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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아롤
승한은 다시금 붉은 천사를 마주했다. 또 다시 아무것도 없는 백색의 공간에서, 그녀는 완전한 붉은 옷을 입고 붉은 눈동자로 승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먼저 말문을 연 쪽은 승한이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승한은 붉은 천사의 등장은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스테이지에 나타나는 존재들이, 악마와 천사라는 존재들이 실제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부터 승한은 붉은 천사와 마주하는 이 순간을 항상 기대하고 있었다.
승한의 말에 붉은 천사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붉은 눈동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한낱 인간에 불과한 승한이 그녀의 감정을 이해한다는 게 불가능한 일이라고 볼 수 있었다.
“안타깝지만… 아직 당신의 질문에 답해줄 수는 없습니다.”
“제가 무엇을 묻고자 하는지는 아십니까?”
“네, 알고 있습니다. 많은 게 궁금하시겠지요. 당신의 삶에, 당신들의 삶에 저희가 영향을 끼쳤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니까요.”
승한에게는 그 무엇보다 큰일을 붉은 천사는 별 일 아닌 것처럼 덤덤하게 이야기했다. 묻고 싶은 게 산더미였지만 대답해줄 수 없다는 말로 못을 박아버린 붉은 천사에게 승한은 짜증을 느꼈다.
“저를 통해 무얼 하시려고 하십니까?”
“대답해드릴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올림포스라는 건 대체 뭡니까? 보통 산이 아니죠? 그리고 그곳에 산다는 존재는 대체…….”
“승한씨.”
무작정 궁금한 것들을 묻는 승한에게 붉은 천사는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언급했다. 승한은 붉은 천사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부르자 놀라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아무 것도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뭡니까?”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머지않아 당신이 품고 있는 의문을 풀어드리겠습니다.”
붉은 천사는 확신을 담은 어조로 말했다. 승한은 그녀가 그 고운 목소리로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절대 당신들에게 해가 되는 일은 아닐 겁니다.”
“……믿어도 되겠습니까?”
“네. 믿어 주세요.”
성화의 레벨이 오르면서 만난 붉은 천사는 마치 승한을 타이르기 위해 나타난 것 같았다. 그래도 설마 천사씩이나 되는 존재가 인간을 상대로 거짓을 말하겠나 싶었다.
“이번에는 길게 이야기를 나눌 수 없겠군요.”
“언제는 길게 이야기 한 적이 있었습니까?”
“그렇긴 하네요. 다음에는 좀 더 길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요. 그 때가 되면, 당신에게 많은 것들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나요?”
“급한 일은 없지만… 당신을 찾아온 손님이 저뿐만이 아니라서 말이에요.”
붉은 천사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옆으로 비켰다. 그러자 승한과 비슷한 덩치에 은색의 플레이트 메일을 전신에 걸친 기사가 그 뒤로 나타났다.
“당신은 정말 대단해요. 제 성화와 그들의 힘, 그리고 이 분에게까지……. 정말 계속해서 절 놀라게 하네요.”
붉은 천사의 말은 승한의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승한은 오직 붉은 천사의 뒤에서 나타난 은색 갑옷의 기사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누구지?’
승한은 빨려 들어가는 기분으로 기사를 바라봤다. 은색 투구 사이로 드러난 황금색의 눈동자는 승한을 보고 있었는데, 그 눈을 마주하고 있는 승한은 무한한 경외감이 들어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순간, 승한은 성화의 레벨만이 아니라 [백검]을 10레벨까지 올린 게 떠올랐다. 성화와 [올림포스]의 레벨이 오르거나 처음 능력을 각성했을 때에는 천사나 올림포스 산과 같은 장면들이 승한의 눈에 나타났었다.‘
‘[백검] 때문인가?’
승한에게 성화의 힘을 준 붉은 천사.
마찬가지로 [올림포스]의 힘을 준 존재들.
그들처럼 마찬가지로 승한에게 힘을 주기 위해 찾아온 존재. 승한은 눈앞에 있는 기사를 그들과 같은 존재로 여겼다.
“너에게 자격이 있는가?”
기사의 목소리는 승한의 가슴에 울려 퍼졌다. 승한은 그의 질문이 뜻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격이라면… 무슨 자격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아롤.”
