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0 / 0223 ----------------------------------------------
21. 올림포스
“잘 올라오는군.”
“말 하지 않았나? 저 녀석은 꽤 특별하다고. 처음부터 더 무겁게 압박하던가 했으면 모를까, 이 정도는 충분히 해쳐갈 녀석이지. 몰랐나?”
“너는 내가 인간에게 관심을 가질 거라고 생각하나? 저 녀석도 이곳에 직접 찾아온 게 아니라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거다.”
“하긴. 넌 예전에도 인간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었지. 그래서 이번에도 우리들에게 힘을 보태지 않았고. 그런데 어때? 직접 본 감회는.”
“신기한 녀석이긴 하군. 그 녀석처럼.”
두 명의 남성이 순백의 의자에 마주앉아 작은 분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수 위로는 작은 무지개가 그려져 있었는데, 그곳에는 승한이 한 걸음 한 걸음을 겨우겨우 옮기고 있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 녀석이라면 아롤을 말하는 건가?”
“그럼, 그 녀석 말고 내가 관심을 가진 인간이 또 누가 있지?”
“하긴, 그건 그렇군. 그런데 그 녀석을 그냥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나? 이미 인간은 아니지 않나?”
“그 당시에는 인간이었지. 물론 인간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녀석이었다는 건 알고 있지만 말이야. 건방진 녀석이었지만 능력 하나는 인정할 만했지.”
풍성한 흑발의 머리와 긴 수염을 가진 남성은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승한의 모습을 바라봤다. 승한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계속해서 걸음을 옮기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는 흑발 남성은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어떤가? 저 녀석은.”
그런 그에게 새파란 머리를 가진 남성이 물었다. 그들은 자신의 머리색처럼 뚜렷한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푸른 머리 남자의 물음에 흑발의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 녀석 같군.”
“그래도 멈출 생각은 없어 보이는군.”
“이 정도도 되지 않으면 그 녀석 앞에 보이기에는 부끄럽지.”
“저 녀석이 붉은 천사의 선택을 받아 그의 힘을 건네받은 사실은 알고 있나? 아롤의 선택의 받아 듀란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듀란달을? 그건 조금 놀랍군.”
흑발의 남자는 붉은 천사보다는 승한이 듀란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더욱 놀란 듯했다. 하긴, 단순히 힘을 조금 건네받은 것과 듀란달을 건네 받은 것은 차이가 컸으니 말이다.
“그리고 우리의 선택도 받았지.”
“왜 저 녀석을 선택했지?”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중요한 건, 저 녀석이 지금 이 앞까지 도착했다는 것이지.”
흑발의 남자는 무지개 속으로 보이는 승한이 궁전에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며 씩 미소 지었다. 다가오지 말라는 의미와 시험해보겠다는 의미로 그를 짓눌렀는데, 의외로 이렇게 가까이 다가와 버렸다.
승한은 그의 시험을 통과했다. 푸른 머리의 남자는 처음부터 승한을 응원하고 있었지만, 이 일을 통해 승한은 흑발의 남자에게도 인정을 받았다.
“이만 일어나지.”
“엉덩이 무겁던 네가 직접 움직이려는 건가? 꽤 마음에 들었나 보군.”
“적어도 다른 인간들보다는 나아 보여서 말이지.”
**
“허억. 허억. 하아아-.”
승한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잠시 다리를 쉬었다. 하지만 가만히 서서 쉰다고 해서 쉬는 느낌이 아니었다. 오히려 몸을 짓누르는 느낌에 피로감만 늘어날 뿐이었다.
승한은 어느 순간부터 [증폭]의 힘까지 사용하고 있었다. 다리는 물론이고 온 몸에 힘을 퍼뜨려 양 어깨를 비롯해 온 몸을 짓누르고 있는 힘으로부터 저항했다. 그렇게 어떻게든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손님 대접 한 번 거지같네.”
승한은 이를 악물었다. 처음 궁전을 발견하기 전부터 조금씩 조여오던 압박감은 이제는 아예 한 걸음 내딛기도 힘들 정도로 무거워져 있었다.
아래를 보며 겨우 한 걸음씩을 옮기던 승한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눈앞으로는 웅장한 궁전이 더욱 가까워져 있었다. 얼마 남지 않긴 했지만 승한의 몸을 짓누르는 힘도 덩달아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래선 보통 사람은 가까이 가지도 못하겠군.’
