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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아롤
익숙한 이름이었다. 듀리안이라는 악마보다는 ‘루시퍼’라는 이름은 악마에 대한 이름을 잘 모르는 승한도 제법 귀에 들어본 적이 있었다.
‘타락천사라…….’
한 때는 고귀한 천사였지만 천사로서의 삶을 버리고 스스로 악마가 되기를 택한 존재.
익히 알던 이름이 나타나서 그럴까? 승한은 듀리안보다 루시퍼의 존재가 훨씬 더 두렵게 느껴졌다. 아니, 실제로도 그는 듀리안보다 훨씬 두려운 존재였다.
‘듀란달이 있어서 쉬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귀찮은 게 나와 버렸어.’
루시퍼에게서 느껴지는 힘은 듀리안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하긴, 듀리안과 같은 수준의 악마라면 듀란달을 들고 있는 승한에게는 무척이나 손쉬운 상대일 것이다.
성화에 불탄 악마의 알 속에서는 듀리안이 부화한 알처럼 여전히 시커먼 증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알 속에서 루시퍼에게 전해지던 마기였는데, 듀리안이 부화했던 알에서 나오던 마기보다는 양이 훨씬 적었다.
오히려 느껴지는 마기의 양은 루시퍼의 부화가 훨씬 더 적었다. 하지만 승한은 오히려 그 점이 더욱 불안했다. 그만큼 사라진 마기가 모두 루시퍼에게로 흡수되었다는 뜻이니 말이다.
‘그래도 저 녀석만 쓰러뜨리면 이번 스테이지도 무사히 넘어갈 수 있겠어.’
새로운 스테이지의 진행 상황에 보상이 물음표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것은 이번 스테이지가 바로 마지막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나, 날개?”
아게일은 루시퍼의 등장에 그의 등에 달려 있는 날개를 휘둥그런 눈으로 바라봤다. 비록 검은색이라고는 하지만 천족에게 있어서 날개는 그 무엇보다 신성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천사의 증표였다.
루시퍼는 아게일의 중얼거림에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다른 천족들을 슥 둘러보더니 마지막에는 승한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천족들인가?”
루시퍼의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다. 조금은 화가 난 듯이도 보였다. 하긴, 그토록 오래 기다려온 완전한 부활을 승한이 망쳐버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네놈인가? 성화를 사용한 천족이.”
“알면서 묻는 것 아닌가?”
“그렇지. 신기하군. 붉은 천사가 너에게 힘을 줬나? 천사가 천족을 자식처럼 여기는 건 알지만, 자신의 힘을 직접 전해줄 정도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루시퍼는 역시나 듀리안처럼 승한의 존재를 이상하게 여겼다. 붉은 천사가 천족에게 힘을 직접적으로 전해준 사례는 생전에 천사였던 그에게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여튼 오랜만에 보니 반갑군. 오랜만이다, 내 아이들아. 물론 지금은 내가 버린 자식들이지만 말이야.”
“그 무슨 해괴한 말이냐!”
아게일은 루시퍼의 뜻 모를 소리에 버럭 소리쳤다. 루시퍼를 단순한 악마라고만 생각하고 있는 그에게는 자신들을 ‘아이’, 또는 ‘자식’이라고 부러는 루시퍼의 말이 기분 나쁘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이 날개를 보면 모르겠나?”
“배덕한 색을 가진 날개를 어디서…….”
말을 잇던 아게일은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중간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루시퍼의 얼굴과 그의 날개를 빤히 바라보더니 소스라치게 놀랐다.
“설마…….”
“그래. 내가 한 때 너희를 낳고 기른 아비이다.”
“루시퍼?”
아게일의 중얼거림에 주위에 있던 천족들이 다 함께 놀랐다. 그 정도로 루시퍼의 등장은 그들에게 있어서 놀라운 일이었다.
루시퍼는 천족들이 부모이자 신으로 섬기는 천사들과 한 때 같은 반열에 있던 존재였다. 그런 만큼 그의 등장은 악마의 등장과는 달리 그들에게 또 다른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그 힘을 보니 붉은 천사가 너희를 여기로 보냈나 보지? 듀리안은 이미 죽었나 보군.”
루시퍼는 새하얀 어금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다른 악마들과는 달리 새하얀 피부를 가진 그는 오직 날개만이 검었다. 오히려 그 새하얀 순백의 피부와 검은 날개가 대비되어 더욱 악마에 가깝게 보였다.
“재미있는 짓을 해 놨어. 이게 얼마나 기다리던 새로운 탄생의 시간인데, 보기 좋게 망쳐 놓았군.”
