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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가치
승한은 안석환의 차를 타고 평촌역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술집으로 향했다. 시내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있는 술집이었는데, 꽤나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가진 바(Bar)였다.
술을 마시기에는 꽤 이른 시간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손님은 그리 많지 않았다. 승한과 안석환을 포함해도 여섯 명뿐이었다.
화려한 조명이 드리워져 있는 어둑한 술집 안으로 들어온 승한과 안석환은 바텐더와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대학에 다니면서 과에서 술을 마시러 다니긴 했지만 승한은 이런 고급스러운 술집에는 처음 와 보는 터라 익숙하지가 않았다.
“술은 어떤 종류 좋아하십니까? 양주? 와인? 아니면 칵테일?”
“소주 맥주 막걸리 외에는 마셔보지 못했습니다. 가끔 양주를 마시긴 했는데… 맛있다고 기억남는 양주는 없네요.”
“그렇습니까? 그럼 제가 이참에 맛있는 양주를 소개해 드리죠.”
그렇게 말한 안석환은 바텐더에게 발렌타인 종류의 양주를 주문했다. 발렌타인은 승한도 들어본 적이 있을 정도로 흔한 양주였다.
“다른 것도 괜찮은 게 있긴 하지만 그냥 제 입맛에 맞춰서 골랐습니다. 제가 처음 양주 맛을 알게 된 게 발렌타인 30년산이었는데, 승한씨가 아실지 모르겠습니다.”
“들어본 적 있습니다. 예전에 학과에서 엠티를 갈 때 교수님이 선물해 주신 적이 있으셨거든요.”
“그렇습니까? 아마 12년산이나 17년산, 아니면 21년산이었을 겁니다. 30년산을 학생들에게 선물해 주는 경우는 없을 테니까요.”
발렌타인 30년산은 17년산이나 21년산보다 가격이 훨씬 많이 나가는 술이었다. 더군다나 이런 고급 바에서 판매하는 가격은 일반 매장에서 판매하는 가격보다 훨씬 비쌌다.
잠시 후, 바텐더가 고급스러운 잔에 발렌타인을 따라 가져왔다. 얼음이 동동 떠 있는 양주는 투명하고 멋들어진 잔 때문인지 유난히 고급스러워보였다.
안주로는 쿠키와 치즈, 과일이 조금씩 담겨져 나왔다. 승한은 발렌타인의 향을 조금 맡고는 입 안에 조금 머금다 목구멍으로 넘겼다.
꿀꺽-.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화끈한 맛이었다. 아무리 얼음을 탔다고는 해도 양주인 만큼 기본적으로 도수가 높았다. 승한은 독하고 쓴 느낌에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어때요?”
“쓰군요.”
“하하! 원래 그런 맛으로 먹는 거죠, 전 이걸 처음 마셨을 때 휘발유 맛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 정도로 썼습니다. 뭐, 그 때는 얼음을 타지 않긴 했지만 말입니다.”
“지금도 그 맛인데요?”
“계속 마시다 보면 나름대로 매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양주는 뒤끝이 없지 않습니까? 뭐, 그것도 헌터가 되고부터는 취기고 뭐고 영 느껴지질 않긴 하지만요.”
안석환은 발렌타인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양주를 너무 급하게 먹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한 잔을 완전히 다 비우고도 별로 힘들어 하지 않았다.
승한은 술을 잘 마시지 않는 편이라 모르고 있었지만 헌터들은 기본적으로 [강인함]이라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두 번째 능력부터는 변화가 생기지만 그 능력의 효과에는 어느 정도 독에 대한 내성도 포함되어 있었고, 그 덕분에 알코올에 대한 면역력도 강해져 있었다.
승한 역시 발렌타인을 한 잔쯤 비웠을 때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전같으면 도수가 높은 술을 마시고 어느 정도 취기가 얼굴에 느껴졌을 텐데, 지금은 전혀 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별의별 효과가 다 있네.’
쓴 맛이 있긴 하지만 안석환의 말대로 발렌타인은 마실수록 묘한 매력이 있었다. 오크통에서 오래 숙성시킨 만큼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풍미가 느껴졌다.
