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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나르샤
“이제 좀 느긋이 이야기 좀 하겠군.”
파삭-.
승한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베에모의 머리를 밟으며 걸어갔다. 성화의 불은 베에모의 숨이 끊어지며 함께 꺼졌다. 새까맣게 타 버린 베에모의 머리는 힘을 잃고 승한의 발 힘에 잿더미처럼 무너졌다.
승한은 힐끔 윤재가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네 개의 뿔을 가진 마족 하나와 세 개의 뿔을 가진 마족들 여럿. 그 중 대부분은 윤재의 불길에 타버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상태였다. 네 개의 뿔을 가진 마족 하나만이 남아 윤재와 싸우고 있었는데, 그나마도 온 몸이 까맣게 그을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승한은 윤재를 걱정하지 않고 곧장 나르샤에게로 다가갔다. 나르샤는 승한이 다가가자 뒤로 주춤 걸어갔다.
“오, 오지 말아요.”
저벅-.
“저, 저리 가!”
나르샤는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더니 목숨을 잃고 쓰러져 있던 마족의 시체에 걸려 발라당 뒤로 넘어졌다.
그녀는 겁에 질려있었다. 그것은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승한은 그녀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오지 말라고요!”
“지금까지 제 마음대로 절 죽이려 해 놓으시고는, 제 걸음도 마음대로 하시렵니까?”
넘어져 있는 나르샤는 어떻게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다리가 풀렸는지 일어나지도 못했다. 겁에 질린 채, 그 자리에 쓰러져 고개를 푹 숙였다.
승한은 나르샤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곤 자리에 쓰러져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나르샤를 빤히 바라봤다. 느낌은 많이 달라졌지만, 붉은 눈동자가 생긴 모습은 6스테이지에서 보았던 나르샤와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대체 뭐가 변한 걸까.’
승한은 잠시 말없이 나르샤를 바라봤다. 나르샤는 금방이라도 승한이 자신을 죽이려 할 줄 알았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잠시 후 고개를 들었다.
승한은 계속해서 나르샤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것은 애틋한 연인이나 동정을 담은 눈이라기보다는,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은 눈이었다. 나르샤는 승한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 더욱 두려워졌다.
잠시 후, 윤재가 남아있던 마족들을 정리하고 승한의 옆으로 다가왔다. 윤재는 승한이 이미 다섯 개의 뿔을 가진 마족 베에모를 쓰러뜨렸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승한과 안면이 있는 마족 여인 나르샤와 그 앞에 있는 승한을 번갈아봤다.
“왜 그러냐?”
“잠시 좀 보고 있었어요.”
“뭐를?”
“그냥… 요.”
승한은 그렇게 말하며 나르샤에게로 다시 다가갔다. 몇 걸음 떨어져 있던 거리가 좁혀지고, 나르샤는 다시금 겁에 질렸다.
윤재는 승한과 나르샤의 대화를 잠시 지켜보기로 했다. 나르샤를 알지 못하는 그에게 있어 나르샤라는 마족은 다른 괴물들과 마찬가지일 뿐이었다. 다른 게 있다면 여인이라는 점과, 말을 할 수 있다는 것뿐.
하지만 승한은 분명 나르샤를 아는 눈치였고, 승한은 나르샤에게 별로 적대감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처음에는 호의 가득한 시선이었다.
‘알아서 잘 하겠지.’
윤재는 승한이 어떻게 하는지 두고 보기로 결정했다. 결국 잠시 거리를 벌리고 승한과 나르샤를 바라봤다.
“나르샤님.”
승한은 나르샤의 바로 앞으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 나르샤는 승한의 부름에 바로 답하지 않고 고개를 팍 숙였다. 어깨를 덜덜 떨고 있는 게 어지간히 겁을 집어먹은 모양이었다.
아니, 그 속에는 조금이지만 미안함도 섞여있었다. 나르샤는 두려움과 함께 미안한 감정이 뒤섞여 도저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승한은 어디까지나 나르샤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직접적으로 목숨을 구해준 건 아니지만 그녀에게 있어서 승한은 20년 전 자신 대신에 성화의 불을 일으켜준 인간이었다. 만일 그 때 승한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나르샤는 자신의 성화를 사용해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르샤는 승한을 죽이려 했다.
어떤 이유에서건 그건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승한도 그것을 알고 있는 만큼, 나르샤는 승한이 자신에게 큰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라 생각했다.
