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47 / 0223 ----------------------------------------------
23. 죽은자
‘정상은 아니군.’
반악마 역시 승한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온 몸이 시커멓게 타고, 검에 베어진 자리들이 군데군데 남아있었다. 상처가 커서 그런지, 아니면 성화의 효력 때문인지 재생도 되지 않고 있었다.
아니면 재생이라는 게 무한한 게 아니거나. 아무튼 승한에게는 희소식이었다. 이마저도 재생해버렸다면 더 이상 승한에게는 희망이 없을 테니 말이다.
“슬슬 너나 나나 죽어가는군.”
반악마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아니, 그것은 여유가 아니었다. 여유라기보다는 즐거운 미소였다.
승한은 반악마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따위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이 그의 본성인지, 아니면 수백 수천년 동안 악마가 되기 위한 과정을 거치며 생겨난 무식함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건 승한에게는 불리한 점이었다.
‘난 같이 죽을 생각이 없는데.’
자칫 잘못하다가는 반악마가 승한과 함께 죽겠다고 달려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럴 때 아마 승한은 죽지 않겠다고 발버둥 칠 것이고, 그런 점은 승한에게 불리한 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애초에 악마들의 목적이 바로 이것이었다. 반악마를 통해 승한을 죽이는 것. 그들이 반악마를 희생해서까지 승한을 죽이려 하는 것일지는 알 수 없지만, 승한의 입장에서는 그 무엇보다 자신의 목숨이 중요했다.
“난 안 죽어.”
승한은 듀란달의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지금의 승한은 다른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했다. 획득한 타임 포인트로 [성검]의 레벨이 하나 올랐을뿐만 아니라 [강신]을 통해 일시적으로 두 개의 능력이 오른 상태였다.
이 상태의 승한도 이기지 못한다면, 이 세계에 있는 그 누구도 반악마는 이길 수 없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괴물의 난이도가 너무 높아졌다.
‘만신창이인 건 나나 저 녀석이나 똑같다.’
녹아내리고 타버린 피부의 반악마와 갈비뼈와 왼쪽 팔이 으스러진 승한.
싸움에 지장은 승한이 더 많이 있었지만 반악마는 승한의 성화에 당해 제대로 움직이기도 힘든 상태였다. 반면 승한은 두 다리는 멀쩡했다.
‘회복하기 전에 움직여.’
아롤의 지시에 승한이 기다렸다는 듯 내달리기 시작했다. 빠르게 반악마의 정면으로 달려든 승한이 듀란달을 높이 들어올려 내리찍었다.
콰아아아-!
성화의 검격이 반악마를 위에서 내려쳤다. 성검 듀란달의 위력도, 성화의 위력도 만만치 않았다. 거기에 더해 반악마를 위협하는 힘은 또 있었다.
“……그들이 날 여기로 보낸 이유를 알겠군.”
꾸우우욱-.
반악마가 승한이 내려친 듀란달의 검신을 손으로 잡아챘다. 손아귀가 베어지고 타들어갔음에도 반악마는 그대로 검을 잡고 있었다.
“너 같은 놈이 있으니, 날 보냈겠지.”
“그럼 심심해서 보냈겠냐?”
“킥킥킥. 그 힘은 누구에게 받은 거지? 신들인가? 한둘이 아닌 모양인데…….”
“닥치고…….”
쿠구구구-.
“엎드리고 있어!”
승한은 반악마의 몸을 짓누르는 한편, 반악마의 손에 잡혀 있는 듀란달에 [올림포스]의 힘을 실었다. 그러자 몸이 무거워지고 밭치고 있던 검이 무거워진 반악마는 겨우 다른 한 손을 들어 듀란달에 베이지 않도록 몸을 지탱했다.
꾸구구국-.
승한은 거기에 자신의 힘을 더했다. 듀란달을 아래로 힘낏 짓누르며 단숨에 반악마의 몸을 반으로 베어내버릴 작정으로 힘을 주었다.
촤악-.
결국 반악마의 팔이 길게 베어졌다. 두꺼운 팔이 깊게 베어지며 뼈가 드러나 보였다. 아무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해도 고통을 모르는 건 아닌 듯, 반악마가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악!”
단순히 베인 것만이 아니라 그 상처 부위로 성화의 불길이 타올랐다. 상처 부위를 불로 지지는 고통, 아니 마기를 지닌 반악마에게는 그보다 더한 고통일 것이다.
“네놈!”
반악마가 승한을 향해 몸을 덮쳐왔다. 한쪽 팔이 베여서 성화에 타오르면서도 그는 자신의 상처를 도외시했다. 가까이 있던 승한은 서둘러 떨어지려 했지만, [올림포스]에 짓눌리는 와중에도 반악마의 움직임은 승한보다 한층 더 빨랐다.