승한이 한 잔을 비웠을 때쯤, 안석환은 순식간에 세 잔을 비웠다. 그러자 가득 차 있던 발렌타인이 절반 넘게 비워졌다.
언제나처럼 안석환은 실없는 이야기를 주절거렸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또 재미있었다. 안석환은 확실히 말하는 재주가 있어 별것 아닌 말에도 관심이 가게 만들었다.
“그래서 차재훈씨와 김윤재씨가…….”
“안석환씨.”
삼십 분 넘게 실없는 이야기로 떠들던 승한이 그의 말을 중간에 잘랐다. 안석환은 입을 다물며 승한의 말을 기다렸다.
“용건이 있으시면 빨리 이야기 끝내고 잡담을 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전 그게 편합니다.”
“아, 그렇습니까? 이거 제가 실례했군요.”
안석환이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잔에 얼을을 채웠다. 그러곤 비어버린 발렌타인 병을 발견하고는 입맛을 다셨다.
“뭐,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바로 용건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승한씨, 혹시 연예인에 관심 있으십니까?”
“……연예인이요?”
뜬금없는 물음이었다. 승한은 안석환의 물음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벙쪄 물었다.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십니까? 관심 있느냐면 아예 없는 편은 아닙니다만…….”
“아, 방송에 나오는 연예인 말고, 승한씨가 연예인이 될 생각 없으시냐 이 말입니다. 정확히는 연예인이 아니라 유명해 지는 거라고 할까요?”
안석환이 씩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원하신다면 도와드리겠습니다. 화안 그룹과 화안 그룹이 지원하는 매니지먼트사, 방송 프로그램이 말입니다.”
“……설명이 필요하겠군요.”
“뭐, 설명하자면 어렵지 않습니다. 승한씨는 지금 시대에서 헌터가 가지는 얼굴에 대해 생각해 보진 적이 있으십니까? 헌터들의 이미지가 어떤지 아시냐는 말입니다.”
안석환의 물음에 승한은 헌터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렸다.
‘어떤 이미지지?’
승한은 헌터들에 대한 이미지 하면 떠오르는 게 없었다. 최근 승한이 만나는 사람 중에 헌터들이 많았고, 자기 스스로도 헌터였다. 바로 눈앞에 있는 안석환도 헌터였다.
그런 만큼 헌터에 대한 이미지 하면 바로 무언가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승한이 아는 헌터는 김윤재와 이주희, 차재훈, 안석환 등, 한 명 한 명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승한의 경우일 뿐이었다.
“뉴스나 신문에서 보도되는 헌터에 대한 기사는 보신 적 있으십니까?”
“있긴 합니다만…….”
“그럼 몇몇 헌터들이 방송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고 있다는 것은요? 그들 중 누군가가 케이블 방송에 나온 것은 아십니까?”
“헌터가요?”
헌터가 방송에 나왔다는 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승한은 자신이 잠들어 있던 사이 그런 방송도 있었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젯밤 10시쯤 방송이 나왔습니다. 그 일로 지금 말이 많아요.”
“헌터가 왜 방송에 나옵니까?”
“꼭 가수나 배우, 모델 같은 사람들만 방송에 나오리라는 법은 없죠. 방송은 누군가 나와서 시청률을 끌어낼 수 있다면 그만이니까요. 그리고 헌터의 방송 출현은 충분히 시청률을 끌어올리기에 매력적인 주제입니다. 물론 동시에 헌터들의 인식도 바꾸는 일이 되었죠.”
헌터들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첫 번째는 괴물로부터 도시를 지키는 수호신처럼 보는 시선이었다. 이 경우는 어찌 보면 정석적인 것이었다. 실제로도 헌터들은 괴물들을 맡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물론 정부로부터 보상을 약속받아 일한 만큼의 돈을 받기는 하지만 말이다.
두 번째는 조금 다른 시선이었다. 일부에서는 헌터들은 괴상한 능력을 가진 인간, 즉 괴물과 비슷한 부류로 보고 있었다. 그들이 등장함으로서 괴물들이 나타났다는 의견도 섞여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헌터들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애초에 그들이 없었으면 민간인들의 피해가 어마어마했을 테니 말이다. 헌터가 많고 수준이 높은 지역, 안양과 같은 도시의 부동산 가격이 기하급수적으로 오른 것 역시 헌터들의 존재여부가 컸다.
