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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죽은자
이상하게도 8스테이지의 시작 메시지는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스테이지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바로 메시지가 떠오르곤 했는데, 꽤나 시간이 지났음에도 변화가 없었다.
주위에 있던 헌터들은 서로를 둘러보며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승한과 윤재처럼 곧 그들 역시 자리에 있는 모두가 같은 세상의 헌터들임을 알아차렸다.
우왕좌왕하던 헌터들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진정되었다. 한 시간, 두 시간… 계속해서 시간이 흐르자 헌터들은 당황스러움보다는 불안해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더더욱 그랬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헌터들의 불안감이 고조되었을 때였다.
크르르르르-.
낮고 긴 울음소리가 들판에 퍼져나갔다. 울음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또한, 울음소리는 제각기 모두 달랐다.
드넓은 들판 위로 멀리서부터 울음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울음소리가 다양했던 것처럼 그들 역시 한둘이 아니었다.
“저것들은… 뭐야?”
승한과 윤재, 그리고 모든 헌터들은 멀리서 달려오는 거대한 동물들을 보며 깜짝 놀랐다. 아니, 그들은 동물이 아니었다. 흰색 호랑이야 백호라고 그들의 세상에도 존재하는 동물이었지만, 각양각색의 모습을 한 전설상의 동물과 생전 처음 보고 듣는 괴물들까지 섞여있었다.
하지만 괴물이라고 하기에는 그들의 모습이 이질적이라기보다는 친숙했다.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던 것처럼. 게다가 그 수도 어마어마했다. 멀리서 보이는 들판 전체를 뒤덮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대체 저게 다 뭐야?”
“수만 마리… 아니, 더 되겠는데요?”
눈앞에 보이는 들판을 가득 메우는 수. 그 뒤에도 계속해서 이어져 있는 것을 보면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승한은 그들의 존재감을 몸으로 느끼고는, 그 많은 수에 압도되었다.
동시에 몇몇 특이한 존재들이 승한의 감각이 들어왔다. 아니, 특이하다기보다는 보다 더욱 친숙하다고 보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승한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저것들은…….”
“왜, 뭐가 있…….”
윤재는 승한의 시선을 쫒아서 고개를 들고는 이어지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들판을 가득 메우며 달려오는 존재들보다도 더욱 놀라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었다.
“천… 사?”
새하얀 백의를 입고 날개를 펼치고 있는 천사들. 날개를 펄럭이지 않고도 그들은 하늘을 부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손에 창칼과 같은 무기를 들거나,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기도 했다. 하늘을 둥그렇게 둘러서 날고 있는 그들의 수는 수십이나 되었다.
승한은 천사들을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붉은 천사를 알고 있는 그에게 천사라는 존재에 대한 의미는 남달랐다. 그에게 있어서 천사는 곧 신이나 마찬가지인 존재였으니 말이다.
‘아니, 달라.’
승한은 수십 명의 천사들을 보며 그들이 자신이 아는 붉은 천사와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복장이 모두 동일했고, 무엇보다 느껴지는 기운 자체가 급이 달랐다.
붉은 천사는 성화라는 권능을 가진 천사였다. 그녀는 창조의 능력과 자신을 모시는 신도와 같은 존재들을 가지고 있는 고위급 신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이들과는 달리, 저기 있는 천사들은 급이 많이 떨어져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한낱 피조물과 같이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어디까지나 붉은 천사에 비해 부족하다 느껴질 뿐, 그들 역시 하나하나가 심상치 않은 느낌을 풍겼다. 고위 신인 붉은 천사만큼은 아니더라도 신에 오른 존재임에는 분명했다.
‘하급 신… 정도이려나?’
승한이 얼마 전 쓰러뜨린 하급 악마와 같은 수준의 존재. 그런 이들이 수십이었다. 승한은 갑작스럽게 그 정도씩이나 되는 존재가 수십 명이나 눈앞에 나타나니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동물을 닮은 존재들 역시 범상치 않았다. 승한은 점차 다가오는 천사들을 보며 언제든지 듀란달을 꺼내들 수 있는 준비를 마쳤다.
