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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죽은자
필리핀의 상황에 대해 전해들은 승한은 총체적 난국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한국과 비교해서도 그렇지만 상황이 너무 심각했다.
이대로라면 언제 나라가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특히나 마족들이 나타났을 때와 검은 인영들의 출현 때에는 국민들의 피해도 어마어마했다.
‘보스가 나타나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란 말이야?’
가장 급한 곳이라고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무리 승한이 검은 많은 수의 검은 인영들을 쓰러뜨려 타임 포인트를 획득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해도 그렇지, 이 정도로 상황이 심각한 건 그리 달갑지 않았다.
“……어서 움직여야겠군.”
“어디서부터 움직이죠?”
“문제가 되는 지역이 한두 군데가 아니어서 말이지. 일단 수도부터 움직이자.”
필리핀 정부에서 검은 인영들의 정리를 부탁한 곳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당장 승한이 받은 지도에만 하더라도 붉은색 펜으로 여러 군데가 표시되어 있었다.
“그래도… 네 말대로 타임 포인트는 꽤 얻을 수 있겠네. 이만큼 개판이면 말이야.”
“이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거야 아직 모르지.”
탁-.
윤재가 지도를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가자.”
**
승한과 윤재는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를 시작으로 검은 인영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승한은 마닐라의 한 가운데서 성화를 밝혔는데, 도시 곳곳에서 검은 인영들이 튀어나와 승한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검은 인영들의 정리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강림]을 사용하지 않고도 승한의 성화는 벌써 4레벨에 달해있었다. 힘을 조금만 사용해도 검은 인영들은 그대로 타들어가며 정화되었다.
무엇보다 성화의 가장 큰 장점은 먼 곳에 있는 검은 인영들까지도 끌어들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 범위가 넓지 않았지만, 성화의 레벨이 높아질수록 그 범위는 점점 더 넓어졌다. 4레벨에 달한 지금에는 마닐라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검은 인영들이 승한을 향해 모여들기도 했다.
한국에 비해 필리핀에 있는 괴물들의 수는 다소 적은 편이었다. 이미 필리핀의 헌터들이 검은 인영들의 상당수 사냥해 놓기도 했었고, 인구밀집도가 한국에 비해 낮은 편인만큼 애초에 그 수가 한국에 비해 적은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마닐라에 있는 검은 인영들을 사냥한 결과는 꽤나 눈이 부셨다. 승한은 마닐라 전체에서 모여든 검은 인영들 전부를 잡고는 잠시 검을 내리고 쉬었다.
“후우…….”
성화를 남발하며 검은 인영들을 빠르게 제거하다 보니 금방 힘이 소모되었다. 단순히 검으로 베기만 해서는 검은 인영들은 쉽게 죽지 않았다. 성화의 힘을 적잖이 사용해야 검은 인영들을 빠르게 쓰러뜨릴 수 있었다. 검은 인영들은 다른 건 몰라도 질기기는 수준급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타임 포인트는 꽤나 많이 획득할 수 있었다. 마닐라에 남아있던 검은 인영의 수는 족히 천 마리에 가까웠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성화로 불태우며 승한은 쌓여가는 타임 포인트에 미소 지었다.
“이제 더 없는 건가?”
윤재는 더 이상 검은 인영들이 몰려들지 않자 능력의 사용을 멈추었다. 사방을 새하얗게 불태우던 백염이 순식간에 꺼졌다.
윤재와 승한, 단 두 명이서 필리핀의 수도에 있던 모든 검은 인영들을 정리한 것이었다. 수십 명의 헌터들이 감당해도 모두 정리하지 못한 곳을, 단 둘이서 말이다.
“네. 더 없어요. 있으면 몰려왔겠죠.”
“지치는군. 벌써 몇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싸우기만 했으니…….”
“그래도 형도 꽤 오래 잘 싸우네요?”
“나야 힘 조절을 해 가면서 싸웠으니까. 네가 지켜준 것도 있고. 그러는 너야말로, 안 지치냐?”
