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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나르샤
‘또인가?’
백색 공간에서 마주한 붉은 천사는 이번엔 처음부터 붉은 옷을 입고 있었다. 이전에는 새하얀 아름다운 나신을 가지고 처음 모습을 나타냈었는데, 그 때와는 다른 등장이었다.
승한은 마지막 순간 성화의 레벨이 한 단계 올랐던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다음 레벨에 요구되는 타임 포인트가 그대로 고정되었다.
2레벨의 성화를 3레벨까지 올리는데 필요한 타임 포인트가 50만 정도인 것이다. 결코 적은 양의 타임 포인트는 아니었지만 원래라면 200만이 넘게 필요한 타임 포인트의 수치가 그 사분지 일로 줄어든 것이다.
레벨이 하나 오른 것뿐만 아니라 거기에 필요한 타임 포인트도 확 줄어들었다. 다른 능력에 비해 필요한 타임 포인트가 훨씬 적을 수밖에 없었다.
승한은 잠시 말없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거대한 붉은 천사를 바라봤다. 그녀는 승한을 내려다보며 눈을 깜박이고 있을 뿐, 어떠한 말도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능력의 레벨이 오를 때마다 붉은 천사를 만나는 건가?’
성화의 레벨이 2레벨로 오르면서 붉은 천사가 눈앞에 나타났다. 어쩌면 3레벨, 4레벨이 되면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은…….”
그 때, 붉은 천사가 입을 열었다. 촉촉한 붉은 입술이 벌어지고 흘러나온 목소리는 귀가 녹아내릴 정도로 달콤했다.
승한은 그녀가 처음으로 입을 열자 깜짝 놀랐다. 이전에는 마음 속으로 말을 전했던 붉은 천사가, 이번에는 다른 방식으로 말을 전해왔기 때문이었다.
“당신은, 다르군요.”
“……다르다니요?”
그리고 붉은 천사와 마찬가지로 승한도 그녀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전할 수 있었다. 처음 붉은 천사를 만났을 때와 올림포스라는 거대한 산을 마주했을 때, 두 번에 걸쳐 이런 현상을 겪었지만 움직이고 말을 할 수 있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인간이 성화의 조각을 세 개나 가지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비록 그 중 하나는 불완전한 것이라고는 하나… 당신은 특별하군요.”
“불완전한 것이라면… 베에모가 가지고 있던 것을 말하는 겁니까?”
“네. 그가 가지고 있던 성화의 조각은 아포피스를 봉인하고 있던 조각의 일부일 뿐. 완전한 조각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당신은 완전한 성화의 조각 두 개를 몸에 품게 되었습니다.”
베이모가 가지고 있던 힘은 애초에 완전한 성화의 조각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나르샤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붉은 천사의 힘인 성화의 조각을 그대로 품고 태어난 마족이었다.
그리고 승한은 그녀의 성화까지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여러 개의 조각을 하나로 만들었다. 아무래도 붉은 천사가 나타난 이유는 그 때문인 모양이었다.
“성화의 조각을 가진 인간, 당신이 가진 잠재력을 축복합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당신의 몸이 성화를 감당할 수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붉은 천사는 승한에게 친절하게 조언과 경고까지 해주었다. 고작 이런 말을 하려고 눈앞에 나타났나 싶어, 승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신은… 누굽니까?”
“역시 그게 가장 궁금했던 겁니까?”
붉은 천사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에게 성화를 선물해준 존재. 그 정도만 알고 계시면 됩니다.”
“왜 저에게 그 힘을 줬습니까?”
“그건 당신도 알고 계시지 않나요?”
붉은 천사의 물음에 승한의 머릿속에 괴물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스컬레톤부터 마족에 이르기까지, 차근차근 등장하는 괴물들의 모습을 떠올린 승한은 붉은 천사와 그들의 관계를 연결시켰다.
“설마… 악마들?”
“대답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성화의 선택을 받은 인간이여, 부디 그대가 그 힘을 통해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 잠깐!”
승한은 무언가를 더 묻고자 손을 들었다. 하지만 붉은 천사의 모습은 이미 반투명하게 흐릿해져 있었고, 승한의 시아 또한 아득히 멀어져갔다.
