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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죽은자
안석환은 승한과의 이야기를 끝마치자마자 곧장 미국에 연락을 넣었다. 정확히는 미국 헌터들을 책임지고 있는 정부 관계자의 번호로 직접 전화를 건 것이다.
미국 정부 관계자는 안석환의 연락을 받고 곧장 헌터를 파견했다. 그는 눈 깜짝할 사이 승한과 윤재가 있는 병원으로 나타났다.
“누가 김승한 헌터입니까?”
훤칠한 키의 백인 남성은 어눌하긴 하지만 한국말을 할 수 있었다. 억양이 조금 강하긴 해도 충분히 알아들을 만한 수준의 말투였는데, 안석환은 그가 미국에서 온 헌터임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여기 누워 계신 분입니다.”
안석환의 안내에 백인의 헌터가 승한의 앞으로 다가왔다. 승한은 자신의 앞으로 성큼 걸어온 백인 헌터를 바라봤다. 승한도 꽤나 키가 큰 편에 속했는데, 백인의 헌터는 승한보다 족히 한 뼘은 더 큰 키를 가지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전 미국 정부에 속해있는 헌터 해리스라고 합니다.”
“김승한이라고합니다.”
미국에서 단숨에 한국으로 넘어왔다. 몇 분도 아니고,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말이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제 능력은 저와 신체적으로 접촉한 사람에게 이동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일전에 여기 계신 안석환씨와 악수를 나눈 적이 있어서 멀리 돌아올 필요가 없었습니다.”
해리슨은 옆에 있는 안석환을 힐끗 보며 대답했다. 안석환 역시 해리슨과 안면은 있었지만 그의 정확한 능력까지는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의 설명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미국에서 한국까지 한 순간에 오다니… 대단한 능력이군요.”
말로는 들었지만 새삼 공간이동 능력을 가진 헌터를 바로 눈앞에서 보니 대단하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물론 그것도 해리슨이 가진 능력의 레벨이 꽤 높기 때문일 것이다. 어디까지나 능력의 한계는 능력의 레벨이 결정 짓는 것이니 말이다.
“해리슨씨, 당신이 저희를 미국으로 데려다 주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어떻게요? 아무래도 해리슨씨의 능력은 다른 사람까지 같이 이동할 수는 없을 것처럼 보이는데…….”
승한은 해리슨이 가진 능력에 의구심이 들었다. ‘자신과 접촉한 상대가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다’는 능력은 어딜 봐도 다른 사람까지 함께 이동할 수 있는 능력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이건 각성 전의 능력일 뿐, 각성 후의 능력은 다릅니다. 잘 보십시오.”
해리슨은 허공에 대고 손을 문질렀다. 그러자 아무 것도 없던 허공이 물결처럼 일렁이더니 해리슨의 손이 쑥 들어갔다.
우우우우우웅-.
해리슨이 힘을 주자 공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괴물들이 나타나는 균열과 닮았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괴물이 나타나는 균열과 같은 불길한 느낌은 없었다.
공간을 틀었다. 승한은 해리슨의 능력이 가진 정체를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것은 공간과 공간을 접어 하나로 연결시킨 일종의 통로였다.
“이곳을 타고 가시면 미국으로 가실 수 있습니다. 김승한 헌터, 따라오시죠.”
해리슨이 승한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정부 소속의 헌터라고 하더니 아무래도 어떤 교육을 받거나 예전부터 높은 사람을 대하는 일을 해오던 사람인 모양이었다. 승한을 해리슨의 윗사람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헌터들의 입장에서 승한의 입지는 해리슨이라는 헌터 한 명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었다.
“저도 같이 갑니다.”
윤재의 말에 해리슨의 시선이 그에게로 옮겨졌다. 승한 외에 다른 헌터가 미국으로 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지만 그는 반대하지 않았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전 김승한 헌터만 데리고 가면 됩니다.”
헌터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것이 바로 미국의 입장이었다. 승한이라는 헌터가 반드시 필요하긴 했지만 그 외에 다른 헌터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썩 괜찮은 일이었다.
승한은 제대로 치료를 다 받지 못한 상태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미국으로 넘어가면 또 다른 헌터나 주희에게 치료를 받겠지만 말이다.