윤재는 가능한 능력의 사용을 억제하며 오래 싸우도록 노력했다. 필리핀은 넓었고, 그곳에 있는 검은 인영들의 수는 많았다. 더군다나 쉽게 죽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아 계속해서 달려드니 힘 조절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윤재와는 달리 승한은 쉬지 않고 성화를 사용했다. 윤재는 승한에게 들어서 성화의 힘이 얼마나 힘을 많이 소모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런 성화를 쉬지 않고 남발해 대는 승한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러게요. 저도 제가 이렇게 잘 싸울 줄은 몰랐어요.”
“자랑이냐?”
“진짜에요.”
승한은 검은 인영들과의 싸움에서 [올림포스]의 힘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성화도 힘을 사용하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힘의 소모 자체는 [올림포스]가 훨씬 컸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성화를 사용하고도 크게 지치지 않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이전에는 성화의 힘을 제대로 몇 번만 상요해도 금방 피로하고 지치곤 했었는데 말이다.
‘성화의 축복 때문인가?’
단순히 성화의 축복 하나로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불굴의 육체]의 레벨이 올라가 육체가 강화된 덕분도 있겠지만, 그렇다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전보다 성화에 대한 친화력이 훨씬 더 올라간 것 같았다. 이유를 생각하던 승한은 한 가지 달라진 점을 떠올렸다.
‘[강신] 때문인가?’
이전과 달라진 점이라면 승한이 [강신]을 통해 붉은 천사의 영혼과 잠시 동화되었다는 것뿐이었다. 그 순간 승한은 성화에 대한 친화력이 대폭 높아져 성화를 아무리 사용해도 몸에 부담이 되지 않았다. [강신]의 지속시간이 끝나면서 동시에 그 능력이 사라져버렸지만, 일부라도 그 영향이 남아있다면 이런 변화가 설명이 되었다.
어쨌거나 성화에 대한 친화력이 올라갔다면 승한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강림]을 사용한다면 큰 차이가 없겠지만 말이다.
[보유 타임 포인트 : 12623685p]
1200만 타임 포인트. 승한은 보유하고 있는 타임 포인트를 눈으로 확인하고는 절로 미소를 지었다. 윤재 역시 활약을 하기는 했지만, 필리핀에 있는 대부분의 검은 괴물들을 승한이 혼자 학살한 결과였다.
물론 기존에 있던 타임 포인트도 만만치 않았다. 승한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타임 포인트는 750만 정도였다. 거기에 추가적으로 검은 인영들을 학살하고 얻은 타임 포인트가 500만이었다.
‘이 속도면 2000만까지는 모을 수 있겠군.’
필리핀에서는 지속적으로 타국의 헌터들을 자국으로 유입하고 있었다. 미국과 중국, 일본과 같은 헌터 강대국은 필리핀에 헌터들을 보내 돕고 있었다. 특히 미국의 지원이 꽤나 많았는데, 덕분에 필리핀은 꽤나 여유를 찾고 있는 상황이었다.
승한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한편, 아쉬움도 들었다. 그들이 필리핀에 지원을 옴으로서 자신이 잡을 수 있는 검은 인영들의 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참 몹쓸 놈이군.’
검은 인영들을 빠르게 정리하지 못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된다. 그런데 자신의 타임 포인트를 늘리지 못했다는 생각에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을 보니 승한은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슬슬 움직이죠.”
“조금만 쉬자. 한 시간만.”
쌩쌩한 승한과는 달리 윤재는 바닥에 뻗어버렸다. 아무리 힘을 아꼈다고 해도 몇 시간 동안 검은 인영들과 사투를 벌였으니 지칠 만도 했다.
승한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진 윤재를 보며 그의 옆에 앉았다. 한 시간 정도는 조금 쉬어도 될 것이다.
‘어차피 나도 완전히 멀쩡한 건 아니니까.’
윤재에 비해 힘이 덜 드는 것뿐이지, 승한도 완전히 멀쩡하지는 않았다. 숨도 차고, 피로감도 느끼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검은 인영들을 사냥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자신의 페이스에 맞춰 윤재가 무리하게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승한은 윤재의 말대로 한 시간 정도는 쉬어갈 생각이었다. 그 정도면 자신도 완전히 이전처럼 회복이 될 테니 말이다.
