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49 / 0223 ----------------------------------------------
23. 죽은자
-네?
“너와 더 이야기하기 싫다. 애초에 남보다 못한 사이로 끝났으니, 그냥 그렇게 남자고.”
-오, 오빠 그게 대체 무슨 말…….
“됐고, 네 부탁 따라서 움직일 생각 없으니까 그쪽 상황이 어떻고, 부탁을 들어주면 뭘 해줄 건지, 미국 정부 측의 입장은 어떻게 되는지, 한국 정부에 바로 연락 넣고, 거기 통해서 나에게 연락해라. 난 너와 따로 연락하고 싶은 생각 없으니까.”
-오빠!
“못알아들었어?”
승한은 다시 한 번 힘을 주어 말했다.
“꺼지라고.”
승한은 그렇게 말하고는 전음구를 주머니에 넣었다. 아직까지 주희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들렸지만 깔끔하게 무시했다. 더 이상 주희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정 급하면 다른 식으로 연락을 하겠지.’
이참에 주희와 얽힐 일을 여기서 깔끔하게 잘라두는 편이 나을 것이다. 미국에서도 정 급한 일이라면 승한이 주희에게 전한대로 따로 연락을 해 올 테고 말이다.
“어떻게 됐냐?”
옆에서 승한의 말을 듣고 있던 윤재가 물었다. 다소 까칠하고 욕설도 조금 섞였던 대화라 그런지 분위기가 좋지 않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그냥 정리했어요. 더 이상 연락할 일 없다고.”
“……그게 끝이야?”
“네. 더 이상 주희랑 할 말 없어요.”
“연락은 왜 한 건데?”
“미국에도 여기 나타난 괴물과 같은 괴물이 나타난 모양이에요. 그 녀석을 상대할 헌터로 저를 찝은 모양인데, 주희를 통해서 연락을 한 이유야 뻔하죠 뭐.”
승한은 고급 인력이었다. 한국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헌터. 그런 승한을 지명해서 고용하기 위해서는 허가가 잘 떨어지지 않을뿐더러 적잖은 비용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을 고려해 미국 측에서는 다시금 주희를 이용해 승한에게 연락을 해 온 것이다. 친분이 있는 헌터의 부탁이면 들어주지 않을까 해서 말이다.
“……그래도 걱정은 되네요. 어쨌거나 지원 요청을 한다는 건 상황이 좋지 못하다는 건데.”
“글세? 미국에 헌터가 얼마나 많은데, 괜찮지 않을까? 너에게 연락을 한 건 단순히 자국 헌터들의 피해를 줄이려고 그런 거겠지.”
반악마에 대해 알지 못하는 윤재는 속편하게 이야기했다. 반면, 반악마와 직접 싸워보았던 승한은 그리 덤덤하게 말할 수 없었다.
“……그런 걸까요?”
**
툭-.
승한과 더 이상 연락이 되지 않자 주희는 결국 전음구를 손에서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전음구를 떨어뜨리자, 그녀의 옆에 있던 중년의 미국인이 물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그는 유창한 한국어로 물었다. 한국에서 온 헌터들을 관리하는 그는 지금 이 순간 주희에게 모든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녀는 미국 관계자들 중 한국에 있는 승한과 서로 안면이 있는 유일한 헌터였다.
“……실패했어요.”
“왜입니까?”
“말 했잖아요? 이 오빠와는 이미 말없이 미국으로 온 순간부터 끝났다고요. 윤재오빠면 모를까, 승한오빠는 원래부터 저와 그렇게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어요.”
주희의 대답에 미국 관계자의 표정이 암담해졌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대로 된 절차를 통해서… 한국 정부에 지원을 요청해야겠죠. 승한씨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도 피해가…….”
“안 된다는 걸 어떻게 해요? 시도 해 봤고, 실패했어요. 제 역할은 이제 끝난 거 아닌가요?”
주희의 말에 미국 관계자는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 그녀의 말은 분명 사실이었다.
주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승한이나 윤재와의 관계가 끝났다고 말해왔었다. 그럼에도 미국은 그녀에게 어떻게든 승한을 끌어들여줄 것을 부탁했다. 단 1퍼센트라도 가능성이 있는 이상 시도를 해 보는 게 어떻겠냐는 입장에서였다.