아니, 이 세상에 승한 외에 다다갈 수 있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 싶었다. 보통 사람은 물론이고, 헌터들도 이 정도 압박에는 견디지 못할 것이다.
승한은 [불굴의 육체]를 4레벨까지 올렸다. 현존하는 헌터들 중 [불굴의 육체]를 이만한 레벨까지 올린 헌터가 있을까 싶었다. 게다가 승한은 몸 전체에 걸쳐 [증폭]의 힘을 최대한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몸이 무거워 한 걸음이 버거울 지경인데, 과언 어떤 헌터가 이 무게를 견딜 수 있을까? 승한은 자신 외에는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승한은 결국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 거대한 궁전 앞까지 도달했다. 새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궁전의 첫 계단을 밟은 순간, 승한은 온 몸을 짓누르는 힘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허억, 헉.”
그리고 몸을 짓누르는 힘이 사라진 것을 느낀 승한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드디어 힘을 풀어도 된다는 생각에 축 늘어져 버린 것이었다.
온 몸에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이렇게까지 몸이 늘어지기는 오래간만이었다. 능력을 얻고, 헌터가 된 후로는 이런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진짜 별 짓을 다 시키네.”
승한은 잠시 계단에 앉아 쉬었다. 이대로 계속 움직이다가는 먼저 쓰러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렇게 오 분 정도 쉬었을까? 승한은 몸의 피로가 조금 풀리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힘들었던 몸이 잠깐 자리에 앉아 숨을 고르자 살만해졌다. 아무래도 [불굴의 육체]로 인해 몸이 튼튼해진 만큼 회복도 빨라진 모양이었다.
저벅-.
승한은 높게 뻗어있는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빠르게 뛰어 올라갈 수도 있었지만 웅장한 궁전의 모습과 그 아래로 보이는 구름과 함께 그려져 있는 한 폭의 경치를 구경하며 올라가고 싶었다.
“절경이긴 하군. 참 좋은데 사신단 말이지.”
승한은 이 궁전 속에 자신이 보았던 ‘그들’이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붉은 천사와 아롤이 말한 그들은 아마도 자신에게 [올림포스]라는 능력을 준 존재들일 것이다.
수백 개의 계단을 올라간 승한은 궁전의 입구에 겨우 도달할 수 있었다. 궁전의 입구에는 여러 개의 석상이 세워져 있었는데, 승한은 그 석상이 낯이 익었다.
“그들인가?”
“그래, 그들이다.”
그 순간, 승한은 뒤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몸을 휙 돌렸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에 대해 아나?”
“……장난치시는 겁니까?”
승한은 다시 궁전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서 승한을 기다리고 있던 두 명의 남자를 볼 수 있었다.
각각 검은 머리와 푸른 머리를 가진 남자. 그들 중 푸른 머리를 가진 남자는 승한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승한은 그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며 몸을 잘게 떨었다.
‘이 사람들이 다가 아니야.’
승한은 눈을 돌려 주위에 있는 석상들의 얼굴을 살폈다. 총 열두 개의 석상들 가운데에는 눈앞에 있는 두 남자의 얼굴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직 이 궁전 안에는 더 많은 이들이 남아있을 것이다.
“왜? 우리 둘 뿐이라 실망했나?”
“실망은 아니지만… 다른 분들은 어디 계십니까?”
“우리가 누구인 줄은 알고 그런 걸 묻는 건가?”
“그리스 신화의 열두 신들, 아닙니까?”
승한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대답을 내놓았다. 그 대답에 푸른 머리의 남자가 크게 웃었다.
“흐하하핫!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나?”
“……아닙니까?”
푸른 남자의 반응은 알쏭달쏭했다. 마치 승한의 말을 부정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승한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맞다. 인간들 멋대로 지어낸 이야기긴 하지만, 너희가 말하는 올림포스 산 속의 신들이 바로 우리가 맞긴 하지. 이름 빼고는 제대로 된 게 없지만 말이야.”
“이름 빼고는 제대로 된 게 없다니요?”
“그것들이 지어낸 이야기 중 제대로 된 게 없단 말이지. 모습이야 어떻게 비스무리하게 표현해 놓긴 했다만, 이야기는 죄다 엉터리더라고.”
“아무튼 당신들이 신화의 열두 신들은 맞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래, 맞다. 내가 바로 너희가 말하는 포세이돈이다.”