천사들은 헌터들을 향해 다가왔다. 천사라는 존재를 처음 본 헌터들은 그들이 괴물과 같은 존재들이라 생각하고는 각자 무기를 꺼내들기도 했다.
“경계하지 않아도 됩니다.”
천사들 중, 가장 앞에 있는 천사가 날개를 접으며 헌터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헌터들은 각자 살고 있는 나라가 다르고 언어가 달랐지만, 천사가 하는 말은 전음구를 통해 듣는 것처럼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우리는 당신들의 적이 아닙니다.”
“당신들의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가장 가까이 있던 헌터 한 명이 경계를 풀지 않고 물었다. 하긴, 적이 아니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 말을 덥석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당신들의 적은 저희가 아닙니다. 당신들의 적은 저쪽에 있는 이들입니다.”
천사는 정 반대편의 황무지를 가리켰다. 까만 먹구름이 끼어있고 모래로 만들어진 땅밖에 없는 그곳은 확실히 푸른 초원과 하늘이 펼쳐진 이곳과는 달리 악마들의 땅에 더욱 가까워보였다.
반면, 천사들은 어딘가 신성한 느낌에 적이라는 느낌은 분명 들지 않았다. 단지 그들을 경계하는 이유는 낯선 존재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럼 저 뒤의 괴물들은 뭡니까?”
“저들은 신이 되지 못한 신성한 영물들입니다. 신이 되지도 못하고, 평범한 동물로도 남지 못한 신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수……?”
승한은 신수라는 존재를 듣자 7스테이지에서 만난 마물들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신수란 그 마물들과 비슷한 존재들인 모양이었다. 마기와 같은 힘 대신, 신들의 신성한 힘을 지니고 있는 존재들 말이었다.
“당신들이… 저희를 여기로 부른 겁니까?”
“저희에게는 그만한 힘이 없습니다. 저희는 당신들을 부탁받았을 뿐입니다.”
“부탁받았다니… 누구에게요?”
“그건 말씀드리기가 어렵군요. 게다가 말씀드린다 해도 당신들은 알지 못할 테니…….”
천사들의 대답은 두루뭉술했지만 승한은 그들의 위에 누가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조금이지만 그들에게서 붉은 천사에게 느꼈던 분위기와 비슷한 분위기가 풍겨졌다. 더불어서 7스테이지에서 만난 천족들과 같은 분위기도 풍겼다.
‘그녀가 보낸 건가?’
신이라고 해도 같은 신이 아니었다. 그들 사이에서도 계급과 같이 신의 등급이 나누어져 있었고, 그 중 붉은 천사는 신들 중에서도 드문 고위급 신이었다. 승한은 천사들의 정체를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천족이 신이 된 건가?’
인간들 중에서도 간혹 아롤과 같이 신이 되는 경우가 있곤 했다. 하물며 태생적으로 인간보다 더 강한 힘을 타고나는 천족들은 그보다 신이 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신이 되더라도 천족들은 아롤과 같은 고위 신이 되지는 못했다. 그들은 그저 영생을 얻는 순간 신이 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천족이 신이 된 형태가 바로 그들을 창조한 존재인 천사의 모습이었다.
그 순간, 승한의 시선과 천사의 시선이 마주쳤다. 천사들은 힐끔힐끔 승한을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승한이 가지고 있는 성화의 힘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승한은 천사들과 눈이 마주친 김에 입을 열었다.
“당신들과 함께 이곳을 지켜내 달라는 것입니다.”
“지켜 내다니… 저들에게서 말입니까?”
승한은 천사가 가리켰던 황무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아직까지는 황무지밖에 보이지 않는 땅이었지만, 저곳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천사들을 말을 들어보면 금방 알 수 있었다.
