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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죽은자
승한은 정신을 잃었다. 악마의 숨통이 끊어지는 순간, 승한이 정신을 잃지 않게끔 잡아주고 있던 한 줄기 집념의 끈이 툭 끊어진 것이다.
다시 승한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처음 승한이 미국에 도착했던 건물의 지하 의료시설이었다. 이미 부상은 말끔하게 치료된 상태였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악마의 마기는 주희의 능력으로도 완벽하게 치료가 되질 않았다.
“아, 죽겠네.”
정신을 차린 승한이 가장 처음 내뱉은 말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느껴졌다. 자신의 몸이 만신창이라는 것이.
겉으로 보이는 부상은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악마의 마기는 몸속에 독처럼 쌓여있었다. 당장 죽을 정도로 치명적이지는 않겠지만 마기는 여전히 승한의 몸속에서 계속해서 고통을 주고 있었다.
“정신이 드십니까?”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해리슨의 것이었다. 승한은 자신의 몸을 덮고 있던 하얀 천 이불을 걷어내며 일어났다. 주위에 있던 사람은 해리슨 한 명뿐이었다.
“괜찮습니다.”
“이주희 헌터의 말로는 승한씨의 몸속에 있는 어떤 힘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고 하더군요. 루이즈씨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주희의 능력은 만능이 아니었다. 상처를 입은 부위의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고 해도, 이미 몸속에 자리잡은 마기를 완벽하게 없앨 수는 없었다. 그것은 주희의 능력이 악마의 능력보다 한참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물론 치료를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는 차이가 있었다. 주희의 힘은 분명 악마의 마기와 반하는 힘이었다. 그녀의 능력이라면 조금씩이지만 마기로 인해 상처 입은 승한과 루이즈의 몸을 꽤 회복시켜 주었다.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보다 다른 사람들은요?”
“승한씨가 정신을 잃고 반나절 정도가 지났습니다. 지금은 다들 쉬고 계십니다.”
반나절. 적잖은 시간 동안 정신을 잃었다. 승한은 자신의 상태가 꽤나 위중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긴, 그 마기를 그냥 들이 마셨으니.’
지금도 몸속에는 조금이지만 마기가 남아있었다. 하지만 정신을 잃기 전과 비교하면 그 양은 극히 적었다. 주희의 치료 이외에 또 다른 어떤 힘이 개입한 덕분이었다.
‘성화 덕분인가?’
성화의 힘은 마기와 정 반대의 힘이었다. 성화라는 힘을 가진 승한인 만큼 몸속에 있는 마기에도 어느 정도 저항을 하고 그 힘을 상쇄시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아롤과 붉은 천사는 승한의 몸속에서 사라진 후였다. [강신]의 지속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반악마나 악마와의 싸움이 끝날 때까지는 이어졌지만, 그 이상 힘을 계속해서 빌려 사용할 수는 없었다.
‘뭐, 다음에 기회가 또 있겠지.’
승한은 누워 있던 침상에서 일어났다. 누워있을 만큼 누워있었으니 슬슬 일어날 때가 되었다.
‘지금쯤이면 한국은 새벽이나 아침 쯤 됐겠군.’
아침에 도착했던 미국에서의 시간이 벌써 밤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승한은 해리슨을 따라 윤재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처음 도착했을 때는 상황이 급해서 알지 못했지만 건물의 지하는 꽤나 넓었다. 해리슨의 말로는 헌터들을 위해 임시로 사용되고 있는 시설이라고 했는데, 지원이 꽤 많이 들어온 모양이었다.
윤재가 머물고 있는 방에 도착한 승한은 방문을 작게 두드렸다. 잠시 후 방문이 열리며 윤재가 밖으로 나왔다.
“어? 너 몸은 좀 괜찮아?”
“그럭저럭요.”
아직 완치가 된 건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금방 나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조금씩 힘이 회복되는 만큼 몸속에 있는 마기를 성화로 정화시키면 될 일이었다.
게다가 당장은 움직이는데도 무리가 없었으니 더 이상 여기서 시간을 허비할 이유가 없었다. 승한은 윤재와 만나 몇 마디를 나눈 후 해리슨에게 말했다.
“그럼 저희는 이만 한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해리슨씨.”
“가기 전에 그래도 크루먼씨를 뵙고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루이즈씨도 승한씨를 한 번 보고 싶어 하십니다.”
바로 돌아갈 생각이었던 승한은 크루먼과 루이즈가 자신을 보고자 한다는 말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을 만나서 할 이야기야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그냥 무시할 수도 없고…….’
어차피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해리슨의 도움이 필요했다. 더군다나 크루먼이면 몰라도 승한은 루이즈와는 한 번 다시 만나보고 싶었다.