“고개나 좀 들고 이야기 합시다.”
툭-.
승한은 나르샤의 어깨를 두드렸다. 검 대신 따듯한 손이 올라오자, 나르샤는 조금씩 고개를 들어 승한의 얼굴을 바라봤다.
승한의 얼굴을 화가 나거나 하지는 않아보였다. 오히려 별다른 감정이 섞여있지 않은 표정이라 더 무서웠다. 고개를 들라는 말에 덜컥 고개를 들긴 했지만 나르샤는 승한의 얼굴을 계속 볼 자신이 없었다.
“……어쩔 수 없죠.”
덜컥-.
팅-.
승한은 손에 차고 있던 방패와 검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검과 방패를 버림으로서 나르샤를 해칠 의사가 없음을 밝힌 것이다.
“이제 됐습니까?”
“네, 네?”
“지금 당장 당신을 해칠 생각은 없습니다. 당신을 어떻게 할지는 먼저 이야기를 들어보고 난 뒤의 일이죠.”
승한의 말에 나르샤는 눈을 깜박였다. 그러고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대답했다.
“이야기를 하자니… 무슨 소리죠?”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신이 왜 악마들을 부모로 생각하게 됐는지… 그리고 저를 죽이고자 하는 이유가 정확히 무엇인지,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그건 아까 다 이야기 하지 않았나요? 승한씨를 죽여야 아포피스를 부활시킬 수 있고, 바로 그것이 저희를 창조한 부모를 등지지 않는 일이라고요.”
“정말 그게 사실입니까?”
“……네, 사실이에요.”
승한은 그 짧은 순간에 나르샤의 눈이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뭐가 있는 거지?’
나르샤의 말이 거짓인 걸까? 애써 거짓말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무언가 이상했다. 승한은 나르샤의 눈을 유심히 살폈다. 얼마 전과 같이 똑같은 붉은 눈동자였는데, 그 속 면면을 살펴보니 조금 흐릿한 무언가가 보였다.
처음으로 눈동자를 자세히 살펴본 터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른 만큼 눈빛이 변한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승한은 그 모습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다.
‘세뇌… 인가?’
초점이 조금 흐릿했다. 단순히 겁에 질려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기에는 꺼림직한 무언가가 계속해서 걸렸다. 승한은 나르샤의 어깨에 얹은 손을 머리로 가져갔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에 똑바로 대답해 주십시오.”
“네, 네?”
“정말 당신들의 부모가 악마입니까?”
승한의 질문에 나르샤의 대답은 한 박자 늦게 돌아왔다.
“그래요. 그분들은 저희의…….”
“정말 저를 죽여서 아포피스의 봉인을 깨고 싶으신 겁니까?”
이번에도 마찬가지.
“네. 저는…….”
“그만 하십시오.”
승한은 나르샤의 입을 막았다. 몇 번 질문을 해 보고, 어느 정도 확신을 할 수 있었다.
‘대답을 하면서 계속해서 망설이고 있어.’
승한의 물음에 답하는 그녀의 말에는 어딘가 망설임이 있었다. 마치 거짓말에 서툰 아이처럼, 말을 하면서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던 것이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건 확실했다.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건 하나였다.
‘역시… 최면, 아니 세뇌 인가?’
어떤 힘이 개입한 것. 승한은 그 쪽으로 거의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그렇게 생각을 하자 조금은 기꺼운 마음이 들었다.
나르샤가 진심으로 자신을 죽이려 한 것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개입으로 인해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르샤에게 들었던 화가 조금은 누르러지는 느낌이었다. 승한은 나르샤의 머리에 얹은 손에 성화의 불을 피웠다.
“가만히 계십시오. 해치지 않을 겁니까.”
승한은 성화의 힘에 움찔하는 나르샤를 달랬다. 그러자 나르샤는 몸을 덜덜 떨며 잔뜩 움츠러들었다.
성화의 힘이 아무리 마족들과 같은 존재들에게 치명적이라 해도 애초에 성화는 승한의 의지를 반영하는 힘이었다. 설령 상대가 마족이라 해도 승한이 태우고자 하지 않는다면 해를 끼치는 일은 없었다.
승한은 성화를 통해 나르샤의 몸속을 관조했다. 승한은 자신이 무엇을 태워야 할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나르샤의 몸속에 무언가가 있어.’