**
다시 나타난 시아에서 승한은 나르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올림포스]의 힘을 얻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승한을 제외한 다른 시간은 아주 찰나와 같이 흘렀을 뿐이었다.
[‘성화의 축복’이 전해집니다.]
[‘능력 - 성화’의 친화력이 상승합니다.]
[성화의 사용이 더욱 능숙해집니다.]
승한은 머릿속에 떠오른 메시지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성화의 레벨이 올랐을 뿐만 아니라 ‘성화의 축복’을 통해 성화와의 친화력이 오른 것이다.
‘이건 뭐지?’
의문도 잠시, 승한의 머릿속에 붉은 천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니, 얼굴이라기보다는 모습이었다. 승한은 붉은 천사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천사가… 선물해 준 건가?’
그것 외에는 달리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달리 생각하면 성화가 2레벨까지 오르며 생긴 특혜일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그보다는 붉은 천사가 준 선물이라고 생각하기가 더 쉬웠다.
‘성화를 사용할 때 몸에 부담이 줄어든다는 건… 힘의 소모가 더 적다는 소린가?’
성화는 애초에 붉은 천사에게 맞춰진 힘이자,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힘이었다. [불굴의 육체]덕분에 그 힘에 조금씩 적응해 나가고는 있다지만 힘을 사용할수록 몸에 무리가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붉은 천사가 걸어준 축복은 성화에 대한 친화력을 높여주어 성화를 사용할 때 몸에 가하는 무리를 줄여주었다. 즉, 성화를 사용할 때 소모하는 힘이 줄어든 것이다.
2레벨의 성화는 위력은 더욱 강해졌을지 몰라도 몸에 가해지는 무리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모든 능력의 공통점이었다. 승한이 선뜻 능력의 레벨을 올리는데 타임 포인트를 소모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성화의 레벨이 올라가면서 함께 얻은 성화의 축복은 그 힘의 소모를 억제시켰다. [불굴의 육체]에 투자할 타임 포인트가 당장 없는 승한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뭐, 타임 포인트도 조금만 더 얻으면 [불굴의 육체]의 레벨도 올릴 수 있겠지만.’
아무튼 성화의 레벨을 타임 포인트의 소모 없이 올린 건 충분한 희소식이었다. 더군다나 50만 타임 포인트를 획득하면 성화의 레벨을 3레벨까지 올릴 수 있으니 그 때 가면 더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다 끝났습니다.”
승한은 나르샤의 어깨에 올려 놓았던 손을 떼고는 말했다. 나르샤는 고개를 천천히 들더니 승한을 올려다보았다.
“끄, 끝이라고요?”
“네. 더 이상 나르샤님 몸속에는 성화가 없습니다.”
“성화가……?”
승한의 말에 나르샤는 자신의 몸을 살폈다. 정신이 없을 때는 몰랐는데, 살펴보니 항상 몸속에 가득 차 있던 성화의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저, 정말이네요?”
“그리고 이제 좀 괜찮습니까?”
승한의 물음에 나르샤는 무슨 소린가 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얼굴을 하얗게 질리며 벌떡 일어났다.
“제, 제가 지금…….”
“정신 차렸습니까?”
“어디 다치신 데는 없어요?”
나르샤는 승한의 몸을 살폈다. 마족들과 싸우며 군데군데 자잘한 상처가 생기긴 했지만 승한은 큰 부상을 입지는 않은 상태였다.
“괜찮습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제가 잠깐 정신이 나갔었나 봐요. 제가…….”
“알고 있습니다.”
승한은 나르샤의 말을 막았다. 어차피 다른 힘이 개입되어서 그런 것이니, 승한도 악감정이 생겨나지는 않았다. 나르샤도 의도한 게 아니니 미안할 필요 없었다.
“일단 어떻게 된 일인…….”
승한이 막 몸을 숙여 이야기를 하려고 할 때, 갑작스럽게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입에서 나오던 소리도 갑자기 사라졌다.
‘왜 또 이럴 때……!’
속으로 소리를 질렀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시 시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승한과 윤재가 다시 눈을 뜬 곳은 바로 가장 처음 마족들과 싸우기 시작한 비산동의 아파트 단지였다.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만큼 주위에는 바람소리를 비롯한 여러 소리들이 귓가를 맴돌았다.
