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타임-169화 (169/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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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죽은자

8스테이지의 시작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어쩌면 이렇게 타임 포인트를 구하러 다니는 것보다 다음 스테이지가 훨씬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어떤 능력을 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꽤 많이 지쳤던 건지 윤재는 금방 잠이 들었다. 승한은 그런 윤재의 옆에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딱히 할 일도 없었고, 생각할 것도 없었다. 자연히도 머릿속이 비워지고 시간이 지나갔다.

한 시간은 금방이었다. 승한은 윤재의 시계를 확인해 시침이 10시를 가리키자 윤재를 깨웠다.

“음, 벌써 한 시간인가?”

“조금 더 쉴까요?”

“……아니, 됐어. 나 하나 쉬자고 세상을 구할 영웅을 멍때리게 할 수는 없지.”

윤재는 장난스럽게 승한을 띄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승한은 피식 웃으며 윤재의 손을 잡고 그를 일으켰다. 한 시간 동안 완전히 회복이 되지는 않았아도 자기 전보다는 조금 안색이 나아보였다.

“넌 좀 쉬었냐?”

“저야 쌩쌩하죠.”

“하여간 넌 정말 인간 같지가 않아.”

탁-.

윤재가 손가락을 튕겼다. 다시금 레드 드래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럼, 출발하자.”

**

승한과 윤재는 마닐라에 이어 가까운 도시 몇 군데를 더 돌았다. 도시에는 각각 마닐라만큼은 아니더라도 꽤 많은 수의 검은 인영들이 남아있었다.

승한과 윤재는 도시를 돌며 빠르게 검은 인영들을 사냥했다. 쌩쌩한 승한과는 달리, 윤재는 꽤나 지쳐했다. 결국 윤재는 승한을 데리고 다닐 용도로 레드 드래곤을 소환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능력을 일체 사용하지 않았다. 검은 인영들을 공격하는 것 역시 레드 드래곤을 이용하는 방법뿐이었다.

승한은 강해졌다. 윤재 역시 마찬가지였다. 검은 인영들을 쓰러뜨리고, 그 타임 포인트를 이용해 더더욱 능력의 레벨을 올렸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한국에서의 시간이 12시.

화요일이 되었다.

**

승한과 윤재는 하루 사이에 필리핀에서의 일을 모두 정리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 지원 온 헌터들의 수가 꽤 많았고, 승한과 윤재가 검은 인영들을 정리하는 속도가 워낙 빨랐기 때문이었다. 그 동안 필리핀 내부의 헌터들이 힘을 쓴 것도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승한과 윤재는 일을 마치고 바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의 시간은 어느덧 늦은 새벽… 아니, 이른 아침이었다. 시간만으로 따지자면 밤을 샌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힘들군.’

쉬지 않고 성화를 사용해 싸운 승한은 슬슬 피로감을 느꼈다. 아무리 성화에 몸이 적응이 되었다고 해도 쉬지 않고 몇 시간, 반나절씩이나 성화를 남발하며 싸우는 것은 승한으로서도 무리가 따랐다.

한국은 이미 대부분의 검은 인영들이 정리가 된 상태였다. 승한과 윤재가 필리핀으로 가기 전에도 지방을 제외한 다른 지역은 정리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는데, 거기서 하루가 지난 후에야 당연히 정리가 마무리 되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사람들은 대피소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괴물들은 다 정리가 되었지만, 아직까지 검은 균열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괴물이 없더라도 검은 균열은 사람들에게 공포를 심어주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그것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는 정부에서도 사람들을 대피소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지시키고 있었다.

결국 승한과 윤재는 텅 빈 도시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대피소로 가서 가족들을 잠시 볼까 하던 승한은 그냥 집으로 돌아갔다. 이제 막 해가 뜨기 시작하는 이른 시간이었다. 가 봤자 다들 자고 있을 것이다.

“다시 왔구나…….”