하지만 승한을 미국으로 귀화시키는 것과, 단순한 지원을 바라는 이 시점은 분명 달랐다. ‘있으면 좋은’때와는 달리 지금 이 순간 승한은 ‘반드시’ 필요했다.
“……하는 수 없지요. 억만금을 들여서라도 김승한 헌터의 지원을 받는 수밖에요.”
“그런데 정말 승한 오빠가 그 괴물을 잡을 수 있을까요?”
“한국에도 L.A에 나타난 것과 같은 균열이 나타났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김승한 헌터가 살아있다는 것은, 이미 그 괴물을 잡았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승한은 이미 한국에서도 보스를 잡기로 유명한 헌터였다. 한국에 보스가 나타날 확률이 높은 균열이 있다면 십중팔구 승한이 그 균열을 맡았을 확률이 높았다.
그런데 승한은 아무런 일 없이 주희의 연락을 받았다. 그렇다는 것은 보스를 이미 잡았을 확률이 높다는 뜻이었다.
“설마 혼자서 그걸 잡았으려고요?”
“확실한 건 모르지만, 그럴 확률이 높다는 뜻입니다. 아무튼간에 그의 도움이 없다면 미국 헌터들은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당장 그 악마에게 죽은 헌터들만 하더라도 벌써 두 자리 수가 넘어가질 않았습니까? 아니, 사실상 그의 도움 없이 녀석을 잡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죠.”
거기까지 말한 미국 관계자는 한숨과 함께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주희를 통해 승한의 도움을 얻는 방법을 실패했으니, 이제는 다른 방법밖에는 없었다.
직접 한국 정부에 지원을 요청하는 것. 그리고 그 도움을 받은 헌터로 직접적으로 승한을 지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
승한은 제대로 싸울 수 없는 상태였다. 왼 팔이 으스러지고 갈비뼈 몇 개가 나간 상태에서는 아무리 튼튼한 헌터라 해도 멀쩡히 움직인다는 건 불가능했다.
윤재는 헌터들 중 인맥이 넓은 안석환을 통해 치료가 가능한 헌터를 찾았다. 다행히 가까운 곳에 치료 능력이 있는 헌터가 있긴 했다. 바로 안석환과 함께 움직이고 있는 헌터인 김지은이었다.
평촌 지역에 나타난 괴물들을 금세 정리한 안석환과 지은은 승한의 치료를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승한은 인근에 있는 작은 병원의 침상을 찾아 누웠다. 치료를 위해 침상에 드러누운 승한의 부상을 살피던 지은은 고개를 저었다.
“크게 다치셨네요. 그렇게 빨리 회복은 힘들 것 같아요.”
“얼마나 걸릴까요?”
“하루 정도는 걸리겠죠. 갈비뼈는 잘 모르겠는데, 왼쪽 팔은 아예 으스러졌어요. 능력이 아니라면 아예 치료가 불가능할 정도로요.”
빨리는 힘들 것 같다고 말했지만 하루 정도만 하더라도 대단한 거싱었다. 아니, 사실상 가루가 됐을 정도로 부러진 뼈를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다는 것만 해도 현대 의학기술 이상 가는 능력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승한과 윤재는 안타까움을 감출 수 없었다. 다른 때는 몰라도 지금 이 시기에 승한의 부재는 적잖은 타격이었다. 승한 한 사람이 헌터 수십 명과 같은 역할을 할 정도이니 말이다.
“조금 더 빨리는 안 되겠습니까?”
“죄송해요. 제 능력은 치료보다는 회복에 더 치중이 된 능력이에요. 치료에 집중된 능력을 가진 헌터는 아마 찾기 어려울거에요.”
회복과 치료는 엄연히 다르다. 외상과 내상을 치료하는 능력과는 달리, 지은의 능력은 체력과 힘을 회복시키는 쪽에 가까웠다. 그 능력이 치료에도 영향을 미칠 뿐, 엄연히 그녀의 능력은 치료와는 거리가 있었다.
‘결국 하루를 기다릴 수밖에 없나.’
그나마 치료가 어느 정도 가능한 헌터를 찾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승한은 지은에게 치료를 부탁했다.
그 순간이었다.
“승한씨, 미국 정부에서 지원을 부탁한답니다.”
안석환이 병원 안으로 들어오며 다급히 말했다. 막 치료를 시작하려던 지은이 안석환을 돌아봤다.