-승한씨, 어떻게 됐습니까? 보스는요?
승한의 귓가를 통해 안석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노량진에 있는 보스를 잡으러 간다고 말을 해 놓았던 만큼, 승한의 소식이 가장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승한은 전음구를 꺼내 답했다.
“노량진에 있던 마족들이 구로구로 넘어왔습니다. 그곳에서 저와 윤재 형과 충돌했고, 보스를 비롯한 마족들 모두 정리 끝났습니다.”
-그렇습니까?
“네. 혹시 다른 소식 더 없습니까? 다른 지역과 헌터들은요?”
-안양 지역 내에 있는 마족들 정리는 순조롭게 끝났습니다. 사망자는 석수 지역에 있는 이소영 헌터 한 명뿐입니다.
보스가 등장한 지역이 석수 지역 한 곳뿐이기 때문일까? 생각보다 사망자가 적었다. 이소영 외에도 사망자가 꽤 많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하긴, 남아 있는 헌터들도 제법 뛰어난 사람들이겠지.’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그만큼 많은 괴물들을 사냥하고 강해진 헌터라는 뜻이었다. 그런 만큼 보스를 제외하면 크게 위험할 일은 없는 모양이었다.
무엇보다 안양 지역의 헌터들은 타 지역에 있는 헌터들에 비해 수준이 비약적으로 높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당장 승한만이 아니라 윤재와 차재훈만 하더라도 한국 내에서는 물론 세계적인 수준이라 할 수 있는 헌터였다.
아마 안양 지역이 아닌 서울 지역에서는 사망자가 꽤 될 것이다. 비록 한국에 등장한 두 마리의 보스는 승한이 다 잡았다지만, 그래도 세 개의 뿔을 가진 마족들과 네 개의 뿔을 가진 마족들은 헌터들에게 충분히 위협이 될만한 수준이었다.
‘일단 나르샤에게 가 봐야겠지.’
나르샤는 헌터가 아니라서 시간이 움직이기 시작한 뒤에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가능성이 컸다.
“형. 주작 좀 불러 주세요.”
“아까 그 여자에게 가려고?”
윤재는 나르샤를 괴물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사람과 같이 말을 하고, 사람처럼 감정을 드러내는 나르샤를 차마 괴물이라고 부를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네.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요.”
“아는 사인가 보네. 신경 쓰는 걸 보면.”
“조금은요.”
승한의 대답에 윤재가 다시금 주작을 불러냈다. 윤재가 불러낸 주작은 이전보다 훨씬 덩치가 컸다.
“몇 레벨이에요?”
“9레벨. 다음 레벨에 필요한 타임 포인트가 꽤 많아서 그렇지, 1레벨만 더 올리면 주작도 이제 두 번째 능력으로 변할 거야.”
“금방이겠네요. 타임 포인트는 얼마나 있어요?”
“주작의 레벨 하나쯤 올릴 만큼은 있는데… 이 포인트를 여기 다 투자하는 게 맞을지 고민중이다. 어차피 일주일 정도는 시간이 있으니, 천천히 고민해 보려고.”
승한도 윤재처럼 타임 포인트가 꽤 있긴 했다. 베이모를 죽이고 얻은 타임 포인트만 해도 375000이었으니, 이 타임 포인트를 어디에 사용할지는 차차 고민할 문제였다.
윤재는 주작을 구로구 방향으로 움직였다. 9레벨의 주작은 덩치도 작은 집채만 했지만, 그 덩치만큼이나 빨랐다. 그 위에 올라타고 있는 사람이 승한과 윤재가 아니었다면 속도에 이기지 못하고 금방 아래로 떨어져 버렸을 것이다.
승한은 되도록 나르샤가 다른 헌터들에게 먼저 발견되지 않기를 바랐다. 나르샤가 아무리 타인과 대화를 할 수 있다고 해도 다른 헌터들이 보기에 나르샤는 다른 마족들과 마찬가지로 두 개의 뿔을 가지고 있는 괴물일 뿐이었다. 당장 힘을 가지지 못한 나르샤가 만약 헌터들과 마주칠 경우, 기껏 살려낸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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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무래도 내일은 1연재를 해야할거 같네요.. 조금 쉬고싶습니다.. 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