“먼저 들어가시죠. 제가 들어가면 이 공간은 사라지게 됩니다.”
해리슨의 안내에 승한이 가장 먼저 발을 들였다. 균열처럼 벌어진 공간 속으로 발을 들이자 마치 발이 사라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쪽 발과 함께 머리를 앞으로 들이밀고 안으로 들어가자, 승한의 눈앞이 핑 돌았다. 난생 처음으로 공간이동을 한 기분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시끄럽고 복잡한 놀이기구를 빠르게 타고 내려온 듯한 느낌이었는데, 속이 조금 메스껍기도 했다.
어지럽게 돌아가던 눈앞의 세상이 다시 안정을 찾았다. 그러자 승한의 눈앞으로는 전혀 다른 세상이 나타나 있었다.
“여긴…….”
“어서 와요, 오빠. 기다렸어요.”
승한의 앞으로는 별로 달갑지 않은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만 하더라도 좋지 못한 대화를 나눴던 주희였다.
승한의 뒤로는 윤재가 균열을 비집고 나왔다. 그 또한 주희를 발견하고는 표정을 굳혔다. 주희의 옆으로는 몇 명의 사람들이 더 있었는데, 승한과 윤재는 그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날 치료한다던 헌터가 너야?”
“네. 그렇게 됐어요. 그게 아니었으면 가능한 오빠 앞에는 나타나지 않으려 했는데 말이죠.”
주희도 승한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게 썩 내키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런 말을 듣고서 이렇게 뻔뻔히 나타난다는 건 어지간히 얼굴이 두껍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승한은 부상을 입었고, 그를 치료할 만한 헌터가 필요했다. 그리고 거기에 가장 적합한 헌터가 바로 주희였다. 그녀만큼 치료 능력이 뛰어난 헌터를 찾으려면 전 세계를 다 뒤져야 할 것이다.
“해리슨 귀환 완료했습니다.”
그 때, 균열 속에서 마지막으로 해리슨이 모습을 드러냈다. 승한과 윤재에 이어 한국에서 돌아온 해리슨은 주희를 비롯한 다른 이들에게 짧게 경례를 하고는 잠시 비틀거렸다.
“괜찮아요?”
승한이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해리슨의 팔을 잡아 그를 부축했다. 곧이어 다른 사람들이 다가와 해리슨을 부축하기 시작했다.
“괜찮습니다. 능력을 사용한 대가가 조금 커서 그렇습니다. 이 능력은 힘을 꽤 많이 사용하거든요.”
“거리가 멀어서 그런 것 아닙니까?”
“하하, 그것도 그렇고 사람도 세 명이나 온 것도 그렇고 이래저래 피곤할 만도 합니다. 그럼 전 이만 쉬겠습니다.”
미국과 한국, 지구의 정 반대편에 있는 두 나라를 왕복했다. 더군다나 공간을 접어 승한과 윤재를 단숨에 미국으로 데리고 오기까지 했다. 힘의 소모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두 명의 사람이 해리슨의 몸을 부축하고 밖으로 나갔다. 승한은 그 때서야 자신과 윤재가 와 있는 방을 둘러보았다.
“크흠. 해리슨 대원의 상태가 썩 좋지 않은 것 같군요. 아무튼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승한씨.”
주희의 옆에 있던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홀쭉한 중년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바로 옆에 있는 주희가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있는 것만 봐도 그가 이들 중 가장 위치가 높다는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당연한 보상을 약속받고 온 것뿐입니다. 고마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군요. 아 참, 제 소개가 늦었습니다. 전 미국에서 정부 소속 헌터들을 총괄 담당하고 있는 아담 크루먼이라고 합니다.”
정부 소속의 헌터들을 총괄하고 있다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해리슨은 미국 정부에 소속된 헌터들 중 한 명인 모양이었다. 승한은 해리슨도 그렇고 크루먼까지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크루먼의 발음은 거의 한국인과 크게 다를 바가 없을 정도였다.
“한국말을 꽤 잘 하시는군요.”
“한, 중, 일어는 완벽하게 할 줄 알죠. 이전에는 외교에 관련된 일을 했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더 깊이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그건 나중 일로 미뤄야 할 것 같군요.”
