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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올림포스
대답은 의외로 하데스에게서 들려왔다. 승한은 그에게로 고개를 돌려 다시 물었다.
“그가 누굽니까?”
“가 보면 안다.”
깔끔한 단답이었다. 더 이상의 대화를 원하지 않는 건지, 아니면 더 이상 대화가 필요 없다고 생각한건지는 알 수 없었다. 포세이돈과는 다른 의미로 생각을 알 수 없는 존재였다.
“원래 저래. 신경 쓰지 마라.”
포세이돈은 승한의 어깨에서 팔을 풀며 하데스의 옆으로 스르륵 날아갔다. 허공에 구름이 생겨나며 그 구름이 포세이돈을 저절로 하데스의 옆으로 이끌었다.
승한은 천천히 그 둘의 뒤를 따라갔다. 포세이돈과 하데스는 산보라도 하듯 아주 느리게 걸었다. 승한은 그 뒤를 따라가며 궁전의 풍경을 둘러봤다.
“신기한가?”
하데스의 목소리에 승한이 퍼뜩 놀랐다. 말이 없다고 하더니, 한 번 입을 여니 또 다시 승한에게 말을 걸어왔다.
“신들이 사는 궁전인데 그럼 신기하겠지.”
“어차피 우리가 여기 다 같이 모이는 경우는 드물지 않나?”
“하긴. 저 녀석이 아니었으면 우리도 이렇게 모이지는 않았겠지. 사실 난 네가 안 올 줄 알았단 말이지. 그래도 궁금하긴 했나봐?”
“그러니 이만큼 모인 거겠지.”
“하여간 저 녀석 때문에 우리가 요즘 들어 꽤 자주 모이는 것 같단 말이지. 다른 놈들도 신경 안 쓰는 척하면서 은근히 신경 쓰긴 하나 봐.”
“전에야 제우스 녀석이 모았던 거니까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이번엔 확실히 의외지.”
승한은 그들이 말하는 이들이 신화속에 있는 다른 열두 신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포세이돈의 말대로라면 신들의 특징은 몰라도 그들의 이름만큼은 실제와 같으니 말이다.
승한은 포세이돈과 하데스를 따라 한참을 궁전 안으로 걸어갔다. 궁전은 쓸데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넓었다. 새하얗고 텅 빈 궁전 안을 계속해서 걸어가기를 삼십 분이었다. 대체 왜 이렇게 넓은 건가 싶을 정도였다.
대체 어디까지 가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때쯤, 승한의 눈에 궁전 안쪽에 있는 거대한 문이 보였다. 그런데 그 문은 궁전 안에 있는 게 아닌, 궁전을 통해 들어가는 어떤 산속에 달려있었다.
‘산에 문이 있어?’
올림포스 산에 있는 거대한 암벽에 달려 있는 거대한 문은 황금색으로 빛났다. 승한은 설마 저게 전부 황금일까 싶었다.
“설마가 아니라 진짜 금이다.”
포세이돈의 말에 승한은 깜짝 놀랐다. 그가 자신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아무리 신이어도 마음대로 네 생각은 못 읽으니 걱정 마라. 그게 가능한 건 딱 한 명뿐이니. 그냥 대부분 저걸 본 녀석들은 너처럼 생각하곤 해서 때려 맞춘 것뿐이다.”
“저 말고도 저 문을 본 사람이 있습니까?”
“있지. 너도 잘 아는 사람.”
의미심장한 말에 승한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한 사람을 떠올렸다.
“설마… 아롤님을 말하는 겁니까?”
“그 녀석 다음이다, 네가.”
아롤은 분명 승한이 그리스 신들과 연관이 있다고 예상하고 있긴 했다. 하지만 승한은 아롤이 이들과 직접적인 연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좀 더 문 앞으로 가까이 다가간 승한은 멍하니 거대한 황금의 문을 올려다보았다. 족히 십 미터는 될 정도로 거대한 문은 정말로 통짜 황금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어마어마하군.’