성화의 힘을 사용한 순간 알 수 있었다. 나르샤의 몸속에 베이모가 가지고 있던 마화의 힘과 같은 기운이 들어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 힘은 온 몸의 마화에 퍼져있던 베이모와는 달리, 나르샤의 머리에 집중적으로 번져 있었다. 그리고 그 힘이야말로 나르샤의 머리를 건드리고 그녀를 세뇌시키고 있던 힘이었다.
‘역시…….’
승한은 나르샤의 머릿속에 있던 또 다른 마화를 발견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 깜짝 놀랐다.
‘정말… 온 몸이 성화로 되어있어.’
성화를 통해 관조한 나르샤의 몸은 말 그대로 성화의 덩어리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베이모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성화의 집약체였다.
베이모가 조각 하나를 매개체로 삼아 성화에 마의 기운을 불어넣어 그 힘을 사용했다면, 나르샤는 성화의 힘 자체를 온 몸에 고르게 퍼뜨리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성화의 힘을 사용하는 게 아닌, 애초에 날 때부터 성화를 품고 태어난 존재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걸 어떻게 한다…….’
승한은 덜컥 겁이 났다.
만약 자칫 힘을 잘못 사용해서 나르샤의 몸속에 있는 힘을 정화시키려다 그녀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럴 가능성은 충분했다. 승한은 아직 성화라는 힘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해는 하되, 완벽하지는 않았다.
베이모가 가지고 있던 마화의 힘을 정화시키고 그 힘을 흡수하기는 했지만 그거야 어디까지나 베이모를 죽이면서 함께 얻은 부수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승한은 나르샤를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다.
무엇보다 마화를 제대로 정화시킬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나르샤의 몸이 걱정이었다.
그녀의 몸은 일반적인 다른 마족들과는 달랐다. 보통 사람들과도 달랐다. 그녀는 마족이라기보다는 성화를 담는 그릇에 더욱 가까운 몸이었다.
만약 그런 그녀의 몸에 성화의 힘이 직접적으로 불이 붙는다면 온 몸이 성화로 산화해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비록 이론상의 일이라고 해도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승한은 나르샤의 몸속에 있는 마화의 기운을 느끼며 입술을 씹었다.
이 힘이야말로 나르샤를 세뇌하고 있는 힘이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이 힘이 머릿속에 심어지고부터 악마들을 부모라 섬기고 아포피스의 봉인을 깨는데 모든 시간을 투자했다. 그리고 결국 이 자리에 도달해 승한을 죽이고자 했다.
모든 게 다 이 힘 때문이었다. 이 힘을 정화시킬 수만 있다면 나르샤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그 대가는 어쩌면 나르샤의 목숨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위험하긴 하지만…….’
잠시 고민하던 승한은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나르샤를 이대로 둘 수는 없었다. 이대로 둔다면 나르샤는 살아도 산 게 아니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자신의 의지를 제멋대로 바꾼 악마의 의지를 따라 꼭두각시처럼 살아갈 뿐이었다.
무엇보다 이대로 두게 되면 언제고 승한에게 피해를 끼칠 수밖에 없었다. 승한은 자신을 반드시 죽이겠다는 일념을 가진 나르샤를 그냥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그건 나르샤는 물론, 승한 스스로도 속이 쓰린 일이었다.
화르르륵-.
결국 승한은 그녀의 머릿속으로 성화의 힘을 불어넣었다. 그 순간, 나르샤의 몸속에 있던 마화의 힘이 일렁이며 승한의 힘에 저항했다.
============================ 작품 후기 ============================
4월 1일, 원고료 쿠폰 베스트에 들고 감사의 의미로 이번 주에 하루 3연참을 하겠다고 약속을 드렸습니다.
사실 월요일부터 짠, 하고 연참을 하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했네요.. 못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도 어찌어찌 하다 보니 되긴 되네요 ㅎㅎ
약속 지켰습니다! 그래도 행복하네요. 여러분들 덕분에 목표했던 바를 이루고, 이렇게 즐겁게 글로 보답할 수 있다는 것이요. 다음에도, 다음 달에도 이런 행복이 지속되면 좋겠습니다. ㅎㅎ
사족은 됐고, 사실 쿠폰 구걸입니다. 하하하하핳.. 기브 앤 테이크, 다시 기브 차례입니다. 여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