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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말레이시아
기다리던 이야기가 나오자 승한과 윤재의 귀가 쫑긋했다. 승한은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말씀해 주십시오.”
“첫 기억은 승한씨가 사라진 후, 새로운 악마의 등장에서부터였어요.”
나르샤의 말은 이미 한 번 들었던 이야기였다. 새로운 악마가 나타났고, 그가 아포피스의 봉인을 풀기 위해 나르샤와 베이모를 비롯한 마족들을 보내 승한을 죽이려 한다는 것이었다.
“어떤 악마였습니까?”
“이름은 저도 잘 모르겠어요. 다만 그는 자신이 저희를 만들어 낸 부모라고 말했어요.”
“그 말은 아포피스도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었죠. 하지만 아포피스의 말과는 조금 달랐어요. 그를 마주하는 순간… 저희 마족들은 정말로 그를 부모, 혹은 신처럼 여겼으니까요. 본능적으로요.”
나르샤는 말을 하면서 몸을 잘게 떨었다. 아무래도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아직도 두려운 모양이었다.
“승한씨는 알지 모르지만 저희 마족들은 수많은 일족들로 나누어져 있어요. 저와 자칼, 가렝은 그 수많은 일족 중 하나일 뿐이고요. 뿌리가 다른 수많은 일족들이 모두 그를 경배하기 시작했어요.”
“정말… 그가 마족들의 부모였던 겁니까?”
“사실…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정신을 차린 지금까지도요.”
나르샤는 모든 최면이 풀린 상태였다. 더 이상 그녀의 정신을 조작할 힘은 남아있지 않았다. 마화는 물론, 그녀의 몸속에 있던 성화조차도 모두 승한이 흡수해버렸다.
그렇다는 건 나르샤 본인의 생각이라는 뜻이었다. 오랫동안 악마를 부모로 섬기는 최면에 걸려 있어 그 생각이 남아있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나르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것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진짜 악마가 마족들의 신이라도 되는 걸까?’
승한의 머릿속에는 아직까지도 아포피스의 말이 남아있었다.
‘부모를 등진 역천의 자식들이라고 했나?’
어쩌면 그 말이 헛소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 생각해 보면 악마씩이나 되는 존재가 그런 헛소리를 한다는 것도 이상하긴 했다.
무엇보다 이미 최면에 걸리기 전에 나르샤를 비롯한 마족들이 새롭게 나타난 악마를 부모나 신처럼 느꼈다고 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등장과 함께 최면을 걸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최면이 풀린 지금까지 나르샤가 이렇게 생각하는 걸 보면 아마 확실할 것이다.
‘악마의 자식들이라…….’
승한은 나르샤를 비롯한 마족들, 그리고 다른 괴물들을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나타난 괴물들 모두가 악마와 관련이 되어 있는 모습들이 많았다. 살아 움직이는 뼈 스컬레톤이나 검은 피부를 가진 리자드맨과 거미들, 그리고 마족들까지.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악마의 소행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문득 떠오를 정도였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은 나르샤가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나르샤님을 비롯한 마족들을 조종한 겁니까?”
“조종이라… 그렇게 볼 수도 있죠. 그는 저희들의 몸속에 자신의 힘을 심어 종으로 만들었으니까요.”
“종… 이라고요?”
“네. 마족들의 붉은색 피부가 검게 물들었죠? 그 악마의 힘 때문이었어요.”
“그 많은 마족들에게 모두 자신의 힘을 전했다는 말입니까?”
“네. 그의 힘에도 멀쩡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마족은 몇 되지 않았어요. 저와 베이모를 비롯해 백 명의 마족 정도다 전부였으니까요. 그 중 몇몇 마족들은 악마에게서 성화를 악마의 힘으로 물든 힘을 받았고, 기존보다 훨씬 강해졌어요.”
승한은 베이모가 가지고 있던 마화의 힘을 떠올렸다. 아주 작은 성화의 조각을 가지고 있었던 악마였는데, 아무래도 그와 같은 마족이 한 명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 녀석을 감당할 수 있는 헌터가 더 있으려나?’
