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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죽은자
‘……신기한 능력인데. 예전에 있던 능력의 각성 형태인가?’
보통 치료란 상처 부위를 빠르게 회복시키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부러진 뼈가 붙는 것도, 벌어진 상처가 아무는 것도 모두 마찬가지다.
하지만 주희의 능력은 그와는 반대로 상처를 과거로 돌리고 있었다. 즉, 상처를 입지 않았던 때의 모습으로 승한의 왼 팔을 ‘돌려놓고’있는 것이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승한의 왼 팔은 완전히 회복이 되었다. 으스러졌던 뼈가 원래의 모습을 찾았고, 조금씩 있던 생채기마저도 모두 아물었다. 주희가 승한의 팔에서 손을 떼자 승한은 조금씩 왼 팔을 움직여보았다.
왼 팔에서 느껴지던 통증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한 시간도 아니고, 불과 몇 분 만에 왼 팔의 부상이 치료되었다. 주희는 승한의 왼 팔에 이어 가슴 쪽으로 손을 가져다 대었다.
다시 한 번 같은 과정이 반복되었다. 부러진 가슴 쪽의 갈비뼈가 다시 붙었다. 이렇게까지 빠르게 상처가 치료되는 건 아무리 헌터의 능력이라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끝났어요.”
치료가 끝나자 주희는 승한에게서 손을 떼고는 말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숨을 들이마쉴 때 조금 답답함이 있었는데, 어느새 그것도 말끔히 사라졌다. 왼 팔과 가슴쪽의 상처가 완전히 치료된 것이다.
“……빠르네. 확실하고.”
“그녀는 미국에서 최고의 치료 능력을 가진 헌터입니다. 괴물들과의 싸움으로 상처를 입은 헌터들이 그녀에게 줄곧 치료를 부탁하곤 하죠.”
크루먼은 주희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았다. 확실히 주희의 능력은 헌터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유용한 능력이었다.
“상처를 입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이라… 치료 능력의 각성 형태인가?”
“맞아요. 정확히는 상처를 입기 전만이 아니라 그 생명이 가지고 있는 가장 최적의 상태로 몸을 되돌리는 능력이죠. 아직 제 힘이 약해서 그렇지, 능력의 레벨을 더 높이면 사람을 젊어지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젊음을? 그게 가능할까?”
“작은 새싹 정도는 가능해요. 제 능력은 생명의 시간을 건드리는 능력이니까, 가능성은 있다고 봐요.”
주희는 자신의 능력에 감탄하는 승한에게 의기양양해서 말했다. 믿기 어려운 말이었지만 젊음을 되찾아 줄 수도 있는 능력이라는 말은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긴 했다.
‘하긴, 주희가 가진 능력도 어느 신의 힘일 테니.’
능력을 주는 존재는 신이다. 신들 사이에서도 악마들처럼 능력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 존재 자체가 신이라는 것만은 다르지 않았다.
주희에게 능력을 준 존재 역시 신일 것이고, 그런 신의 능력을 보다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된다면 사람의 젊음을 되찾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승한은 주희의 생각이 꼭 허황되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뭐, 그것도 능력의 레벨이 더 올라야 가능한 일이지만요. 지금은 턱도 없어요.”
“그건 그렇지.”
“자, 치료가 끝났으면 어서 서두릅시다.”
치료가 끝났다는 말에 크루먼이 잽싸게 나섰다. 승한은 그가 어지간히도 급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까지 급합니까?”
“일단 따라 오시죠.”
승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크루먼의 뒤를 따라갔다. 윤재 역시 승한의 옆에 나란히 섰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긴 하지만 윤재 역시 승한을 돕기 위해 왔으니, 미국을 돕기 위해 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크루먼을 따라온 사람은 승한과 윤재, 주희, 이렇게 셋뿐이었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은 이 일과 크게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었던 모양이었다.
크루먼이 승한과 윤재를 데리고 간 곳은 큰 모니터 몇 개가 설치되어 있는 방이었다. 몇 개의 새하얀 책상과 의자에 승한과 윤재를 안내한 크루먼은 주머니에 있던 리모컨을 꺼내 버튼을 눌렀다.
“이걸 보시죠.”