콰악-.
반악마의 거대한 몸집이 승한을 위에서 짓눌러 감쌌다. 승한은 두 다리를 땅에 뿌리깊이 박고 쓰러지지 않으려 버텼다.
“크읍…….”
반악마는 승한을 짓누른 채 그의 몸을 으스러뜨릴 생각이었다. 반악마의 마기가 온 몸에서 퍼져나와 승한의 몸을 감쌌고, 그의 힘이 승한을 짓눌렀다.
화르르르륵-.
승한은 몸에서 성화를 피워 올렸다. 반악마의 몸이 들썩였다. 승한과 딱 달라붙어서 성화의 열기를 온 몸으로 받아들이는 게 버티기가 힘들긴 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반악마는 승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그의 몸을 짓누르며 저항했다. 마기를 온 몸으로 뿜어내며 오히려 승한의 성화를 잠식해나갔다.
‘다리가…….’
거대한 몸짓으로 짓누르니 다리가 금방이라도 풀릴 것만 같았다.
“같이 죽자고?”
“네가 먼저 죽을 수도 있지.”
대답을 봐서는 아무래도 같이 죽을 생각인 모양이었다. 성화와 마기, 두 힘을 서로 뿜어대며 누가 먼저 죽는지를 시험하고 있으니 말이다.
“난…….”
승한이 쥐고 있던 검을 역수로 쥐었다.
“그럴 생각 없거든.”
푸욱-!
겨드랑이 사이로 검을 찔러 넣으며 승한이 소리쳤다. 살육을 꿰뚫는 소리와 함께 승한의 검이 겨드랑이 사이를 뚫고 반악마의 가슴에 박혔다.
승한의 검은 정확하게 반악마의 심장을 관통했다. 싸움을 시작하고부터 처음으로 무방비한 상태로 가슴을 드러낸 게 바로 실수였다.
“커억!”
화르르륵-.
듀란달의 검신에 성화가 맺히기 시작했다. 성화는 검신을 타고 반악마의 가슴속으로, 심장 안을 헤집었다.
“크아아아아악!”
처음으로 반악마의 입에서 진짜 괴성이 터져 나왔다. 그의 몸에 힘이 풀리자 승한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어 그의 몸을 크게 베었다.
촤악-!
가슴에 커다란 검흔이 생겨났다. 승한은 가슴을 헤집으며 벤 검을 뽑지 않았다. 그대로 검을 박아놓은 채 손잡이를 잡고 반악마의 몸에 올라탔다.
사아아아악-!
반악마의 가슴이 크게 베어졌다. 가슴 한 가운데가 벌어진 자리로 승한이 손바닥을 가져갔다.
“이만 작별하자.”
승한의 손에서 성화의 구슬이 생겨나 튕겨져 나갔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주춤거리던 반악마의 가슴 속으로 성화의 구슬이 쏙, 하고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퍼퍼퍼퍼퍼펑-!
“크아아아아아아악!”
성화의 구슬이 반악마의 몸속에서 폭발했다.
**
“허억, 허억.”
반악마와 멀리 떨어진 승한이 바닥에 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황금색 열기 속에 휩싸인 반악마의 모습은 전혀 보이질 않았다. 짐작하기로는 몸속이 성화의 열기에 타들고 녹아내려 죽었을 것이다.
“제발… 이제 끝나라.”
반악마는 질겨도 너무 질겼다. 베어도베어도 죽지 않고, 아무리 성화로 몸을 태워도 타지 않았다. 듀리안이나 루시퍼와 같은 악마와도 싸워본 승한이었지만 저런 녀석은 처음이었다.
타닥, 타닥-.
타들어가는 불길 속에서 승한은 거대한 인영이 쓰러져가는 모습을 보았다. 지금껏 꼿꼿이 서 있던 반악마의 몸이 허물어진 것이다.
쿵-.
거대한 덩치와 힘만큼 반악마가 쓰러지자 땅이 울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승한은 반악마가 쓰러지자 가슴을 쓸어 넘겼다. 타임 포인트 획득 메시지는 들려오지 않았지만, 적어도 치명적인 상처임에는 확실했다.
‘하긴, 그런 상처에도 멀쩡하면 반칙이지.’
듀란달에 가슴이 꿰뚫리고 내장이 훤히 드러날 정도로 베이기까지 했다. 더군다나 그 속으로 성화를 응축한 구슬을 넣어 터뜨렸으니, 단숨에 즉사해도 이상할 게 전혀 없었다.