‘뭐, 잠깐 정도야.’
승한은 결국 해리슨의 말을 따랐다. 승한이 깨어나서 함께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기다렸던 윤재 역시 승한과 함께 크루먼, 루이즈를 만나게 되었다.
“이쪽으로 오시겠다고 합니다.”
“저희가 가는 게 아니라요?”
“이제 막 정신을 차린 분을 움직이게 하실 수 없다고 하시는군요. 루이즈씨 역시 함께 이쪽으로 오고 계십니다.”
승한과 해리슨은 결국 윤재가 머물던 방으로 들어가서 크루먼과 루이즈를 기다렸다. 연락을 하고 시간이 몇 분 지나지 않아 크루먼과 루이즈는 금방 도착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한국인이라 해도 믿을 만큼 유창한 한국어와 함께 크루먼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윤재의 방 안에는 두 개의 소파가 나란히 마주보고 있었는데, 다섯 명의 사람이 모두 앉기에는 비좁았다.
결국 크루먼의 아랫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해리슨이 혼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크루먼과 루이즈가 한 소파에 나란히 앉았는데, 루이즈의 덩치가 워낙 크다 보니 크루먼의 자리가 좁아보였다.
“그래도 일찍 깨어나셔서 다행이군요. 정신을 잃으셨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전 괜찮습니다. 그보다 루이즈씨는……?”
승한이 루이즈를 보며 묻자 루이즈는 손에 전음구를 들고 대답했다.
-나도 문제없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루이즈의 안색은 썩 좋지 않았다. 듣기로는 루이즈가 깨어난 건 승한보다 한 시간 먼저였다고 하는데, 처음 깨어난 그는 제대로 걷는 것조차 힘들어 했다고 한다.
그나마 주희가 집중적으로 치료를 해 주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사경을 헤매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덕분에 괴물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영상구를 통해서 확인했습니다. 승한씨의 활약이 컸다는 건 헌터가 아닌 제가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루이즈씨의 활약도 컸습니다.”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승한씨가 아니었다면 괴물을 잡는 게 불가능했을 거라는 헌터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입니다.”
겸손하게 말하긴 했지만 사실 크루먼의 말이 사실이었다. 루이즈의 활약도 작진 않았지만 승한이 악마를 잡는데 대부분의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었다.
점점 더 강한 괴물이 나오고 있었다. 이제는 괴물이 아니라 앙 악마가 나왔다. 성화와 [올림포스], [성검]과 같은 능력으로 무장한 승한조차도 상대하기가 어려운 존재였다.
만약 승한과 헌터들이 악마를 쓰러뜨리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크루먼은 아마 계획대로 미사일을 날렸을 것이다. 하지만 승한은 보통 미사일로 악마를 어찌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당장 헌터들의 능력은 미사일과 비교해도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윤재가 만드는 불바다만 해도 그렇다. 루이즈의 주먹 한 방의 위력이면 미사일과도 버금갈 것이다.
그런 헌터들의 능력조차도 가볍게 무시했단 악마였다. 미사일이 아니라 어쩌면 핵이 떨어져도 끄떡없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인간이 만들어낸 무기에 절대적인 존재로 알려져 있는 악마가 죽는다는 사실이 어불성설이었다.
“칭찬 감사합니다.”
승한은 작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면서도 크루먼과 루이즈의 눈치를 살폈다. 그 중, 루이즈는 처음부터 끝까지 말 없이 승한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승한은 주머니에 있던 전음구를 꺼내 손에 쥐었다. 지금부터는 승한이 하는 말이 루이즈에게도 들릴 것이다.
“무슨 용건이 있으십니까?”
-궁금한 게 있다.
“물어보십시오.”
-네 신은 누구지?
루이즈의 직설적인 물음에 승한이 흠칫 놀랐다. 헌터들의 능력이 신들에게서 기인된 것이라는 사실을 그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긴, 나만 알고 있는 것도 이상한 건가?’
전 세계에는 수많은 헌터들이 있다. 승한이 특별하다고는 하나 애초에 그 많은 헌터들 중 승한 혼자만이 헌터들의 능력과 신들과의 관계를 알고 있다고는 확신할 수 없었다. 특히나 미국 제일의 헌터라고 알려진 루이즈라면 모르는 게 이상한 것이다.
‘이걸 알고 있다는 건…….’
루이즈도 신을 만났다. 승한이 붉은 천사, [올림포스]의 신들, 아롤을 만난 것처럼 그 역시 자신에게 능력을 준 신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것이다.
