화의 레벨이 올랐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럼 결국 아포피스를 봉인하고 있던 성화의 조각이 작아졌다는 소린가?’
베에모가 가지고 있던 성화의 조각이 진짜라는 것을 확인한 승한은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비록 모든 조각을 떼어낸 것이 아니라 일부일 뿐이라 해도 그 일부를 떼어냈다는 게 문제였다. 그렇다는 것은 언제가 성화의 조각을 전부 마화로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것 아닌가?
‘붉은 천사가 통곡할 일이군.’
하지만 승한은 오히려 반가웠다.
붉은 천사가 자신의 힘이 마에 물드는 것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지는 몰라도 승한에게 있어서 마화는 좋은 먹잇감일 뿐이었다. 그 힘을 자신의 성화로 정화시켜 그 조각을 지금처럼 집어 삼키면 성화의 힘을 더욱 키울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반대로 생각해 승한의 성화보다 더욱 큰 마화를 만나게 될 경우, 승한의 성화는 그대로 마화에게 흡수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승한이 가지고 있던 성화라는 능력은 그대로 먼지처럼 사라지게 되겠지.
하지만 그럴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포피스가 가지고 있는 성화의 조각이 얼마나 클지는 몰라도 승한이 가지고 있는 성화의 조각은 결코 작지 않았다. 어쩌면 붉은 천사가 가지고 있는 성화를 제외하고는 가장 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자, 그럼 잘 가라.”
“끄아아아아아-----!”
승한의 손에서 뿜어진 성화의 힘이 황금색으로 번쩍였다. 베에모의 머리에 성화의 불이 피어오르며, 다섯 개였던 뿔이 다시 한 개로 변했다. 애초에 그가 가지고 있던 마화의 힘이 사라지며 원래의 모습으로 변한 것이다.
그래도 최종 보스라는 걸까? 베에모는 잠시 동안 승한을 향해 손을 휘두르며 목숨을 부지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손을 떨어뜨리면서 함께 몸을 쓰러졌다.
[375000타임 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어마어마한 타임 포인트를 획득한 승한의 입가에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석수에서 만난 외뿔 마족이 주었던 125000타임 포인트의 무려 3배나 되는 수치였다. 아무래도 이제는 보스들 간에도 조금씩 급이 나뉘는 모양이었다. 이전에 나타났던 거미들의 보스가 색에 따라서 주어지는 타임 포인트가 달랐던 것처럼 말이다.
‘[귀신]의 레벨을 올리는데 사용한 타임 포인트가 아깝지 않은데?’
베에모를 잡기 위해 승한은 망설이지 않고 [귀신]의 레벨을 올렸다. 거기에 사용한 타임 포인트가 256000타임 포인트였다.
하지만 베에모는 [귀신]에 투자한 타임 포인트보다 거의 10만에 가까운 점수를 주었다. 어차피 언제고 [귀신]의 레벨은 올렸어야 했으니, 거기에 사용한 타임 포인트가 전혀 아깝지 않게 되었다.
‘그럼 이제…….’
승한의 시선이 멀리 떨어져 있는 나르샤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얼굴을 새파랗게 질려서는 승한과 쓰러져 있는 베에모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