꺼져있던 모니터의 화면이 들어왔다. 4개의 모니터 중 가장 왼쪽에 있는 모니터의 화면이 나타났는데, 그곳에는 익숙한 모습의 괴물이 도시의 허공을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거대한 용의 모습을 하고 있는 괴물이었다. 머리에는 두 개의 뿔이 나 있었는데, 뿔과 날개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승한과 싸운 반악마와 비슷한 점이 있었다.
‘루시퍼?’
승한은 영상에 떠오른 녀석을 보고서 루시퍼를 생각했다. 스테이지 속에서 승한과 싸웠던 악마, 루시퍼가 용의 형태로 변한 모습과 꽤나 비슷했던 것이다.
하지만 루시퍼일 리는 없었다. 승한은 확실하게 루시퍼의 죽음을 확인했다. 악마가 죽고 나서 다시 부활하기까지는 수백, 수천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니 화면에 나타난 괴물은 다른 악마이거나 악마가 아닐 것이다.
“이 녀석이 바로 L.A의 상공에 나타난 거대한 균열에서 출현한 괴물입니다. 이 영상은 녹화된 화면이 아닌, 실시간으로 촬영되어 전송된 영상입니다.”
크루먼은 화면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괴물은 도시 한가운데를 날아다니다 한 건물의 위에 내려앉았다. 거대한 몸집이 내려앉자 고층 건물의 옥상이 주저앉았고, 그곳에 자리한 괴물은 편안하게 꼬리를 건물 전체에 두르기 시작했다.
오십 미터는 될법한 거대한 괴물이었다. 녀석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건물이 무너졌다. 다행히 사람들은 모두 대피했는지 영상 속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지만, 괴물의 움직임에 의해 파괴되는 건물들의 피해만 해도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녀석이 출몰하고 벌써 4시간이 흘렀습니다. 처음 녀석의 출현에 열다섯 명의 헌터들이 연합하여 싸웠지만, 그들 중 여덟 명의 헌터들이 죽고 다쳤습니다. 보시다시피 별다른 성과는 얻지 못했지요.”
“전부 당했다는 말입니까?”
“네. 상대가 되질 않았습니다. L.A지역에 있는 나름 실력 있는 헌터들이었는데 말이지요. 저희들은 녀석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미국 최고의 헌터라 알려져 있는 루이즈씨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루이즈씨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루이즈 칼렙. 그는 미국에 있는 수많은 헌터들 중 최고라 알려져 있는 헌터였다. 승한과 더불어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헌터였고, 홀로 보스를 잡은 사례가 있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루이즈 혼자서는 저 괴물을 잡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하긴, 저만한 덩치를 보면 그럴 만도 했다. 실제로도 열다섯 명의 실력 있는 헌터들이 녀석 하나에게 별다른 피해하나 입히지 못하고 죽거나 다치지 않았던가?
그래서 미국은 승한을 불렀다. 세계 최고라 알려져 있는 두 헌터라면, 저 괴물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해서 말이다.
“듣기로는 한국에도 거대한 균열이 나타났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네.”
“그 균열을 맡은 헌터가 김승한 헌터가 맞지요? 그 균열은 어떻게 됐습니까?”
“균열에서 나온 괴물은 처리했습니다. 제가 입었던 부상은 그 괴물과의 싸움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괴물을 처리해도 균열은 사라지지 않더군요.”
크루먼은 승한의 입으로 그가 거대한 균열에서 나온 괴물을 처리했다는 확답을 받자 만족할 수 있었다. 기껏 여러 이권을 한국에 약속하면서까지 승한을 데리고 온 보람이 있었던 것이다.
“조금 후면 루이즈 헌터가 이곳으로 올 겁니다. 승한씨는 그 때 루이즈 헌터를 비롯한 다른 헌터들과 힘을 합쳐 저 괴물을 잡아 주시면 됩니다.”
“아, 그거 말인데 여기가 대체 어디입니까? 전 해리스씨 통해서 갑작스럽게 와서 잘 모르는데……”
승한의 물음에 크루먼은 화면에 있는 괴물을 가리켰다.
“여긴 저 괴물이 앉아있는 건물의 지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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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10층. 지상의 소리가 들리기에는 꽤나 깊은 곳이었다. 승한과 윤재는 바로 이 건물의 위쪽에 화면에 나타난 괴물이 있다는 이야기에 놀랐다.