집으로 돌아온 승한은 불이 다 꺼진 집의 불을 켰다. 꺼져 있던 불을 켰는데, 이상하게도 불이 들어오질 않았다. 아무래도 괴물들이 나타나 무언가 이상이 생긴 모양이었다.

승한은 몇 번 불을 더 켜보다가 포기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돌아온 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사실상 며칠 되지 않았지만 그냥 그렇게 느껴졌다.

‘토요일에 나갔다가 화요일에 돌아왔으니… 대략 사흘 만인가?’

[올림포스]산으로 가기 위해 집을 나왔던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는 곧장 괴물들이 출현했고, 괴물들과 싸우기 시작한 후로는 집에 돌아올 겨를이 없었다. 가족들도 그 때부터는 쭉 대피소에 있었다.

며칠 집이 비워져 있었다고 썰렁한 느낌이 들었다. 승한은 보일러도 들어오지 않아 차가운 집안을 돌아다니다 결국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오기 전 옷을 대충 갈아입고 던져놓은 상의가 침대 위에 어지럽혀져 있었다.

승한은 다 헤진 갑옷을 대충 벗어 옆에 던져두었다. 방패 역시 마찬가지였다. 듀란달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씻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는데, 어차피 물도 나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자자.’

온 몸이 피로감으로 무거워졌다. 지금껏 느끼지 못했던 피로감이었다. 가벼운 솜털 같았던 몸이 물을 잔뜩 먹고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성화를 사용한 피로감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것 같았다. 승한은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이대로 잠이 들면, 시작되겠군.’

여덟 번째 스테이지. 아마도 지금 눈을 감고 잠이 들면 시작될 것이다.

그 생각이 든 순간, 승한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몸의 노곤한 느낌은 금세 사라지고 없었다. 잠이 든 순간, 승한은 전혀 다른 세상으로 초대받았다. 승한 역시 자신의 몸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쉬고 싶었는데…….’

아직 시야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새로운 스테이지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그런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승한의 몸을 감싸고 있던 피로감은 그런 것이었다. 계속해서 잠을 자다가 더 이상 잘 수 없을 때까지 잠을 자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정신은 들었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았고, 시야는 금방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몸과 영혼, 의식이 어디론가 옮겨지는 과정인 모양이었다. 그 과정은 금방 끝났는지 승한의 시야가 서서히 돌아왔다.

“아…….”

제일 먼저 보이는 건 까맣게 하늘을 뒤덮고 있는 먹구름이었다. 동시에 그와는 전혀 반대로 구름 한 점 없는 파랗고 아름다운 하늘이 보였다.

구름의 모양은 참으로 이상했다. 마치 선을 그어 놓은 것처럼 단면이 반듯했다. 마치 하늘을 뒤덮고 있는 먹구름을 예리한 검으로 베어놓은 것 같았다.

승한이 서 있는 하늘은 파랗고 아름다웠다. 먹구름은 멀리 보이는 곳에 끼어있었다. 그런데 그 먹구름이 제법 컸다. 대체 어디까지 펼쳐져 있는지 모를 정도로 말이다.

“……여긴 또 어디지?”

새로운 스테이지가 시작되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무대가 참으로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차라리 이전에 천족의 몸을 빌렸을 때와 같았다면 그가 가지고 있던 기억을 통해 지금의 상황을 빠르게 이해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승한은 하늘을 바라보다가 다시 주위를 둘러봤다. 땅 역시 하늘과 마찬가지였다. 승한이 서 있는 곳은 에덴의 땅처럼 아름다운 초원이었다. 꽃과 풀, 나무가 있었고, 먹구름이 끼어있는 하늘의 아래쪽은 메마른 황무지였다. 하늘도, 땅도 극과 극이었다.

“뭐 하는 곳이지, 여긴?”

그 때, 승한은 주위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늘과 땅에 관심이 팔려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승한의 주위에 넓게 퍼져 있었다.

‘이들은 누구지?’

승한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승한의 감각에 걸려든 사람들만 하더라도 그 수가 엄청났다. 수천? 수만? 당장 눈에 보이는 사람들만 하더라도 수백은 되었다.