승한은 이번 스테이지의 무대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이번 무대는 개인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헌터들이 천사들, 신수들과 힘을 합쳐 어떤 존재들로부터 이 땅을 지켜내는 것이 스테이지의 달성 목표였다.
[스테이지 8]
달성 조건 : 악마와 마물들에 의해 하나의 세상이 죽은 땅과 하늘로 변해가고 있다. 신들과 신수들과 힘을 합쳐 그들을 막아내고, 죽은 땅을 살려내라.
제한시간 : --
보상 : ??
이전과는 달리 스테이지가 여러 단계로 나누어져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진행 정도에 따라 난이도가 얼마나 높을지는 알 수 없었다.
‘악마’들‘이라고?’
승한은 머릿속에 떠오른 메시지 중에서 악마가 아닌, 악마‘들’이라는 말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무리 하급 신이라고 할 수 있는 천사들이 아군으로 있다고 해도, 악마가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 있다는 것은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악마의 수가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서는 난이도 자체가 말도 안 되게 높아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승한의 세상에 나왔던 악마가 하급 악마였는데, 그만한 수준의 악마가 수십이 나타나거나 어쩌면 그 이상의 힘을 가진 악마가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신수들은 어느 정도 다가와서는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정확히는 천사들이 있는 뒤편에 서서 그들의 명령을 기다리는 듯이 보였다. 아무래도 신수들을 제어하는 게 천사들의 역할인 모양이었다.
신수들의 수는 몇이나 되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들판에 넓게 퍼져 있는 신수들의 수는 승한조차도 감히 헤아리지 못했다. 수만? 우스웠다. 수십만은 족히 될 것이고,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그들 하나하나가 적잖은 힘을 가지고 있었다. 신이 되지 못한 영물들이라더니, 그 말이 진짜인 것 같았다. 어중간한 실력을 가진 헌터는 신수 하나를 감당하기도 벅찰 것이다.
물론, 이 자리에 있는 헌터들은 어중간한 실력을 가진 헌터들은 아니었다. 모두가 7스테이지를 통과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능력의 개수가 많다는 것은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많다는 것이고, 그만큼 많은 수의 괴물을 잡았다는 뜻도 되었다. 무엇보다 7스테이지를 통과했다는 것 자체가 실력을 입증해 보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구구구구구구구구-.
그 때, 땅이 조금씩 울리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신수들이 달려오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거대한 무리가 이동하는 느낌. 그것은 꽤나 멀리서부터 느껴졌다. 그리고 땅에서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할 때 즈음, 황무지 멀리서 흙먼지가 날리는 것이 보였다.
“……저것들인가?”
신수들처럼 다수의 거대한 짐승과 같은 존재들이 우르르 몰려들고 있었다. 그 수 또한 신수들에 뒤지지 않았다. 신수들이 성스러운 영물과 같았다면, 흙먼지를 날리며 다가오는 존재들은 조금 더 칙칙하고 어두운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이윽고 흙먼지를 뚫고 그들의 모습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거리가 워낙 멀어서 자세히는 보이지 않았지만, 한데 뭉쳐 다가오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대체로 검게 보였다. 모습은 모두 제각기 달랐음에도 그들이 뭉쳐서 우르르 몰려오자 검은 해일과 같은 것이 밀려드는 듯이 보였다.
“……어마어마하군.”
신수들과는 사뭇 달랐다. 승한은 7스테이지에서 만난 마물들과 지금 다가오고 있는 마물들이 질적으로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심한 차이까지는 아니더라도 황무지의 마물들이 대체로 덩치가 더 커보였다.
‘대체 수가 얼마나 되는 거야?’
신수들과 마찬가지로 마물들 역시 수를 짐작키가 어려웠다. 승한은 가장 처음에는 마물들의 모습에 질겁해서 눈살을 찌푸리다가 그것을 뛰어넘는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발견하고는 중얼거렸다.
“역시… 있나.”
얼마 전 쓰러뜨렸던 하급 악마와 같은 기운을 풍기는 존재들.
그들이 마물들 위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