아니, 어쩌면 다른 헌터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승한은 루이즈의 물음에서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신을 만났다고.
“왜 그걸 묻습니까?”
-네 신은 특별하다. 내 신보다도. 네 검과 불,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또 다른 능력까지도. 다른 헌터들과는 달리 특별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능력이란 [올림포스]를 말하는 것이었다. 듀란달이나 성화와는 달리 겉으로 보이지 않는 그 능력에 대해서 루이즈는 특정하여 말하지 못했다.
승한은 그가 왜 자신의 능력을 이렇게까지 치켜세우는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그가 악마와의 싸움에서 느꼈던 자괴감 때문이었다.
루이즈는 악마를 상대로 충분한 활약을 했다. 악마와 싸우면서 승한은 루이즈의 실력을 가장 믿었다. 다른 헌터들은 악마에게 제대로 된 타격을 주지 못했지만, 그의 힘과 능력은 악마를 한 순간 막아설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한 순간’일 뿐이었다. 악마를 상대로 비등한 힘을 보여주었던 승한과는 분명 차이가 있었다. 지금껏 자신보다 뛰어난 헌터를 만난적 없던 그에게 악마의 등장과 승한의 존재는 큰 충격이었다.
-궁금하다. 네 신은 누구지? 그들은 너를 통해 무얼 하려고 하는 거지?
루이즈의 본심이 나왔다. 그는 단순히 승한의 능력과 그에게 능력을 준 신이 궁금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을 통해 승한이 알게 된 사실들이 궁금한 것이었다.
“루이즈씨는 어디까지 알고 계시는 겁니까?”
승한은 루이즈 역시 자신만의 신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는 신들이 헌터들을 통해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꽤 많은 것을 알고 있지. 너 역시 너의 신을 만났다면 전해들은 게 있을 것 아닌가?
“안타깝게도 전 들은 게 많이 없습니다. 제 신들은 저에게 이야기를 하기를 꺼려하거든요. 약속이 있다던가 하는 이유를 들먹이면서요.”
-그래? 그건 내 신과 비슷하군. 그래도 들은 게 전혀 없는 건 아니겠지? 네가 괴물을 악마라 부르는 것을 들었다. 녀석의 정체를 아는 것만 봐도, 넌 꽤 아는 게 많아.
루이즈 역시 괴물의 정체가 악마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승한은 그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어차피 속에서 앓고 갈 필요도 없는 이야기였는지라, 이 자리에서 모두 이야기 할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지금 나타나는 괴물들을 보내는 게 악마라는 존재들이라는 것만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아는지 모르겠군.
“……설마 루이즈씨는 그들의 목적도 알고 계시는 겁니까?”
-내 신이 알려주었다. 신이라고 하기엔 음흉한 녀석이지만, 누가 그랬는지 신은 거짓말을 하지 않다고 하더군.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고.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알려주지 않았으면 몰라도 말을 한 이상 그들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아니,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었다. 헌터란 존재는 신들의 아군이라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게 뭡니까?”
============================ 작품 후기 ============================
헌팅타임이 벌써 160편입니다. 3월에 연재를 시작하고, 벌써 2달하고 반이 흘렀다니.. 시간 참 빠르네요.
전작인 '더 플레이어'에서도 그랬습니다만, 항상 글을 적으면 역시 초반보다는 후반부가 적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글을 쓰는데 시간도, 정신적 에너지도 더 많이 소모되는 느낌이 듭니다.
오랜 기간 달려오면서 슬슬 방전이 되가는 게 느껴집니다. 헌팅타임이 완결나고는 보름 정도는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지금 연중을 하겠다는 게 아닙니다.) 글을 쓰지 않는 일상생활에서도 머릿속이 무겁게 꽉 차 있는 느낌이 들고, 글을 쓸때면 그 느낌이 배로 심해집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휴재가 아닌, 며칠 동안만 하루 1연재로 쉬고 싶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짧게는 3일, 길게는 5일 정도.. 하루 1편과 2편은 차이가 꽤 심하더군요. 당장 휴재가 아니더라도 며칠 정도만 하루 1연재로 돌려도 휴식이라는 느낌이 들 것 같아 죄송합니다만 이렇게 후기를 남깁니다.
사실 글이 후반부로 갈수록 하루 2연재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어 죄송한 마음이 커집니다. 초반부와는 달리 한 편을 쓰는데 드는 시간이 족히 두 배는 더 걸리니까요. 그래도 가능한 하루 2편 약속을 지키려 노력하겠습니다만.. 하루 한편이 올라오더라도 너무 욕하지는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ㅜㅜ
그럼 오늘 저는 헌팅타임 한편으로 인사드리며 이만 물러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