그들은 승한처럼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깜박이고만 있었다. 아무래도 다들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어……!”

그 때, 한 명의 사람이 놀라 소리쳤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승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승한 역시 마찬가지로 놀랐다.

“……형?”

소리친 사람은 윤재였다. 승한은 예상 밖의 상황에 그를 만나게 되자 깜짝 놀랐다. 분명 잠들기 얼마 전에 바로 그와 헤어져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는데 말이다.

윤재는 승한을 발견하고는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승한 역시 얼떨떨한 중에 그에게로 향했다. 다른 사람들은 승한과 윤재가 서로 아는 사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마찬가지로 놀랐다. 그들 역시 이곳에서 누군가가 서로 아는 사이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형이 왜 여기에 있어요?”

“그러는 너야말로 왜…….”

따지듯이 묻는 말에 윤재가 반박하려다 말을 멈췄다. 그는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설마…….”

“그 설마가… 진짜인 것 같아요.”

승한은 윤재를 만나는 순간 깨달았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지금껏 승한이 스테이지 속에서 만나던 다른 존재들과는 달랐다. 그들의 복장은 각양각색이었고, 놀라는 모습도 이곳 세상의 사람들이라고 하기엔 이상한 점이 있었다. 이곳의 현지인이라면 멀뚱히 서서 저렇게 놀란 표정을 짓고 있을 리가 없으니 말이다.

그들은 바로 승한과 같은 세상의 사람들, 정확히는 헌터들이었다. 새로운 스테이지의 시작과 함께 그들은 승한과 같은 세상으로 오게 된 것이다.

“대체… 이게 무슨…….”

“같은 무대에서 스테이지가 진행되는 건가 봐요.”

“이 많은 사람들이?”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는 윤재에게 승한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럼?”

“더 있어요. 보이는 사람보다, 보이지 않는 사람이 훨씬 많아요.”

윤재는 승한과는 달리 [불굴의 육체]를 가지지 못했다. 주위의 기척을 살피는데는 [불굴의 육체]가 [불굴의 정신]보다 탁월했다. 당장 주위에 있는 수백 명의 사람보다는, 더 멀리 있는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을 본다면 확신할 수 있는 게 있었다.

“이번 스테이지의 무대는… 모두가 함께하는 것 같아요.”

“모든 헌터들이?”

“네. 아마도 7스테이지를 통과한 모두가요.”

전 세계에 있는 헌터의 수는 수십만 명이었다. 하지만 그들 중 7스테이지의 무대를 통과한 헌터는 일부에 불과했다. 평균적으로 절반 이상의 헌터들이 5스테이지를 통과했다고 통계되었지만, 6스테이지와 7스테이지에서 높은 확률로 스테이지를 통과하지 못한 것이다.

그 결과 7스테이지를 통과하고 능력을 얻은 헌터는 많게는 세계적으로 수만 명 정도로 집계하고 있었다. 많게는 3만, 적게는 2만 명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수는 넉넉잡아 그 정도는 되었다. 그렇다는 말은 즉, 이들 모두가 7스테이지를 통과하고 8스테이지의 무대에 서게 될 자격을 갖춘 헌터들이라는 뜻이었다.

“……세계의 수준 높은 헌터들은 다 모였군.”

“그러게 말이에요. 괴물들이 나타나는 방식에 변화가 있긴 했지만, 스테이지까지 변화가 생길 줄은…….”

“뭐가 이리 계속 바뀌어? 정신없게.”

윤재의 불만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이제 겨우 적응이 될 만하면 다시 형식이 바뀌어버린다. 괴물이 나타나는 주기도 그렇고, 스테이지의 진행 날짜와 방식도 그렇다. 더 이상 놀라지 않으리라 다짐해도 그때그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승한은 멀리 보이는 먹구름과 황무지를 바라봤다.

어쩐지 저곳에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자신들이 서 있는 푸른 땅과는 달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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