붉은 천사의 부름에 기사가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 그 기사의 이름이 바로 아롤인 모양이었다.
“아직 아니에요.”
“……그런가? 복잡하군. 신경써야 하는 게 너무 많아.”
“이 것도 말씀해 주시지 않을 생각인 겁니까?”
짜증이 조금 섞인 승한의 물음에 붉은 천사가 다시 그를 바라봤다. 그녀는 여전히 감정과 표정이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네. 아직 때가 아니에요.”
“그 ‘때’라는 단어, 정말 유용하군요.”
“이해해 주세요.”
승한은 한숨을 내쉬며 아롤을 바라봤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이라면 그는 [올림포스]를 각성할 때 만난 다른 존재들처럼 입을 다물고 있지만은 않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대화라도 할 수 있는 게 차라리 답답함은 훨씬 덜했다.
“이번엔 당신이 저에게 힘을 주시는 겁니까?”
“그래. 자격을 떠나… 넌 조건을 갖추었으니까.”
“그 조건이라는 게 바로 [백검]의 레벨을 10까지 올리는 겁니까? 재미있군요. 이 설정이라는 것을 만든 게 당신들입니까? 지금 이게 게임 같아요?”
“그 게임이라는 게 뭔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그 설정을 나 혼자 만든 게 아니니…….”
“아롤.”
“알았다, 알았어. 하여튼 천사라는 것들은 너무 깐깐하다니까. 너희들은 너무 겁이 많아.”
“당신이 너무 부주의 한 거예요. 어쩌다 당신 같은 사람이 모두의 영웅이 되었는지…….”
승한은 붉은 천사와 아롤의 대화에서 ‘영웅’이라는 단어에 귀를 기울였다. 전부터 영웅과 관련된 장르의 영화를 좋아하던 승한에게는 실존했던 영웅에게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영웅이요?”
“뭐, 그렇게 불리기도 했었지. 아마 지금 너희 시대에서는 잊혔지만 말이야. 나 보다는 내 조상님 이름이 더 잘 알려져 있더라고.”
“조상님이라면……?”
“일단 이거부터 받아라. 우리가 수다나 떨자고 만난 건 아니잖아?”
“이거라면…….”
대체 뭘 받으라는 건지 물으려던 승한은 갑작스럽게 눈앞에 생겨난 새하얀 검신에 깜짝 놀랐다. 은색의 손잡이와 눈부신 새하얀 검신은 특별할 게 없어보였지만 그 안에서 느껴지는 힘은 결코 평범한 검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성검 듀란달. 뭐, 너희들에게는 성검이라고 알려져 있지는 않겠지만 말이지.”
“……성검 듀란달?”
듀란달이라는 검은 중세 서사시에 나오는 무기의 이름이었다.
본래는 아롤이 아닌 롤랑이라는 기사가 사용하던 검으로, 승한도 그 이름을 접한 건 롤랑의 이야기를 각색한 어느 게임의 스토리 속에서였다. 하지만 역시 승한이 알기로도 듀란달의 앞에 ‘성검’이라는 이름이 붙지는 않았다.
‘성검은 발뭉 아니었나?’
승한이 하는 유일한 성검은 발뭉 정도. 그 외에도 성검이라는 이름이 붙는 무기는 몇 가지가 더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승한은 듀란달이 성검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너희들에게는 성검이라고 알려져 있지 않겠지. 너희들에게 전해진 듀란달은 어디까지나 우리 조상님이 사용하던 때니까.”
“조상님이라면… 혹시?”
“우리 증조부님 이름이 롤랑이다. 이 듀란달은 우리 집안에 내려오는 가보이자, 내 힘이 들어있는 무기라고 할 수 있고. 뭐, 지금은 더 이상 무기라고 할 수도 없나?”
아롤이 승한을 향해 무기를 잡으라고 손짓했다. 승한은 듀란달의 은색 손잡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바닥을 타고 듀란달의 차가운 느낌이 전해졌다. 동시에 듀란달에서 느껴지는 성스러운 힘이 승한의 전신을 감돌았다.
‘성검(聖劍).’