“조금 더 발리 망쳤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말투가 버르장머리가 없구나. 붉은 천사가 그렇게 가르치더냐? 내 한 때는 그년과 함께 하늘을 걷던 몸이다만.”
“그건 한 때일 뿐 아닌가? 지금도 네가 우리에게 신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나? 천만에. 넌 지금, 우리들에게 악마만도 못한 배덕자에 불과해.”
승한은 자안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루시퍼의 이미지를 그대로 말로 전했다. 그것은 천족들의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루시퍼에 대한 이야기였다.
천사로 태어나 천족들을 만들고 낳았음에도 다른 천사들을 배신하고 스스로 악마가 되기를 청한 존재. 그가 바로 루시퍼였다. 천족들의 성경에는 그런 루시퍼를 악마와 같이 취급했고, 언제고 반드시 천사들이 벌해야 할 존재로 여겼다.
그리고 승한은 그런 성경의 구절을 떠올리고 루시퍼를 욕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다른 천족들이 쉽게 꺼낼 수 없는 말이었다.
아무리 배덕한 존재에 악마가 된 천사라고는 하지만 루시퍼는 분명 천족들을 만든 천사들과 같은 존재였다. 그런 이를 아무리 돌아섰다고는 하나 바로 욕하고 단죄하기에는 그들의 사고가 그렇게 유연하지 못했다. 또한, 천사라는 존재에 대한 동경과 경외감은 루시퍼는 타락한 천사에게까지 그대로 전해져 있었다.
하지만 승한은 자안의 기억을 가졌을 뿐 천족이 아닌 인간이었다. 더군다나 루시퍼라는 존재는 어디까지나 지금 당장 승한에게 있어서 쓰러뜨려야 할 존재일 뿐이었다. 그렇게 해야 스테이지를 무사히 마치고 능력을 획득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런 승한의 단호한 말은 아게일을 비롯한 천족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승한의 말에 아게일은 루시퍼에 대한 성경의 구절을 떠올릴 수 있었다.
“붉은 천사가 재미있는 녀석을 보냈구나. 아니, 그년만이 아닌가? 네가 가지고 있는 그 검은 꽤나 낯이 익어. 그걸 어디서 봤더라…….”
잠시 듀란달을 빤히 바라보던 루시퍼가 잠시 후 크게 웃었다.
“크큭. 아롤의 검이었나? 성화를 가진 것도 이상한데, 천족이 어떻게 인간 영웅 아롤의 검을 가지고 있는 거지? 이거 신기하군. 재미있어.”
“아롤을 아나?”
루시퍼의 반응에 승한이 놀라 물었다. 듀리안은 아롤에게 죽임을 당한 악마라서 그를 아는 게 당연했지만 루시퍼까지 그의 이름을 알고 부르는 건 제법 신기했다.
“그 빌어먹을 자식을 모르는 악마는 아마 없을 거다.”
“그 정도로 유명한 인간이었나?”
“천족들은 모를 만도 하지. 아, 넌 알려나? 그 검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아롤을 만났다는 뜻일 테니까.”
루시퍼는 잠시 큭큭대며 웃더니 스산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짜증나는 짓을 해 버렸어. 옛날에 버린 자식이기는 하지만, 가능하면 내 손으로 내 자식들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는데 말이지.”
“이거 어쩌나. 난 너를 반드시 죽이고 싶은데.”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이 검과 이 힘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승한은 듀란달에 성화의 힘을 머금으며 말했다. 그러자 루시퍼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 역시 알고 있을 것이다. 성검 듀란달이 가진 힘을, 그리고 붉은 천사의 힘인 성화의 힘을. 그것을 아롤을 알고, 붉은 천사를 아는 그가 모를 리 없었다.
“빌려온 힘 주제에 잘도 자신있게 말하는군.”
“입으로 싸울래?”
타악-.
승한이 지면을 딛고 도약했다. 검은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에 떠 있던 루시퍼는 승한이 달려들자 한쪽 날개를 휘둘렀다.
듀란달에 맺혀 있던 성화의 힘과 루시퍼의 검은 날개가 충돌했다. 검은 날개에 성화의 불길이 감싸여지며 듀란달이 날개의 표면을 긁었다. 하지만 듀란달은 루시퍼의 날개를 베어내지 못하고 뒤로 튕겨져 나왔다.
까앙-!
승한은 잠시 거리를 벌리며 뒤로 물러났다. [귀신]을 이용해 조금씩 뒤로 물러나며 승한은 공중에 떠서 루시퍼와 시선을 맞췄다.