“지원이라뇨? 미국에서요?”
“네. 아무래도 그쪽에서 나타난 거대한 균열을 감당하기가 어려운 모양입니다. 빠른 이동이 가능한 헌터를 지원해줄 테니, 바로 미국으로 넘어와 달라는 요청입니다.”
빠른 이동이 가능한 헌터라면 아마도 순간이동 계열의 능력을 가진 헌터일 가능성이 높았다. 극히 드문 능력이었지만 미국 쪽에 순간이동 능력이 가능한 헌터가 더러 있었다.
“지금 승한씨 상태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요?”
“저도 부상 때문에 당장은 지원이 힘들다고 말했습니다만… 미국 측에 빠른 치료가 가능한 헌터가 있다고 합니다. 그분은 승한씨와도 안면이 있는 헌타라고 하더군요.”
주희의 이야기였다. 승한은 안석환의 말에 미국 정부가 자신의 말대로 절차를 걸쳐 승한에게 지원을 요청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 연락이 안석환을 통해 닿은 것이다.
“보상은요?”
“이미 한국 정부와는 이야기가 끝난 모양입니다. 한국에서 보스를 쓰러뜨렸을 때 주어지는 보상의 열 배를 승한씨에게 개인적으로 지급하고, 한국 정부에도 따로 보상을 할 것 같습니다.”
“열 배라…….”
그 정도면 적절하다 싶었다. 아니, 그보다는 아마 한국 정부와의 거래가 진짜일 것이다. 급한 쪽은 미국일 테니 아마도 승한의 도움을 구하는 대가로 여러 가지 이권을 양보했을 것이다.
‘주희라면 이 정도 상처는 금방 치료하겠지.’
주희의 능력은 헌터들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치료와 회복, 보호에 특화되어 있었다. 이미 그녀는 오래 전부터 치료에 관한 능력을 입증해 보였다.
아마 지금에 와서는 그 능력의 레벨도 꽤 높아졌을 것이다. 승한의 상처가 크다고 한들 하루가 아니라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치료할 테니 부상은 문제가 없다.
‘결국 그 녀석을 보긴 봐야 하는 건가?’
별로 달갑지 않은 얼굴을 봐야 한다는 점이 내키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몰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렇게까지 승한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건, 그만큼 상황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니까.
승한이 주희의 연락에 소통을 거부한 이유는 미국 정부 측에서 주희와의 관계와 승한의 관계를 가지고 승한을 대가 없이 움직이려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굳이 승한도 미국 전체와 얼굴을 붉힐 생각은 없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안석환은 지은이 아닌 승한을 보며 물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승한의 의견에 따를 생각이었다. 아니, 은연중에는 승한이 부상을 털고 일어나 미국에 가서 멋지게 보스를 쓰러뜨려주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는 승한은 스타로 만들려고 한다. 이 시대에서 헌터들 중의 스타는 일반인들에게도 스타나 마찬가지였다. 즉, 영웅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은 바로 승한을 영웅으로 만들기에 아주 적절한 무대였다. 안석환이 굳이 승한이 부상을 입은 것을 알면서도 승한에게 이런 이야기를 바로 전해온 것은 그 때문이었다.
“가겠습니다.”
승한의 말에 안석환의 표정이 환해졌다. 반면, 이제 막 치료를 시작하려던 지은과 승한의 부상을 걱정하던 윤재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괜찮겠어?”
“걱정 마요. 치료는 해 준다잖아요. 주희 능력이면 금방 나을 거예요.”
다른 건 몰라도 치료 하나만큼은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능력을 가진 주희였다. 승한은 잠시 개인적인 감정을 접어버릴 생각이었다.
‘안 그러면, 다 죽을지도 모르지.’
반악마와 같은 존재가 또 있다고 생각하면 그럴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한 존재가 나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직까지는 그 어떠한 것도 속단할 수는 없었다.
“그럼 미국 관계자에게는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승한씨는 가능한 빨리 준비해 주십시오.”
“나도 가겠습니다.”
윤재가 자원해서 나섰다. 그는 미국에서 원하지는 않았지만 승한을 그냥 혼자 보내는 게 영 마음이 놓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누가 더 강하느냐를 떠나 윤재는 승한을 동생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말해두겠습니다.”
그렇게 승한과 윤재의 미국행이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