크루먼은 이야기의 방향을 급하게 틀었다. 아무래도 이렇게 가만히 서서 이야기를 할 시간이 없는 모양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피해는 커지고 있습니다. 김승한 헌터를 이곳까지 급하게 모시고 온 이유는 다름이 아닙니다. 승한씨가 해 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 보다 이거…….”
크루먼이 급하게 나오자 승한은 오른손으로 자신의 왼 팔을 가리키며 말했다.
“치료부터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만.”
“……그렇군요. 이주희 헌터를 데리고 온 이유를 잊어버리다니, 제가 너무 급했습니다.”
승한의 팔은 겉으로 보기에는 큰 부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피는 이미 다 닦아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속을 살펴보면 이미 팔 전체가 으스러져 있었다. 사실 승한은 지금 이 순간에도 왼팔에서 적잖은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말을 한 마디 내뱉을 때마다 부러진 갈비뼈가 폐부를 찔렀다. 그럼에도 승한이 이렇게까지 멀쩡히 말하고 움직일 수 있는 이유는 5레벨에 달하는 [불굴의 육체] 덕분이었다.
“부상의 정도가 심하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래도 치료가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크루먼은 주희의 치료 능력을 꽤나 믿는 듯했다. 하긴, 그것은 승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10레벨이 되기 전에도 부러진 뼈 정도는 단숨에 붙여놓을 수 있었던 그녀의 능력이라면 이 정도 상처는 순식간에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멀리 갈 필요 없이 이 자리에서 진행하도록 하죠.”
크루먼의 말에 주희가 승한에게 다가갔다. 원탁 하나와 의자 몇 개가 전부라고 할 수 있는 텅 빈 방 안에서 치료라니, 아무리 급해도 형식을 완전히 무시한 절차였다. 그만큼 크루먼을 비롯해 미국의 상황이 급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뭐, 어차피 의료 시설이 필요한 건 아니니.’
승한은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굳이 움직여서 침상이나 다른 의료시설이 갖춰져 있는 곳으로 가서 치료를 받는 것보다는 이게 훨씬 편했다. 굳이 아픈 왼 팔을 흔들며 움직일 필요도 없고 말이다.
한 남자가 크루먼의 지시를 따라 승한의 뒤로 의자를 가져왔다. 승한은 무릎을 낮춰 편안하게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주희가 승한의 왼쪽으로 돌아와 승한의 팔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럼 시작할게요.”
지이이이잉-.
승한의 팔을 중심으로 작은 원이 생겨났다. 그 원은 점차 크기를 키워가더니 승한의 왼 팔 전체를 감쌌다.
‘처음 보는 능력인데?’
승한은 주희의 능력에 대해서는 꽤나 알고 있었다. 1스테이지부터 5스테이지까지, 승한이 알고 있는 주희의 능력은 총 다섯 가지였다.
그 다섯 가지의 능력 중 몇 가지나 10레벨을 달성했을지는 알 수 없었다. 필요가 없다 싶은 능력은 레벨을 올리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모든 능력을 10레벨까지 올렸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10레벨을 달성하고 각성한 능력이 아닌, 6스테이지나 7스테이지의 능력일지도 모른다.
승한은 주희가 사용하고 있는 능력이 무엇일지 조금 더 지켜보았다. 어쨌거나 지금 당장 사용하는 능력이라면 치료와 관련된 능력일 것이니 말이다.
“…….”
시간이 잠시 지나도 어떠한 느낌도 들지 않았다. 어떠한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떠한 능력이든 능력을 사용하게 되면 어떤 성질이든 힘이 느껴지곤 했는데 말이다.
“……어?”
그 순간, 승한은 왼 팔에서 느껴지던 통증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으스러졌던 뼈가 원래의 자리를 찾았고, 통증이 완화되었다. 조금씩 나 있던 작은 생채기마저도 사라져갔다.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는데 말이다. 승한은 조금 더 자세히 상처가 치료되는 것을 바라보았다.
응고되었던 작은 핏방울이 액체가 되어 흘렀다. 다시금 피가 승한의 상처 속으로 스며들어가고, 벌어졌던 상처가 아물었다.
상처 입은 왼 팔의 시간이 과거로 돌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