승한은 반악마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승한이 다가가자 타들어가던 성화가 조금씩 꺼져가며 반악마의 모습을 드러냈다.
“내…… 가…….”
“……아직 안 죽었냐.”
타임 포인트의 획득이 떠오르지 않아서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죽지 않은 모습을 확인하자 기가 찼다. 온 몸이 시커멓게 죽어있고, 가슴이 베어져 타들어간 내장을 쏟아내면서도 반악마는 죽지 않고 있었다.
녀석은 승한을 향해 손을 뻗어왔다. 하지만 이전과 같은 힘은 없었다. 승한은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팔을 발로 걷어찼다.
퍽-.
힘없이 떨어지는 팔을 보며 승한은 안도했다. 다행히 죽지 않았을 뿐,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승한은 마지막 확인사살을 할 셈으로 듀란달을 들어올렸다.
“아직도 살아 있는 건 반칙이잖아?”
푸욱-.
역수로 쥔 검을 그대로 머리를 향해 꽂아 넣었다. 조금씩 꿈틀거리던 손과 몸뚱이가 경련을 일으키더니 금세 축 처졌다.
[3125000타임 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타임 포인트 획득 메시지. 이것으로 승한은 반악마가 확실하게 죽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괴물의 죽음을 확인하는 데에는 이게 가장 정확했다.
“하아…….”
긴 한숨과 함께 승한이 듀란달을 뽑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주위에는 더 이상 검은 인영들이 남아있지 않았다. 반악마 때문인지 멀리 도망가있거나 그나마 가까이 있던 검은 인영들은 승한이 날린 성화에 휘말려 죽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수고하셨어요.’
붉은 천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롤과는 달리 [강신]을 통해 승한의 몸속으로 들어왔던 그녀는 마지막 순간에 승한을 격려하는데서 말을 그쳤다.
‘수고했다.’
‘두 분 다 감사합니다.’
승한은 속으로 아롤과 붉은 천사에게 감사를 전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반악마를 상대하는 건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다. 반악마는 승한이 홀로 상대하기 턱없이 어려운 상대였다.
아롤 덕분에 [성검]의 레벨이 오르고 그의 검술을 다룰 수 있지 않았다면, 붉은 천사 덕분에 성화의 레벨이 오르고 성화의 친화력이 오르지 않았다면 지금쯤 죽어있는 건 승한이었을 것이다. 승한은 7스테이지에서 얻은 능력이 다른 게 아니라 [강신]이었다는 게 다행으로 느껴졌다.
‘단기간에 강해지기엔 이 능력이 제일이겠어.’
만약 승한의 능력이 조금만 더 뛰어나서 제우스와 같은 신의 능력까지 [강신]을 통해 빌려올 수 있었다면 싸움이 조금 더 쉬웠을 것이다.
‘아직 끝난 거 아니야. 긴장 풀지 마라.’
그 때, 풀어지던 긴장감을 다잡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롤의 말에 승한은 미국에 나타났다는 또 하나의 균열을 떠올렸다.
‘……설마 하나가 또?’
‘어떤 녀석일지는 몰라도, 비슷한 놈이겠지.’
‘아롤, 지금은 조금 쉬어야 해요.’
아롤과 붉은 천사의 의견이 대립했다. 아롤은 쉬지 말고 움직이라고, 붉은 천사는 쉬어야 한다고 말했다.
아무튼 반악마와 같은 존재가 또 하나 있다는 것만은 분명한 모양이었다. 이제 겨우 하나를 처리한 승한은 머리가 아파왔다.
‘일단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시간이 됐어요.’
‘나도 마찬가지다. 알아서 나중에 불러.’
아롤과 붉은 천사가 작별을 고했다. 아무래도 [강신]의 효력이 다한 모양이었다.
[‘강신 - 아롤’의 힘이 사라집니다.]
[‘능력 - 성검’의 레벨이 1레벨 하락합니다.]
[‘강신 - 붉은 천사’의 힘이 사라집니다.]
[‘능력 - 성화’의 레벨이 1레벨 하락합니다.]
[성화의 친화력이 대폭 하락합니다.]
승한의 몸속에 들어와 있던 두 신의 영혼이 사라졌다. 승한은 몸속의 힘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축 늘어졌다.
쿠구구구구-.
그 때, 승한의 몸을 뒤덮는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잠시 긴장했던 승한은 익숙한 모습의 붉은 드래곤이 나타나자 긴장을 풀었다.
-승한아, 괜찮냐?
머릿속을 울리는 윤재의 목소리. 마지막 남아있던 긴장감마저 풀리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