두께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이만한 크기의 문이면 두께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승한은 문득 이 문을 가져다 팔면 얼마가 나올까 하는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금값도 잘 모르고, 안다고 해도 이만한 양의 금이 얼마나 무게가 나갈지는 짐작할 수도 없었다. 승한은 쓸데없는 생각이라며 고개를 털어버리고는 포세이돈과 하데스의 뒤를 마저 따라갔다.
끼이이익-.
포세이돈과 하데스가 다가가자, 문이 안쪽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승한은 문이 열리고 안쪽에서 나오는 빛에 눈살을 찌푸렸다. 워낙에 강한 빛 때문에 제대로 눈을 뜨기가 어려웠다.
“환영한다. 신들의 궁전에 발을 들인 두 번째 인간아.”
포세이돈은 승한의 뒤로 돌아가 그의 등을 떠밀었다. 승한은 아직까지도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한 채 포세이돈이 떠미는 대로 문 안으로 들어갔다.
승한은 찌푸려진 눈살을 조금씩 뜨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자 조금씩 시야가 나타나며 내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완전히 시야를 찾은 순간, 승한은 입을 크게 벌리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여기는…….”
기둥과 석상 외에는 아무 것도 없던 문밖과는 달리, 이곳은 총 열두 개의 보좌가 만들어져 있었다. 원형으로 둥그렇게 둘러진 보좌는 궁전의 위쪽 2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새하얀 보좌는 몇몇 비어있었다. 하지만 승한은 비어있는 자리보다는 그 자리에 앉아있는 또 다른 신들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들이야말로 포세이돈, 하데스와 같은 그리스 신화의 신들이었다.
승한은 신들 한 명 한 명을 둘러보다가 어느새 자리에 앉아있는 포세이돈과 하데스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뒤에 있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것이었다.
그 중 승한의 시선이 가장 마지막에 향한 곳은 포세이돈과 하데스의 중앙에 앉아 있는 존재였다. 금발의 머리와 수염을 기른 존재는 다른 신들과 마찬가지로 위엄이 있었지만, 조금 특별한 느낌이 들었다.
‘제우스?’
그를 본 순간, 승한은 그리스 신화의 주신이라고 할 수 있는 제우스를 떠올렸다. 하늘을 관장하고, 벼락을 내려 인간을 벌한다는 최고의 신. 포세이돈, 하데스의 형제이자 가장 큰 형으로 알려져 있는 그였다.
“저 녀석인가?”
“아롤과는 느낌이 많이 다른데?”
“아롤도 처음에는 저러지 않았나? 꽤 오래 전이라서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승한은 신들이 떠드는 소리를 정확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원형으로 이루어진 궁전에 떠들썩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조용.”
그들의 숙덕거림에 제우스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자 승한을 가운데 두고 말이 많던 신들이 한 순간에 입을 다물었다.
승한은 다른 신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다 마지막으로 제우스와 눈을 맞췄다. 제우스와 포세이돈, 하데스는 형제라서 그런지 역시나 얼굴이 비슷했다. 조금씩 다르긴 했지만 가장 큰 차이는 머리와 수염의 색이었다.
하지만 승한은 유독 제우스가 그 셋 중에 가장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까칠한 듯이 보이는 하데스와 신이라고 하기에는 말이 많던 포세이돈과는 달리, 가장 근엄하고 얼굴에 감정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름이 뭐지?”
제우스의 물음에 승한은 마른 침을 삼켰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반드시 대답해야 할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김승한입니다.”
“어디서 왔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왜 왔지?”
제우스의 물음에 승한은 자동적으로 대답하며 크게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의 물음에는 어딘가 거절할 수 없는 힘이 담겨있었다.
“신들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너에게 힘을 줬다는 사실은 알고 있나 보군.”
“알고 있습니다. 직접 이곳까지 오면서도 겪고 느꼈으니까요.”
승한은 그렇게 말하며 하데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가 바로 승한이 이곳에 신들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우리를 왜 만나고 싶어 했지?”
“묻고 싶은 게 많습니다.”
“대답해 줄 거라고 생각하나?”
“……밑져야 본전 아니겠습니까?”