케이블 방송에서 처음 나온 헌터들의 존재는 바로 헌터들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바꾸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들 역시 보통 사람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사람이고, 특이한 능력을 가졌을 뿐이라는 걸 보여준 것이다.
“그래서 저도 그들처럼 방송에 나오라고요?”
승한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tv 프로그램을 보는 건 좋아했지만 승한은 한 번도 연예인이 되고 싶다거나 유명해지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프로그램 출현을 통해 어느 정도 출연료를 받을 수 있으니 예전 같았으면 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승한은 이미 돈이야 충분히 있었다. 유명해 지는 거야 좋지만 괜히 이런 일로 얼굴이 팔리고 시간을 낭비하는 게 썩 내키지는 않았다.
“……이런 걸 추천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승한은 안석환이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안석환은 화안 그룹의 자손이었다. 연예계 쪽 매니지먼트사가 아닌, 세계적인 대기업 화안 그룹 말이다.
그런 곳에 몸담고 있는 그가 승한에게 아무런 이유 없이 방송 출현을 제의할 이유가 없었다. 승한은 분명 어떤 숨겨진 의도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방송은 사람들에게 얼굴을 비추기 가장 좋은 매체입니다.”
“그건 압니다. 그런데요?”
“뭐,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헌터들이 방송에 나온다는 현상 자체가 긍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괴물의 보도만 이루어지던 기존의 방송 주제를 탈피하고 그들과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 있고, 자신들을 지켜주고 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
“그게 전부는 아닐 텐데요? 화안 그룹에서 사람들 민심 때문에 움직이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기업은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 비영리 단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정부와는 달리, 기업은 철저하게 돈이라는 이익을 위해 움직이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화안 그룹은 바로 그런 기업들 중 정점에 가까이 있는 기업이었다. 그들이 아무런 대가 없이 사람들의 민심 때문에 움직이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승한의 생각은 정답이었다. 승한의 뾰족한 지적에 안석환은 드디어 본론 중의 본론을 꺼냈다.
“맞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부과적인 것뿐이고, 사실은 저희 화안 그룹이 승한씨의 매니지먼트가 되는 게 우선적인 목표입니다. 방송은 그 도구 중 하나이죠.”
“매니지먼트가 되겠다고요? 화안 그룹이 말입니까?”
“네. 승한씨도 아시죠? 승한씨 스스로가 헌터들 사이에서는 물론, 이 시대에 얼마만큼의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존재인지를. 물론 앞으로 괴물들이 계속해서 출현한다는 전제가 깔리지만 말이죠.”
지겹도록 들어온 이야기. 승한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승한씨는 잘 모르겠지만 승한씨의 존재는 이미 알게 모르게 많이 알려져 있는 상태입니다. 안양 지역 내에 한국, 어쩌면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날지도 모르는 헌터가 살고 있다고요. 한국에 나타난 괴물들의 보스를 모두 처치한 존재로 말이죠.”
“……그런 게 어떻게 알려져 있습니까?”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바다가 있지 않습니까? 이미 헌터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이야기고, 조금만 이야기를 흘려보내도 소문이 퍼지는 건 순식간이죠. 아마 지금쯤이면 승한씨가 싸우는 영상도 조금씩 퍼지고 있을 겁니다. 손을 써 뒀거든요.”
“누구 마음대로요?”
승한은 자신의 영상을 마음대로 뿌렸다는데 적잖이 불쾌감이 들었다. 그런 승한의 반응에 안석환은 급히 말을 덧붙였다.
“죄송합니다. 한 시가 급한 일이라서 허락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뭐, 크게 걱정은 마십시오. 얼굴은 가려서 올렸으니까요. 저희가 원하는 건 하나입니다. 승한씨가 전 세계 모든 헌터들 중 최고가 되고, 저희 화안 그룹이 그런 승한씨의 뒤를 봐준다는 게 알려지는 것. 그를 통해 저희 화안 그룹의 주가가 올라가는 것. 그게 가능하다면 승한씨에게 어떤 지원도 아끼지 않을 겁니다.”
화안 그룹, 그 거대한 기업이 승한을 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