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타임-140화 (140/223)

0140 / 0223 ----------------------------------------------

23. 죽은자

“시간 됐네요.”

스마트폰을 통해 시간을 확인한 승한은 잠시 스마트폰을 벤치 옆에 놓아두었다. 지금부터는 최대한 걸리적거리는 물건은 치워둘 생각이었다.

10시 55분. 시간이 거의 다 됐다. 이제 잠시 후면 언제나처럼 괴물들이 나타나던 시간이었다. 이번에도 반드시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언제나처럼 검은 균열이 움직일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째깍-.

그렇게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11시다.”

윤재가 11시를 예고한 순간, 언제나처럼 시간이 찾아왔다.

츠즈즈즈즉-.

파스스스-.

검은 균열이 격동하기 시작했다. 기류를 사방으로 뿌리며 흔들리기 시작한 검은 균열은 정확히 11시가 되면서부터 반응을 시작했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승한과 윤재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상한 일이기에 더욱 짜증이 밀려왔다.

“……역시 시간이 멈추지 않는군.”

균열이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일어나던 현상. 시간이 멈추고, 다시 시간이 원래대로 움직이면서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오던 그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 또한 예상하고 있긴 했다. 이미 괴물이 나타나는 시기부터 틀어진 마당에 반드시 시간이 멈출 거라고는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막상 진짜로 시간이 멈추지 않자, 안타까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헌터들과 괴물의 싸움에는 싫든 좋든 불가피하게 주변에 피해가 생긴다. 탱크나 미사일과 같은 군용 무기와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피해가 완전히 없을 수는 없었다.

“뭐, 어쩔 수 있냐. 우리가 시간을 멈출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화르르르-.

윤재는 그렇게 말하며 레드 드래곤을 불러냈다. 허공에 붉은 화염이 이글거리더니 레드 드래곤이 기지개를 피며 나타났다.

승한은 듀란달을 꺼내들고 새로 타임 포인트를 주고 산 방패를 꺼내들었다. 3천 타임 포인트를 주고 산 방패는 마찬가지로 방어 능력에 관한 추가 능력 상승 효과가 붙어있었다.

“그럼 먼저 올라가 있으마.”

“몸 조심해요, 형.”

“그래.”

윤재를 레드 드래곤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마법사 계열에 가까운 능력을 가지고 있는 윤재는 먼 원거리에서 승한은 지원하는 게 더욱 적합했다. 애초에 윤재의 능력은 승한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니 괴물들이 나타나더라도 신경쓰지 않고 공격을 퍼부을 수도 있었다.

파즉, 지지지직-.

검은 균열은 계속해서 기류를 흘리고 있었다. 승한은 검은 균열이 흘리는 기류에 한 가지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역시 악마와 연관이 있어.’

워낙 흐릿한 터라 확신하지는 못했는데 기류를 통해 느껴지는 기운은 분명 듀리안과 루시퍼를 감싸고 있던 기운과 같은 것이었다. 하나하나를 따져보면 그 힘의 크기가 훨씬 작았지만, 검은 균열은 하나가 아니었다.

‘그리고 저건…….’

승한은 아무런 반응도 없는 거대한 균열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 작은 검은 균열들은 기류를 흘리며 반응을 하는데 비해 저 거대한 균열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승한은 그 점이 더 마음에 걸렸다.

“끝판왕이시라는 건가?”

승한은 거대한 균열에서 시선을 떼고는 다른 균열들을 둘러봤다.

당장 이 자리에 있는 검은 균열만 하더라도 수백 개는 넘었다. 그곳에서 나오는 괴물들이 어떤 것일지는 지금부터 확인해 보면 될 일이었다.

파즈즈=.

검은 균열이 흘려보내던 기류를 멈췄다. 그리고 곧 그 속에서 언제나처럼 무언가가 튀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아아아아-.

어어어어-.

구슬프고 괴로운 울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승한은 그 울음소리를 듣자마자 온 몸이 오싹해졌다. 그들의 비명소리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승한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울음소리에 이어서 균열 속에서 까만 게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승한은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어 듀란달을 들어올렸다.

그런데 그 순간, 균열 속에서 튀어나온 괴물의 정체를 확인한 승한의 몸이 얼어붙었다.

“……저게 뭐야?”

온 몸이 시커먼 괴물이었다. 마족처럼 사람을 닮았는데, 몸이 녹아내리기라도 한 듯 흐물거렸다.