승한은 막상 그의 이름을 들으니 잔뜩 긴장하게 되었다. 아주 자세하게는 아니더라도 대충이나마 그리스 신화를 알고 있는 승한은 포세이돈의 이름 앞에 잔뜩 긴장했다.
“뭘 그리 긴장하지? 하하하. 내가 정말 신화처럼 바다라도 뒤집고 그럴 것 같나?”
“……네?”
“내 머리색이 이래서 그런가? 인간들은 이 색에서 바다를 떠올리더군. 그래서 날 바다의 신으로 만든 모양이야. 그것들이 만들어 놓은 이야기를 봤는데, 참 재미있어. 상상력이 아주 뛰어나단 말이지.”
승한은 포세이돈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포세이돈 하면 당연하게도 바다의 신으로서 알려져 있었는데, 그게 꾸며진 이야기라고 하니 얼떨떨했다.
‘포세이돈은 포세이돈인데, 바다의 신은 아니다?’
승한은 괜히 허탈해졌다. 그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열두 신들의 이야기가 모두 거짓이었다는 것인가? 승한은 포세이돈 뒤에 있는 또 다른 신을 바라봤다.
“그럼 저 분은…….”
“하데스. 내 형제지.”
“형제라고요? 그럼…….”
“나와 하데스, 제우스. 이렇게 세 명은 형제가 맞다. 그리고 제우스가 가장 큰 쌍둥이 형인 것도 맞고. 물론 서로 형 동생 거리진 않지만 말이야.”
그리스 신화에는 제우스와 하데스, 포세이돈, 이 세 명이 형제로 나온다. 아무래도 포세이돈이 바다의 신은 아니지만 그 셋이 형제라는 건 사실인 모양이었다.
“대체 사람들에게 신들의 이야기가 왜 그렇게 와전된 겁니까?”
“너희 인간들은 다 그렇지 않나? 한 가지 사실만을 가지고 재미있게 부풀리는 것들. 재미난 이야기들이 아주 많더군. 특히 요즘은 별의별 신들이 다 만들어지고 있고 말이야. 차라리 우리들은 그나마 낫지. 있는 것들을 가지고 만들어냈으니까. 하지만 이젠 아예 없는 것들을 지들끼리 만들어 내기도 하더군.”
포세이돈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승한을 향해 다가와 어깨에 팔을 둘렀다. 승한의 얼굴만큼이나 두꺼운 팔뚝은 가까이서 보니 적잖이 위협적이었다.
“아무튼 따라 오라고. 저 녀석이 장난을 치는 바람에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조금만 더 힘내고.”
“저 친구라면…….”
“하데스 말이야. 난 그냥 와도 된다고 했는데, 저 녀석이 자격이 있는지 시험해 보고 싶다고 우기더라고. 널 믿지 못하겠다나?”
승한은 포세이돈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지들끼리 마음대로 자신을 선택해 놓고, 이젠 또 믿지 못하겠다니?
‘뭐 이리 제멋대로야?’
방금 전까지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왔던 걸 생각하면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그것이 단순한 변덕 때문에 이루어진 시험이었다니 더 화가 났다.
“오해하지 마라. 저 녀석은 널 선택한 적이 없으니까.”
포세이돈은 마치 승한의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승한은 고개를 들어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는 포세이돈을 올려다보았다.
“널 선택한 건 나다. 거기에 동조한 신들은 몇 명 없어. 그래도 선택을 받았다는 게 중요해서 힘을 주긴 했지만, 사실상 널 선택했다는 걸 반기는 신들은 반도 되지 않아.”
“……그 중 한 명이 하데스 님이라는 겁니까?”
“저 녀석은 이제 아니지. 방금 전 네 모습을 보고 감동하셨는지, 무거운 엉덩이를 떼고 마중을 나오셨으니까. 원채 말이 없는 녀석이라 지금은 입을 꾹 다물고 계시지만 말이야.”
승한은 검은 머리에 근엄한 얼굴의 하데스를 바라봤다. 신화 속에는 죽음의 신으로 알려져 있는 그의 분위기는 싹싹한 포세이돈과는 달리 제법 살벌했다.
‘저런 모습 때문에 죽음의 신으로 알려진 건가?’
그런 것치고는 포세이돈의 성격은 알려진 것과는 지나치게 많이 달랐다. 승한은 알려져 있던 그리스 신화가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엉터리라고 생각하며 포세이돈이 이끄는대로 따라갔다.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겁니까?”
“널 기다리고 있는 녀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