아마도 단신으로 베이모와 같은 마족을 상대할 수 있는 헌터는 몇 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지금에 와서는 다른 헌터들도 능력의 레벨을 올리면서 수준이 꽤 올랐을 테지만, 그렇다 해도 베이모와 같은 마족을 잡기 위해서는 꽤 많은 피해를 감수해야 할 게 분명했다.
걱정도 잠시, 승한은 곧 나르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마도 모든 마족들이 악마의 종이 된 건 그가 정말로 저희의 신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럴 수도 있겠군요.”
“네. 애초에 악마를 통해 창조된 만큼, 그의 힘을 거역할 수 없었던 거죠. 그런 게 아니라면… 악마의 힘이 저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무시무시하거나요.”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괴물들의 수는 통산 3억 마리 정도였다. 이전과 같은 수의 괴물들이 나타났다고 볼 때, 마족들 역시 3억에 가까운 수가 세계 각지에 나타났을 것이다.
하긴, 그들 지구의 인간들처럼 하나의 세계를 지배하는 종족이었다. 그만한 수가 있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그 어마어마한 수의 마족들을 큰 힘을 들이지 않고 한꺼번에 자신의 종으로 만들었다는 건, 악마의 힘이 그만큼 크거나 애초에 마족들은 악마의 힘에 거역할 수 없게 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대충 앞뒤가 맞아 떨어지긴 하네.’
나르샤의 말대로라면 마족이 곧 악마의 자식들이라는 말이 되었다. 처음 승한이 나르샤를 만났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녀는 그 사실을 부정했지만, 큰일을 겪고 나서는 인정하는 눈치였다.
“그럼 마족들이 자아를 잃고 힘이 약해진 게 모두 그것 때문입니까?”
“네. 아무래도 자아를 잃어버린 만큼 저희 마족들은 이전에 비해 훨씬 약해졌어요. 하지만 반면 그 힘에 적응해 더 큰 힘을 얻은 이들도 있었죠.”
“힘에 적응했다는 건…….”
“뿔이 하나씩 더 나더군요. 혹은 뿔이 하나로 합쳐지거나요. 저도 처음엔 깜짝 놀랐어요. 세 개, 네 개의 뿔을 가진 마족은 처음 봤거든요.”
악마의 힘은 마족들의 자아와 함께 그들의 힘을 빼앗아갔지만 동시에 그 힘에 어울리는 이들에게는 더 큰 힘을 주었다. 승한은 세 개의 뿔을 가진 마족과 네 개의 뿔을 가진 마족, 그리고 외뿔 마족을 떠올렸다.
“나르샤님은요?”
“저에게는 이상하게 악마의 최면과 힘이 잘 통하지 않았어요. 악마를 부모처럼 숭배하는 최면에 걸리긴 했지만… 그거야 사실 지금도 부정할 수 없으니까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악마를 숭배하거나 하지는 않지만요.”
“성화 때문인가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 애초에 성화의 힘은 악마에게 반하는 힘이니까요.”
나르샤가 가지고 있던 성화의 조각은 결코 작지 않았다. 그 힘이 몸속에 내재되어 있을 뿐, 한 번 타오르기 시작하면 승한이 가지고 있던 성화의 조각보다도 훨씬 더 큰 불을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힘을 가지고 있었던 만큼 나르샤에게 걸린 악마의 최면은 다른 마족들에 비해 약한 편이었다. 나르샤가 다른 마족들과는 달리 약한 힘을 가지고도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럼 역시 마족들을 이곳으로 보낸 것도 악마인 건가요?”
“사실 그것까지는 확실히 모르겠어요.”
“모르겠다뇨?”
“눈을 떠 보니, 갑자기 어떤 균열이 나타나고 그곳으로 들어가라는 목소리가 들렸어요.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말을 들어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 균열 안으로 들어가 보니 바로 이곳이었어요.”
목소리?