녀석은 균열 사이로 팔과 함께 머리를 들이밀고 나타났다. 입을 통해 괴로운 비명소리를 내지르며 녹아내릴 듯 흐물흐물한 몸을 균열 속에서 꺼내었다.

사람.

괴물?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완전한 검은색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뿔을 가지고 있는 마족보다 훨씬 사람같기도, 혹은 괴물같기도 했다.

-아파…….

그들의 울음소리에 승한이 흠칫 놀랐다. 목소리 또렷하게 들렸다. 나르샤와 같은 마족처럼 음성이 직접 머릿속으로 ‘알게 되는’게 아닌, 승한이 아는 한국인의 목소리였다.

“……뭐?”

-살려줘… 아… 니……. 죽여…….

꾸물, 꾸물-.

검은 균열들 속으로 수백 명의 검은 인영들이 튀어 나왔다. 그것들은 괴로운 목소리를 내면서 팔을 뻗고, 몸을 늘어뜨렸다. 승한은 그것들이 뻗는 손길이 두려워 뒤로 주춤 물러났다.

‘이게… 대체 뭐야?’

괴물이 아니었다. 확실했다. 그들은 승한과 같은 사람이었고, 승한과 같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그것도 승한과 같은 세계를 살았던 사람들. 확실했다. 다른 세계를 살아가던 존재라면 승한과 같은 언어로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화르르르륵-.

콰아아아-!

그 순간, 위에서 거센 불길이 떨어졌다. 새하얀 불길은 순식간에 승한과 함께 그 주위 일대를 덮쳤다.

물론 승한은 그 불길에 피해를 입지 않았다. 윤재의 레드 드래곤이 쏘아낸 불길에 윤재의 백염이 녹아들어 악(惡)의 성향을 지닌 괴물들을 제외한 어떤 것에도 피해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정신 차려 인마!

승한의 머릿속으로 윤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재는 꽤나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승한의 모습이 보인 모양이었다. 하긴, 굳이 표정을 보지 않더라도 검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뒤로 주춤 물러나는 걸 보면 정신을 놓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죄, 죄송해요 형.”

승한은 얼떨결에 전음구를 꺼내지도 않고 대답했다. 하지만 곧 굳이 대답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는 다시금 검과 방패를 들어 올렸다.

‘정신 차리자.’

승한은 주위로 타오르는 백염 사이로 괴물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윤재의 레드 드래곤이 쏘아낸 불길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아아아아아-.

우으으으으-.

비명소리가 구슬프로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승한은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수록 속이 메스꺼워졌다. 대체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균열 속에서 등장한 만큼 베지 않을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쐐애애액-!

승한이 [백검]의 검격을 쏘아냈다. 주위로 나타난 검은 인영들은 승한의 검격에 조각조각 베어지며 바닥에 쓰러졌다.

철퍽-.

상체와 하체가 나누어진 검은 인영이 다시금 손을 뻗어왔다. 시커먼 몸과는 달리 하얗게 떠 있는 흰자위가 승한을 향해왔다.

-또… 죽여 줘…….

소름 돋는 말이었다. 검은 인영은 빠르게 손을 움직여 승한을 향해 다가왔다. 승한은 그들의 모습에 다시금 소름이 돋으며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촤악, 촤악-.

사아아악-!

연속해서 뻗어나간 검격이 검은 인영의 몸을 조각조각 나누었다. 그렇게 십 조각으로 나누어진 후에야 검은 인영 하나가 겨우 숨이 끊어졌다.

[6250타임 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역시나 지난번에 나타난 괴물이었던 마족의 5배에 달하는 타임 포인트를 획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나를 처리하는데 들인 공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그렇게 하나를 처리하고 다시금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아그작, 아그작-.

검은 인영의 시체를 향해 몰려든 다른 검은 인영들이 시체를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손으로 팔과 다리를 잡으며 눈을 파먹고, 머리를 먹어치웠다. 승한은 그 잔인하고 그로테스크한 모습을 눈살을 찌푸리며 바라봤다.

-배… 고파…….

-맛있어…….

“……진짜 가지가지 하는군.”

빠드득-.

승한의 이가 갈렸다. 사람이 사람을 먹어 치우는 광경을 보고 드는 생각은 구역질을 넘어 화가 치밀어 오를 지경이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저들이 이런 모습으로 변했을까 싶었는데, 결론은 하나밖에는 없었다.

악마.