말 그대로 성스러운 검이었다. 승한은 이 검만 있으면 어떠한 마족이나 마물이라도 단숨에 벨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처럼 성화의 힘을 굳이 사용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성검 듀란달을 잡는 순간, 승한은 아롤이라는 존재에 대해 알 수 있었다. 그가 어떻게 붉은 천사와 나란히 이야기 할 수 있었던 건지, 그리고 승한에게 어떻게 이 정도 능력을 전해줄 수 있었던 것인지.
그는 단순히 신화속에 나오는 영웅과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단순히 영웅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가 행한 업적들이 너무나도 많고, 위대했다.
악마를 베어낸 기사.
붉은 천사가 아포피스라는 악마를 봉인했다면, 아롤은 악마를 베었다. 바로 이 듀란달로 말이다.
그는 인간으로서 인간이 행할 수 없는 일을 해냈다. 그랬기에 그는 영웅이었고, 인간의 몸으로서 신과 같은 반열에 올랐다. 천사들조차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가 가진 힘은 그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과연 네가 그 검을 제대로 다룰 수 있을지 모르겠군.”
“노력하겠습니다.”
성검 듀란달. 승한은 그 힘을 완전히 다룰 수 없음을 알 수 있었다.
듀란달의 안에는 아롤의 힘이 담겨있었다. 그의 영혼과 육체에 있던 힘, 그 모든 것이 듀란달과 하나가 되어 듀란달은 더 이상 하나의 검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물건이 되었다.
성검(聖劍)을 뛰어넘은 신검(神劍). 듀란달은 감히 신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 만한 물건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완전하게 다루기 위해서는 [성검]이라는 능력의 레벨을 점차 높여가는 수밖에는 없었다.
“천사님. 나 몇 가지만 말 해도 될까?”
승한이 듀란달을 보며 감상에 젖어있을 때, 아롤이 붉은 천사를 돌아보며 물었다.
“무슨 말을요?”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말이야. 이 녀석도 몇 가지는 알아야 할 게 있지 않겠어? 그래야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도 해 보고, 대처도 하고 하지. 사실 이 녀석이나 얘네 세상의 사람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황당하겠어? 그런데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 건 너무하지 않아?”
“그건…….”
“사실 너도 이번엔 나타난 생각 없었지? 네가 지금 나와 함께 이 녀석 앞에 있는 이유는 내가 지금처럼 이 녀석에게 우리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걸 막기 위해서 아냐?”
“……맞습니다.”
“너무하네, 정말. 나도 선을 넘어서까지 이야기 할 생각은 없으니까 기본적인 이야기는 하게 해 달라고. 니들은 태생부터 다른 존재라지만, 난 이 녀석과 같은 인간이거든.”
아롤이 승한을 돌아보며 마지막 한 마디를 덧붙였다.
“고향도 같고 말이지.”
그 고향은 아마도 승한이 살아가는 세계 전체를 의미하는 것일 터였다. 기사 롤랑의 자손이라면 중세 시대를 살아가던 기사일 테니, 그가 살아가던 세계도 승한이 살고 있는 세계와 같았다.
아롤의 말에 붉은 천사는 고민하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당신을 믿도록 하겠습니다.”
“뭐, 사실 허락 안 해도 말 할 생각이었어.”
“……그렇군요. 잊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원래 그런 인간이었죠.”
“기억났으면 잘 알겠네? 난 적어도 선은 넘지 않아. 그러니 안심하라고.”
아롤의 말에 붉은 천사가 날개를 펼쳤다. 성화의 불길이 사방으로 퍼지며 그녀의 몸이 위로 날아올랐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주의하시길.”
“걱정 마. 나도 알고 있어.”
그 뒤, 붉은 천사의 몸이 스르륵 사라졌다. 그녀는 자신의 모습을 감추며 함께 붉은 깃털들을 주위로 떨어뜨렸다.
아예 자리를 떠난 것을 보니 아무래도 아롤에게 모든 것을 맡긴 모양이었다. 아무리 붉은 천사라 하더라도 아롤이 이렇게 강경하게 이야기 하니 말리기가 어려운 듯했다.
“자, 이제 방해꾼이 갔네?”
아롤은 아예 바닥에 편하게 앉아버렸다. 답답한 투구를 벗어버리자, 황금색의 머리와 함께 새하얀 피부의 미남자가 얼굴을 드러냈다.
“그럼 이야기 좀 할까, 고향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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