직접 명령을 받은 게 아닌, 목소리를 따라 균열 안으로 들어왔다는 뜻이었다. 승한은 나르샤의 말을 통해 한 가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곳에 균열이 있는 것처럼, 다른 세계에도 똑같이 균열이 나타나는 거였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균열은 지구라는 세상과 또 다른 세상을 이어주는 통로였다. 입구가 있어야 출구가 있는 것처럼, 다른 세상의 균열을 통하지 않고 이곳 균열을 통해 나타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 균열을 만든 게 누구인지,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확실히 모르는 겁니까?”
“네. 다만 그 악마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 악마의 목소리도 알지 못하시는 겁니까?”
“악마의 목소리는 알아요. 다만… 균열에 들어갈 때 들었던 목소리를 모르겠어요.”
“모르는 목소리였다면 다른 악마나 또 다른 존재가 아닐까요?”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말 그대로 목소리가 들리긴 했는데, 그 목소리가 기억이 나지 않아요. 혹은 목소리가 없는 것처럼 들렸다거나요.”
“목소리가 없다?”
“네. 그리고 균열을 넘어간 순간, 바로 승한씨를 죽이라는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승한씨를 찾게 되었고요.”
승한은 무슨 의미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목소리가 들렸는데 목소리가 없다니? 혹시 머릿속에 울리는 메시지처럼 문자의 형태로 명령이 주입되기라도 한 것일까?
자세한 건 나르샤도 모르는 눈치였다. 자신이 겪은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승한은 더 캐묻기를 포기했다. 스스로도 모르는 걸 계속해서 물어봤자 나올 대답이야 뻔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면 마족들을 여기로 보낸 게 나르샤가 아는 악마가 맞다 확신을 할 수가 없는데…….’
나르샤를 통해 들은 이야기 중, 몇 가지 확인한 사실이 있긴 했다.
첫째, 악마란 마족들을 비롯한 괴물들의 부모와 같은 존재이자 그들의 신과 같은 존재로서 마족과 같은 괴물들을 종으로 부릴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승한을 죽여 아포피스의 봉인을 풀고자 했다. 아포피스 역시 태양신과 자웅을 겨루었을 정도의 힘을 가진 악마로서, 봉인에서 풀려날 경우 엄청난 악영향을 끼칠 존재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 엄청난 일을 하게 됐군.’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휘말렸다는 생각에 승한은 피식 웃었다.
단순히 스테이지를 진행하며 시키는 대로 따랐을 뿐이다. 그 때만 하더라도 스테이지속 세상이 실제로 존재하는 세상인지, 그 모든 일들이 현실인지조차 확실히 알지 못하던 상태였다.
그런데 스테이지를 진행하다보니 어느새 아포피스라는 대악마를 봉인하는데 한팔을 거들고, 지금에 와서는 아포피스의 봉인을 깨기 위한 열쇠가 되어버렸다. 그로 인해 마족들의 신이라고 할 수 있는 어느 악마는 승한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
‘그래도 직접 와서 날 죽이겠다고 난리치지 않는 게 다행이군.’
억 단위가 넘는 마족들을 단숨에 종으로 만들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악마였다. 아무리 승한이 헌터들 중에서 최고라 하더라도 일개 인간이 신과 같은 힘을 가진 악마와 비교하면 초라할 뿐이었다.
‘그럼 괴물들을 이 세계로 보내는 것도 악마인가?’
그 때, 승한의 머릿속에서 착착 맞춰지던 퍼즐이 엇나가기 시작했다.
‘왜지? 아포피스의 몸속에서 성화를 피운 건 바로 얼마 전이었는데…….’
괴물이 처음 등장한 건 약 한 달 전이었다. 그리고 승한이 아포피스의 봉인을 위해 성화를 피운 건 고작 며칠 전의 일이었다.
시기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어긋난 퍼즐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었다.
‘역시… 나르샤가 들었다는 목소리의 정체는 악마가 아닌 건가?’
당연하게도 악마의 목소리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만약 그게 아니라면 어긋났던 퍼즐도 다시 자리를 찾는다.
‘대체 그 녀석은 누구지?’
균열을 열어 괴물들을 지구로 보내고 있는 존재. 마족들을 종으로 만들어낸 악마가 아니라면, 그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