검은 균열에서 느껴졌던 기운. 그리고 검은 인영들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 그것을 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저들을 만든 존재가 누구인지는.

콰득, 우드드득-.

쩝쩝-.

검은 인영들은 결국 승한이 죽인 검은 인영의 시체를 모두 씹어 먹었다. 그러고도 부족한지 승한을 향해 다시금 다가오며 손을 뻗기 시작했다.

검은 인영들이 승한을 중심으로 사방에서 다가왔다. 수십 조각으로 베지 않는 이상 죽지 않는 존재들이었다. 승한은 그들을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더 줘…….

“이젠 나까지 먹으려고?”

화르르륵-.

듀란달에 성화가 피어올랐다.

이런 녀석들을 상대로 굳이 아롤의 힘을 빌려올 필요도 없었다. 승한은 듀란달에 성화의 힘을 머금어 크게 휘둘렀다.

“성불해라, 이 마귀들아.”

화아악-!

성화의 검격이 사방으로 뿜어졌다. 황금색의 성화를 머금은 검격이 덮쳐오자 검은 인영들은 뜨거움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성검 듀란달과 성화. 두 힘의 조합은 검은 인영들의 몸을 순식간에 불태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 번의 검격으로 모든 검은 인영들을 불태우는 건 무리였다.

아그작-.

또 다시 불타지 않은 다른 시체들을 검은 인영들이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커진다?’

검은 인영들은 자신과 마찬가지인 다른 검은 인영들을 먹어치우며 덩치가 불려가고 있었다. 마치 자신들과 같은 거미들을 먹어치우며 색을 보라색에 가깝게 만들던 거미 괴물들과 비슷했다.

‘……이번에도 이런 형식의 괴물인가?’

오히려 거미들과 비슷한 성질을 가진 괴물이라는 점에서 승한은 반가움을 느꼈다.

인간과 닮은, 어쩌면 한 때는 인간이었을지도 모르는 괴물. 그들을 상대하면서 승한은 지금까지 만난 괴물들과는 너무나 다른 느낌에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들 역시도 한낱 괴물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낀 순간, 승한은 두려움이 사라졌다.

“니들도 역시 그냥 괴물이라 이거지?”

와작-.

시체를 씹어 먹던 검은 인영이 고개를 들어 승한을 바라봤다. 녀석들의 새하얀 흰자위가 승한을 노려봤다. 마치 새로운 먹이를 찾은 것처럼. 승한은 다시금 검을 들어 성화를 담은 검격을 날렸다.

화르르륵-.

그 순간, 검은 인영들이 성화의 검격을 피해 뛰어 올랐다. 죽여달라고 울부짖는 존재라 하더라도 생존에 대한 본능은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혹은, 승한을 씹어 먹겠다는 식욕이 더 강하던가.

“어딜 뛰어 올라?”

쿠구구구-.

승한의 손짓에 따라 검은 인영들의 몸이 아래로 떨어졌다. [올림포스]의 힘에 의해 바닥에 처박힌 검은 인영들은 몸이 짓눌려 터져나갔다.

터지고 녹아내린 몸뚱이를 향해 승한이 성화를 쏘아냈다. 기름에 붙은 불처럼 성화가 타올랐다. 일일이 검으로 베어내는 것보다는 성화를 사용해 태워내는 것이 검은 인영들을 상대로는 훨씬 손쉬웠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싸우다가는 금방 힘이 빠질 거라는 건데…….’

검은 인영들의 수는 많았다.

분명 그리 강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맥이 빠질 정도고 약했다. 내세울 만한 건 몸이 수십 조각으로 베어져도 살아남는 질긴 생명력 뿐, 그밖에 방어력이나 움직임은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다.

마족과 비교해도 오히려 약하다 생각될 정도. 하지만 역시 문제는 그 질긴 생명력이었다. 장기적으로 길게 싸워야 하는 승한에게는 이게 가장 까다로웠다.

“어?”

듀란달을 휘두르며 계속해서 검은 인영들을 베어가던 승한은 한 가지 놓치고 있던 사실을 깨닫고는 눈을 번쩍였다.

“……균열이?”

이전같았으면 진작에 사라졌어야 할 검은 균열이 아직까지 그대로 남아있었다.

============================ 작품 후기 ============================

완쾌는 아닙니다만..

목감기 빼고 몸살은 꽤 많이 호전되었습니다.

다시 정상 연재로 돌아왔습니다. 내리 이틀 동안 누워있었더니 반갑네요 ㅎㅎ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