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타임-143화 (143/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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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죽은자

거대한 검은 균열은 단순히 기류를 흘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살아 움직이기라도 하듯 요동쳤다.

‘작아진다?’

거대한 균열이 요동치며 작아지고 있었다. 기류를 사방으로 흩뿌리며 움직이는 거대한 균열을 향해 검은 인영들이 절을 올렸다.

승한은 그 모습을 긴장해서 지켜보았다. 저 안에서 무엇이 나오게 될지는 모르지만, 어떤 존재이든 승한이 아니면 막을 만한 헌터가 없을 것이다.

‘나온다.’

거대한 균열은 어느새 다른 검은 균열들과 큰 차이가 없을 만큼 작아져 있었다. 드래곤이라도 나올 것처럼 거대했던 균열은 5미터 정도로 작아졌다.

결국 그 안에서 처음 나오기 시작한 것은 거대한 뿔이었다. 마족들처럼 손가락 크기 정도의 작은 뿔이 아닌, 이야기 속 악마나 가지고 있을 법한 거대한 뿔을 가진 존재였다.

뿔의 크기만 해도 대략 1미터. 하지만 그 거대한 뿔을 가진 존재는 예상 외로 평범했다. 창백할 만큼 시퍼런 피부를 가지고, 중요한 부위를 가린 한 장의 붉은 천 옷이 전부인 남자.

승한은 그를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마족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힘의 정체가 듀리안과 루시퍼에게서 느껴지던 힘과 흡사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악마?’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마족보다는 악마에 더욱 가까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역시 이것 역시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 존재는 허공에 부유한 채 주위를 바라봤다. 자신을 경배하고 있는 검은 인영들과 승한, 그리고 그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내려다보던 그는 팔을 크게 벌리고 중얼거렸다.

“반갑다, 세상아.”

처음 거대한 균열에 비하면 작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의 덩치는 그리 작지는 않았다. 4미터는 됨직한 거대한 키에 1미터 정도의 뿔, 그리고 기다란 팔과 다리.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은 승한이 지금껏 만나본 그 어떤 존재들보다도 거대했다.

“……별 그지 같은 게 다 나왔군.”

승한의 목소리를 들었을까? 거대한 뿔을 가진 악마의 시선이 승한에게로 향했다. 그는 씩 웃으며 승한이 있는 곳으로 내려왔다.

검은 인영들이 그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었다. 왕을 떠받드는 신하처럼, 혹은 호랑이가 내려온 숲의 작은 초식 동물들처럼. 그리고 그 존재는 검은 인영들이 자신을 위해 길을 비키는 것을 아주 당연스럼게 여겼다.

“너구나?”

그는 창백한 얼굴로 씩 웃어보이며 승한을 바라봤다. 승한은 그와 마주보며 대답했다.

“날 아나?”

“그럼. 너 때문에 내가 여기로 왔는데. 반가워. 그리고 고맙다고 해야 하나? 덕분에 저 그지 같은 곳에서 나올 수 있었어.”

어딘가에 갇혀 있기라도 했던 걸까? 그는 알 수 없는 말을 내뱉고 있었다. 호기심은 들었지만 승한은 그와 길게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그를 쓰러뜨려야 한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말 한번 많군.”

“조금도 대화할 생각이 없는 건가? 아쉬운데. 난 이렇게 떠드는 게 오래간만이라서 말이야. 궁금하거든. 네가 누구기에 그들이 날 보내면서까지 널 죽이려고 하는지. 킥킥.”

그의 말에 승한은 호기심이 동했다.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궁금한 게 많았다.

“그들이 누구지?”

“모르고 있나? 날 만든 놈들인데.”

“……만들었다고? 악마를?”

승한은 악마들이 또 다른 악마를 만들었다는 생각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악마라는 존재를 다른 악마가 만들어 낼 수도 있나 싶어서였다.

“악마? 아,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군. 이것 때문에.”

그는 자신의 머리에 있는 거대한 뿔을 손으로 매만졌다. 승한의 시선이 자신의 뿔로 향해있는 것을 본 그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나 악마 아니야.”

“아니면?”

“반(半) 악마라고 해야 하나? 악마라고 만들었는데, 악마는 아닌 존재지.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 하지만 역시 실패가 있는 이상, 성공은 아니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군.”