승한은 애초에 확고한 목적을 가지고 이곳까지 온 게 아니었다. 첫 번째 목적이라고 한다면 [올림포스]라는 산에 진짜로 신들이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었고, 두 번째 목적은 신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는 것이었다.
승한은 궁금한 게 많았다. 아롤과 붉은 천사가 왜 자신을 선택했는지 궁금한 것처럼, 이들이 왜 자신을 선택했는지도 궁금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왜 힘을 줬는지,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도 궁금했다.
물론 그런 것들을 반드시 알려 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적어도 소기의 성과는 이룬 셈이었다. 승한이 사는 세상에, [올림포스]라는 산에 신들이 산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말이다.
“배짱이 두둑한 인간이군.”
승한에 대한 제우스의 평은 간단했다. 그 이상의 다른 말은 없었다. 승한은 긴장한 표정으로 그의 시선을 계속해서 응시했다.
황금색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으니 문득문득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승한은 이 자리에서 볼썽사납게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 쓰러질 생각이 없었다. 그는 최대한 정신을 다잡았다.
제우스는 승한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비어있는 자리를 둘러봤다. 그는 자리에 모인 모든 신들에게 물었다.
“오지 않은 녀석이 누구지?”
“헤르메스와 헤파이스토스, 데메테르, 아르테미스. 이 녀석들은 예전부터 이 일에 관심이 없었지.”
제우스의 물음에 대답한 건 그의 옆자리에 있는 포세이돈이었다. 그는 맞은편에 앉아있는 여인을 보며 말했다.
“헤스티아, 당신이 참석한 건 의외군. 당신은 이 일에 관심이 없지 않았나?”
“아롤 때와는 다르죠. 이 분은 성화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아하. 그러고 보니 넌 예전부터 성화에 관심이 많았지. 그럼 성화를 구경하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건가?”
“그게 아니면 제가 왜 여기 왔겠어요?”
“넌 저 녀석을 지지하는 편인가?”
“중립이죠. 이 분의 성화를 보기 전까지는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을 생각이에요.”
헤스티아라고 불린 여신은 다른 신들에 비해 유독 승한을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에서 승한은 신들 사이에서도 자신을 지지하는 신과 그렇지 않은 신들이 나누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적어도 포세이돈과 하데스는 나를 지지하고 있을 테고…….’
확실한 건 포세이돈은 승한을 지지하고 있었고, 하데스는 방금 전의 일로 승한을 지지하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두 명의 신들이 자신을 지지한다는 생각에 승한은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문제는 제우스인가?’
승한은 보좌에 턱을 괴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제우스의 속내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는 여전히 표정이 없었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들 중 너를 지지하는 신은 세 명뿐이다.”
“이젠 나도 지지한다.”
그 때, 하데스가 손을 들며 말했다. 그의 말에 다른 신들이 술렁거렸다. 오직 제우스만이 그의 의견을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그럼 이제 넷이 되었군. 포세이돈과 하데스, 아레스, 아폴론. 다른 셋은 너를 반대하고, 하나는 중립이고, 넷은 관심이 없지.”
관심이 없는 넷은 아마도 앞서 언급된 신들일 것이다. 승한은 신들 사이에서도 자신을 가운데 두고 이야기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잠깐. 셋은 반대하고, 하나는 중립이라고?’
승한을 지지하는 신들의 이름은 언급되었다.
하데스가 자신 역시 승한을 지지한다며 의견을 표출하는 것으로 그와 포세이돈, 아레스, 아폴론까지 모두 넷이었다.
그리고 중림이 누구인지는 뻔했다. 헤스티아라는 여신이 승한을 가운데 두고 중립을 표명했다. 승한을 지지하는 신이 넷에, 중립이 하나. 반대가 셋. 그렇게 해서 이 자리에 있는 신들은 모두 여덟 명이었다.
그리고 그 의미는 언급된 신들을 제외한 나머지 신들은 승한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나를 설득시켜라. 그렇다면 궁금한 것에 대답해 주도록 하지.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네 머리 위로 벼락이 떨어질 것이다.”
이윽고 승한이 우려하던 말이 제우스의 입에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