‘어지간히도 단단하네.’
전혀 아무런 흠집도 내지 못했다. 단번에 베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전혀 충격이 없다는 건 꽤나 의외였다. 듀란달에 성화의 힘까지 입힌 상태였는데 말이다.
“신기하군. 날개도 없는 천족이, 힘을 사용하지도 않고 나와 같이 하늘에서 걸어 다니다니. 내가 너희를 만들 때 그런 능력은 주지 않았는데?”
루시퍼는 승한이 자신과 같이 하늘에 떠 있는 게 신기한 모양이었다. 하긴, 보통의 천족들이 하늘을 걷기 위해서는 꽤나 힘을 많이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힘을 소모하다 보면 루시퍼와 같은 존재에게 힘을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는 걸 들킬 게 뻔했다.
“게다가 그 정도로 성화를 사용하면서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지? 성화는 천족의 몸으로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아닐 텐데?”
“그게 그렇게 궁금한가?”
“신기한 녀석이긴 하군. 성화를 가지고 있는 것이나, 아롤의 검을 가지고 있은 것이나… 그 힘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것이나. 게다가 그게 다가 아닐 것 같은 느낌이 자꾸 든단 말이지.”
“정답이다.”
승한은 다시금 루시퍼를 향해 달려들었다. 루시퍼가 씩 웃으며 승한을 향해 마주 달려드려는 순간, 그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쿠구구구-.
[올림포스]의 힘이 루시퍼의 몸을 위에서 아래로 짓누르기 시작했다. 루시퍼는 자신을 짓누르는 이질적인 힘에 몸을 휘청거리다 날개를 축 아래로 늘어뜨렸다.
“이건…….”
그 순간, 승한이 루시퍼의 앞으로 도달했다. [백검]의 힘을 담은 승한의 듀란달이 루시퍼를 위에서 아래로 베어갔다.
촤악-.
듀란달이 루시퍼의 볼을 살짝 베어내고 아래로 떨어졌다. 그 짧은 순간, 루시퍼가 급히 날개를 휘둘러 듀란달이 아래로 떨어지는 궤적을 빗겨낸 것이었다.
승한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올림포스]의 힘을 계속해서 유지한 채 듀란달을 쉼 없이 휘둘렀다. 루시퍼는 날개를 휘둘러 듀란달을 막아냈지만, 몸을 짓누르는 힘에 제대로 중심을 잡을 수 없었다. 땅 아래에서의 싸움과는 달리 공중에서의 싸움은 몸을 짓누르는 힘에 더욱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콰앙-!
“크윽.”
승한은 방패를 크게 휘둘러 루시퍼의 얼굴을 왼쪽에서 후려쳤다. 승한의 검을 노려보며 막아내고 있던 루시퍼는 방패에 얻어맞은 충격으로 다시 한 번 크게 휘청거렸다.
그 순간, 승한의 손에서 성화의 불길이 뿜어져 나갔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성화는 루시퍼의 얼굴에 살짝 닿자 그대로 폭발을 일으켰다.
콰앙-!
성화의 폭발에 승한은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 짧은 사이 루시퍼가 다른 한 쪽의 날개를 휘둘렀기 때문이었다. [올림포스]의 힘으로 몸을 보호하고 있던 승한이었지만 목 위가 살짝 베어지며 핏물이 흘렀다.
‘큰일 날 뻔했군.’
듀리안과의 싸움에도 부상을 입지 않았는데, 루시퍼는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3레벨의 성화에 당했으니 루시퍼도 결코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승한은 성화의 폭발로 일어난 안개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잠시 후, 그 속에서 나타난 루시퍼는 새하얀 피부가 검게 그을려져 있었다.
“……진짜 짜증나게 하는군.”
콰드득-.
루시퍼가 하얗게 웃었다. 그런 루시퍼의 날개가 기괴한 방향으로 꺾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새하얀 피부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검게 그을려 있던 피부에서 눈에 보일 만큼 빠른 속도로 검은 날개가 나기 시작했다. 얼굴까지 시커먼 까마귀처럼 변화한 루시퍼는 점차 덩치를 불려갔다.
승한은 변화하는 루시퍼의 모습을 보며 그가 이제야 싸울 마음을 먹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지금껏 들려주던 매끄럽고 아름다운 목소리가 아닌, 아포피스처럼 쩌렁쩌렁 울리는 악마의 목소리를 꺼냈다.
“오냐, 보여주마. 악마가 되어버린 너희 부모의 모습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