화면에 나타난 괴물은 건물을 중심으로 배회했다. 승한은 루이즈라는 헌터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했다. 당장 이곳에는 크루먼이 관리하는 실력 있는 헌터들이 열 명이 넘게 있었지만, 괴물을 상대하기에는 부족한 전력이었다.
‘뿔과 날개라… 저 녀석도 반악마인가?’
승한은 화면에 나타난 괴물의 모습을 살폈다. 보면 볼수록 루시퍼와 닮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절대 루시퍼가 아닐 것이라 생각하지만, 만약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녀석은 승한이 있는 건물을 몸으로 감싸고 꼬리를 휘둘렀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또 다른 건물이 꼬리에 맞고 무너졌다.
승한이 영상 속에 있는 괴물을 지켜보기 시작한지도 벌써 삼십 분이 되었다. 루이즈라는 헌터가 올 때까지 기다리면서 승한은 녀석을 계속해서 지켜봤다.
녀석은 움직이지 않았다. 건물을 몸으로 휘감은 채, 간간히 꼬리를 휘두른다던지 입을 크게 벌리고 숨결을 뿜어낸다던지 할 뿐이었다. 어디론가 이동하지 않고,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했다.
“우리가 여기 있는지 알고 있는 건가?”
옆에서 승한과 함께 영상을 보고 있던 윤재가 중얼거렸다. 승한 역시 마침 그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렇게 보이죠?”
“그런 게 아니라면 이 위에 잠자코 있을 이유가 없지 않아? 크루먼씨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간 L.A를 떠돌며 난리를 피웠다던데.”
괴물이 L.A에 나타나고 그간 도시 전역에 입힌 피해는 감히 금액으로 측정하기가 두려운 정도였다. 거대하고 단단한 몸뚱이를 한 번 크게 움직일 때마다 건물이 우수수 무너졌고, 그것을 복구하는 데에는 천문학적인 금액이 들 수밖에 없었다.
크루먼은 승한을 부르긴 했지만 루이즈가 자신이 맡은바 구역을 모두 정리하고 올 때까지 더 많은 피해가 생길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눈물을 머금고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것이, 자칫 전력을 분산시켜 싸우다가 승한이 잘못되기라도 하는 순간 더 큰 피해가 생길 것이기 때문이었다.
조금 더 피해를 입는다 하더라도 지금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크루먼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 외의 일이 벌어졌다. 어느 순간부터 괴물이 승한을 비롯한 헌터들이 있는 건물에 달라붙더니 움직임을 멈추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오고부터인가?’
괴물은 승한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승한이 L.A에 도착한 직후부터 움직이지 않았다. 단순한 우연이라 생각하기 어려웠다.
“괜찮겠지?”
“뭐가요?”
“저 녀석, 어려워 보이는데. 덩치가 큰 건 둘째 치고… 그냥 좀 불길해.”
단순히 영상일 뿐이지만 윤재는 괴물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이미 비슷한 크기의 균열에서 나온 괴물을 승한이 쓰러뜨렸다고는 하나, 그것도 그리 쉽지는 않았다.
“쉽지는 않겠죠. 그래도 아주 어렵지도 않을 거예요.”
불길하긴 하다. 하지만 승한은 반악마와 싸울 때 정도로 불안하지는 않았다. 같은 크기에, 비슷한 형태의 균열에서 나온 괴물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 때와는 달라.’
타임 포인트는 넉넉하게 있었다. 2번의 [강신]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반악마를 쓰러뜨리고 획득한 타임 포인트도 만만치 않았다. 이 타임 포인트를 사용하면 반악마와 싸울 때보다 더 강한 능력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영상에 나타난 저 용 괴물이 반악마와 같은 힘을 가지고 있을 때였다. 녀석이 어느 정도 힘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쩌면 반악마보다 강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루이즈님이 오셨습니다.”
그 때, 방문이 열리며 크루먼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뒤로는 주희와 몇 명의 헌터들이 함께 따라 들어왔다. 그들은 이곳 건물에 크루먼과 함께 남아있던 헌터들이었는데, 아무래도 해리슨이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루이즈라는 헌터를 데리고 온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