“말 그대로야. 절반만 악마인 마족. 그게 나야. 완전히 성공했으면 그들과 나란히 할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아니라서.”

승한은 그의 말에 반악마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었다.

마족이었지만 악마들에 의해 악마가 되어버린, 마족. 하지만 완전한 악마가 되지 못하고 절반만 악마가 되어버린 존재가 바로 그였다.

‘절반의 악마라…….’

다행히 승한의 걱정대로 진짜 악마가 나오지는 않았다. 듀리안이나 루시퍼는 완전하지 못한 상태로 알에서 부화한 터라 다행이었지만 완전한 상태의 악마가 나타난다면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악마가 몇 명이나 되는지, 얼마나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모든 악마들이 동일한 힘을 가지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악마들이 신들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완전한 악마를 승한이 감당할 수는 없었다.

‘반 악마라면… 상대할 수 있다.’

자신감을 찾은 승한은 듀란달을 꽉 움켜쥐었다. 처음 반악마가 나타났을 때와는 달리, 어느 정도 자신감을 찾은 것이었다.

“왜, 할 만하다 싶어?”

“……그래. 악마도 아니고, 반악마라면.”

“그래? 킬킬. 그래 보였어. 이거 신기하네. 인간이 마족도 아니고, 절반뿐이라고는 하지만 악마를 상대로 기죽지 않다니. 악마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건가?”

반악마는 자신의 머리 위에 돋아난 뿔을 툭툭 건드렸다.

“반 악마라는 건, 반신(半神)과 같은 의미라는 거야, 이 미개한 인간 새끼야.”

비슷한 말이긴 했지만 반악마와 반신은 어감은 확연히 달랐다. 정말로 악마라는 존재들이 신들과 동급의 존재라면, 반악마가 하는 말은 틀리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승한은 그렇다 해도 딱히 기가 죽는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반악마가 하는 말은 승한의 기를 죽여 놓기 위한 허세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말에 기죽을 만큼 승한은 담이 약하지 않았다.

‘그게 뭐?’

무엇보다 승한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신이라면 나도 만나 봤어.’

신과 같은 존재로 취급받는 천사들, 인간의 몸으로 신이 된 아롤, 그리스 신화속의 신들까지. 승한은 그들 모두를 만나보았고, 아포피스라는 대악마까지 만나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만나본 신들은 승한에게 힘을 주었다. 그 힘은 신들이 가진 힘의 정수요, 악마와 대적할 수 있는 힘이었다. 그런 힘을 가지고 악마도 아닌, 반악마 하나 잡지 못한다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너, 말이 너무 많아.”

승한은 생각보다 반악마라는 존재가 말이 많다고 생각했다. 어딘가에 갇혀 있었다더니, 아무래도 외로웠던 모양이었다.

“심심하냐?”

“……이거 요즘 인간들은 이렇게 건방지나?”

반악마가 웃기 시작했다. 검은 인영들이 더욱 고개를 조아렸고, 그의 몸에서 뿜어진 마기가 주위로 흩어졌다. 승한은 그의 몸에서 나오는 마기가 결코 듀리안이나 루시퍼에게 뒤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이상이었다. 단순히 마기를 뿌리는 정도만 해도 이 정도라면, 막상 붙었을 때 그 힘은 그보다 더 할 것이다.

‘……반악마 맞아?’

절반뿐인 악마라 약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역시 쉬운 건 없다는 생각에 승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 이게 내 인생이지 어쩔 수 있나?”

그래도 승한은 기죽지 않았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검은 인영들을 계속 사냥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획득한 타임 포인트가 꽤나 되었다.

[보유 타임 포인트 : 4496535p]

거의 천 마리에 가까운 검은 인영들을 사냥했다. 그리고 그 타임 포인트는 고스란히 승한이 가지고 있었다.

중간에 [불굴의 육체]의 레벨을 5레벨까지 올렸지만 그럼에도 이 정도 수치의 타임 포인트가 남아있었다. 그리고 이미 이 타임 포인트를 어디에 사용할지는 이미 정해놓은 상태였다.

[4096000타임 포인트를 소모하였습니다.]