“아, 죽겠다.”
“수고하셨어요, 형.”
승한은 윤재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윤재가 그 손을 보더니 손뼉을 마주쳤다. 짝, 소리와 함께 윤재의 시선이 다시 하늘로 향했다.
“저 하늘은 언제부턴가 계속 검은색이군.”
“그러게요.”
“그냥 평범한 구름은 아니겠지?”
하늘을 뒤덮고 있는 먹구름. 그것은 어느 순간부턴가 점점 더 두꺼워지고 있었다. 이전부터 괴물들이 나타나는 일요일이 되면 항상 하늘에 구름이 끼곤 했는데, 이제는 그것이 사라지지 않았다.
‘저 균열을 때문인가?’
구름과 함께 사라지지 않는 검은 균열들.
승한은 검은 먹구름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 검은 균열이 사라지지 않는 것과 같은 현상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저렇게 남아있는 검은 균열들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걱정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월요일이군.”
한국의 시간은 아마 월요일 저녁이 깊었을 것이다. 필리핀까지 오는데도 시간이 걸렸고, 필리핀에서 검은 인영들을 잡는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다음 스테이지는 어떻게 되려나…….”
얼마 전부터는 매번 화요일이 되면 스테이지가 시작되곤 했다. 승한은 다음 번 스테이지가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 그리고 어떤 능력을 얻게 될지가 벌써부터 걱정되었다.
‘다음 신은 누구일까.’
붉은 천사와 [올림포스]의 신들, 그리고 아롤. 지금껏 승한에게 능력을 준 신들은 하나같이 고위급 신들이었다. 지금까지로 보아 아마도 다음번 신 또한 마찬가지로 고위급 신일 확률이 높았다.
‘잠깐, 그러고 보니 [강림]은 누구의 능력이지?’
다른 능력과는 달리, [강림]은 어느 신의 능력이 아니었다. 다른 신의 힘을 몸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은 누구에게 받은 능력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모르겠군.’
[강신]이 10레벨을 달성하고, 능력이 [강림]으로 바뀌었을 때 승한이 만난 신은 바로 에덴의 신이었다. 승한은 어쩌면 [강림]이라는 능력을 준 신이 바로 에덴의 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 확률이 가장 높은 것만은 분명했다. 어느 신도 그에게 능력을 주지 않았다면, 그 능력의 주인이 에덴의 신이라는 것 외에는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럼 대체 다음에 만나게 될 신은 누구지?’
신들의 신이라는 에덴의 신을 만났다. 누구를 만나더라도 그보다 더 놀랄 것 같지는 않았다.
“이제 몇 시간 안 남았군.”
윤재는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보고는 중얼거렸다. 그의 시계는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윤재가 차고 있는 시계의 초침은 필리핀이 아닌 한국의 시간을 의미했다.
“스테이지가 시작되면, 저 좀 잘 부탁드려요.”
“아, 저번에 스테이지가 끝나고 정신을 차렸을 때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지?”
“네. 그것 때문에 좀 골치가 아팠죠. 아직 괴물들도 다 정리를 하지 못했는데, 벌써 정신을 잃으면 안 되잖아요. 위험할 수도 있는데.”
승한은 7스테이지를 진행하고 일어났을 때 이틀이나 훌쩍 시간이 지나있었던 것을 떠올리고는 윤재에게 자신을 부탁했다. 스테이지 속에서의 시간과 승한의 세상에서의 시간은 서로 너무나도 달라서 한 순간에 눈을 뜰 수도 있고, 며칠씩이나 지나서 눈을 뜰 수도 있었다.
“그래, 알았다. 너도 나 좀 잘 부탁한다.”
“그럼요.”
승한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믿을 만한 사람이다 보니 할 수 있는 부탁이었다. 승한은 여전히 시커멓게 피어 있는 먹구름을 보며 생각했다.
‘세 시간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