[‘능력 - 성검’의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

역시나 이전처럼 승한은 [성검]의 레벨을 올리자 아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승한의 눈앞에 나타난 아롤이 처음 한 말은 이거였다.

“이런 등신아!”

덥석-.

아롤이 승한의 멱살을 잡았다. 가죽 갑옷이 아롤의 손 안에서 우겨졌다. 무시무시한 악력에 놀랄 사이도 없이 아롤은 구겨진 얼굴로 말했다.

“내가 한 말은 귓구멍으로 들었냐?”

“……네?”

“[강신]을 올렸어야지!”

승한은 아롤이 화를 내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롤은 천사나 다른 신들과는 달리, 어렵지 않게 자신이 화를 내는 이유를 바로 말해주었다.

잠깐 잠이 들었을 때, 아롤이 승한의 꿈속에서 말했던 것들. 그 꿈속에서 들었던 아롤의 말이 떠올랐다.

“……[강신]을요?”

“그래. 하아, 이 답답한 놈. 진짜 내가 한 말은 하나도 못 들었냐?”

“너무 흐릿해서 마지막 한 마디 말고는 들은 게 없었습니다.”

“마지막에 내가 뭐라고 했더라…….”

“‘나를 불러’라고 하셨습니다.”

승한의 대답에 아롤은 눈살을 찌푸리며 잡고 있던 멱살을 놓았다. 확실히 그 한 마디 가지고는 제대로 의사를 전달하기에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거밖에 못 들었다면 어쩔 수 없고.”

아롤이 잡고 있던 멱살을 놓자 승한은 아롤과 조금 떨어져서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무언가 불만에 가득 한 그의 모습을 보던 승한이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네가 그 많은 타임 포인트를 가지고 헛짓거리를 한 게 멍청해 보여서 그런다.”

“……제가 잘못 판단한 겁니까?”

“뭐, 꼭 그런 거라기보다는…….”

아롤은 승한의 손에 들려있는 듀란달을 보며 말했다.

“장기적으로 보면 나쁘지 않지. 장기적으로는.”

“……무슨 소립니까?”

“[성검]의 레벨을 올렸다는 건, 듀란달의 힘과 내 힘을 더 많이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그만큼 네 힘도 강해지겠지. [불굴의 육체]의 레벨을 올린 것과 같은 효과도 가질 수 있을 테고… 나쁘진 않아. [올림포스]나 [성화]의 레벨을 올린 것보다야 훨씬 나은 선택이지.”

아롤은 승한의 능력에 대해 훤히 꿰고 있었다. 승한은 그가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 알고, 그 이름을 말하자 깜짝 놀랐다.

“하지만 역시 지금은 [강신]의 레벨을 10레벨까지 올리는 게 맞았어. 그게 안전해.”

“역시 반악마 때문입니까?”

“그렇지. 반악마라고 해도, 악마라는 이름을 가진 녀석이니까.”

아롤은 아무래도 반악마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의 등장에 이렇게까지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반악마에 대해 아십니까?”

“싸워본 적은 있지. 죽을 뻔했고. 물론 이겼지만.”

‘역시.’

승한은 아롤이 반악마와 싸워보았고, 죽을 뻔했다는 이야기에 반악마가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인간의 몸으로 진짜 악마를 쓰러뜨렸던 아롤이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승한이 결코 우습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강신]이 그렇게까지 중요합니까? 당장 타임 포인트가 모였을 때 [성검]의 레벨을 올리는 게 나을 거라 생각했는데…….”

“당장 단기간에 강해지려면 [강신]이 [성검]보다는 낫지. 너 스스로 강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장 눈앞에 있는 반악마를 잡으려면 힘을 빌려오는 건 필수적이니까.”

“당신을 부르라는 이야기는 역시 [강신]으로 아롤님의 힘을 빌리라는 의미였습니까?”

“당연하지.”

역시 승한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니었다. 아무래도 아롤은 어떻게 해서든 승한이 자신의 힘을 더 많이 빌려오게 하려 한 모양이었다.

“[강신]을 통해서 아롤님의 힘을 얼마나 빌려올 수 있는 겁니까?”

승한의 물음에 아롤이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멈칫했다. 그는 시선을 살짝 내리고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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