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타임-185화 (185/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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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죽은자

화르르르륵-.

콰르르-.

어둡던 공간은 어느새 불길로 가득해졌다. 승한은 범위가 닿는 한에서 공간을 가득 성화로 채우기 시작했다.

그 힘은 바알의 몸속에 있는 마기를 태웠다. 다른 건 태우지 않았다. 성화는 승한의 의지를 받아 오직 바알을 악마로 만들게 한 마기만을 정화시켰다.

“이걸 언제 다 정화한다…….”

승한은 투덜거리면서도 착실하게 성화를 부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바알의 몸이 크게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쿠구구구구-.

“요란법석을 떠는군.”

바알이 몸부림치는 이유야 뻔했다. 괴로울 것이다.

몸속을 성화가 휘젓고 있다. 태우는 것이라고 해봤자 마기일 뿐이지만, 그 마기 역시 이미 바알의 일부였다. 완전한 악마가 되어버린 존재인 그에게는 성화의 불길이 뜨겁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효과가 있었다. 승한은 더더욱 성화에 힘을 주었다. 잔잔한 물결처럼 타오르던 성화가 태풍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휘몰아쳤다.

그리고 그 성화는 바알의 몸속을 더더욱 크게 해집어 놓기 시작했다.

“이대로만 하면 될 것 같아요.”

작은 천사의 모습으로 승한의 옆에 붙어있는 붉은 천사 역시 반응이 긍정적이었다.

승한의 성화는 바알의 몸에 전혀 해를 끼치고 있지 않았다. 마기만을 태우고 있는 만큼, 모든 마기를 태우게 되면 바알이 다시 예전처럼 돌아올 확률이 컸다. 만약 그렇게 되면 승한도 스테이지를 통과할 수 있게 되고, 붉은 천사의 바람대로 악마가 되어버린 옛 고위 신을 되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바알은 자신의 몸속에 들어와 있는 승한을 어떻게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해서 몸속을 성화로 헤집어 놓기만 하면 되는 일. 승한은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

“네?”

“저걸 봐요.”

붉은 천사가 성화로 이글거리는 한쪽을 가리켰다. 승한은 무슨 일인가 싶어 붉은 천사의 작은 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화들짝 놀랐다. 새까만 벽면에서 흘러나온 검은 기류 같은 것이 서서히 뭉치고 있었다.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불길한 마기를 띄고 있는 것을 봐서는 그냥 두고 봐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승한은 바알의 몸속으로 들어와서 처음으로 듀란달을 뽑았다. 그러고는 듀란달에 성화를 가득 머금고 휘둘렀다. 목표는 뭉쳐진 검은 기류를 향해서였다.

솨악-.

승한의 검격은 검은 기류를 베지 못했다. 순식간에 사라진 검은 기류는 정 반대 방향에서 나타났다. 한 번 그것을 인식하기 시작한 승한은 검은 기류의 존재를 놓치지 않았지만, 자신의 검격을 피해 움직였다는 사실에 놀랐다.

“……저게 뭡니까?”

“아무래도… 바알인 것 같습니다.”

“저게요?”

검은 기류는 결코 작다고 볼 수 없었다. 거리가 꽤 떨어져 있어서 작게 보일 뿐, 족히 4미터는 넘어보였다. 그것이 작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알의 실제 크기를 알고 있는 만큼 너무 비교가 되어서일 뿐이었다.

검은 기류는 조금씩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머리를 만들고, 몸을 만들고, 다리를 만들었다. 그렇게 나타난 모습은 바알의 모습을 작게 축소해 놓은 듯했다.

분명 바알이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작은 모습으로 나타난 바알은 바로 승한을 공격하지 않고 잠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승한에게로 시선을 돌린 건 한참 뒤의 일이었다.

“고맙군.”

뜬금 없는 이야기.

승한은 영문을 몰라 물었다.

“뭐가 말이지?”

“정신을 차릴 수 있게 해 줘서 말이지. 마기에 잡아먹혀 자아를 잃고 미쳐 날뛰었으니 말이야. 네 덕분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바알의 말에 승한은 속으로 환호했다. 하지만 금세 이상한 점을 알 수 있었다.

‘아직 마기는 다 사라지지 않았는데……?’

아니, 단순히 사라지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승한이 정화시킨 마기는 바알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리 많은 양의 마기를 정화시켰다 해도, 이 거대한 덩치의 바알이 가지고 있던 어마어마한 양의 마기를 이렇게 빠르게 정화시킬 수는 없으니 말이다.

고작 이 정도 마기를 정화시켰다고 정신을 차렸단 말인가? 그것이 승한이 느끼는 모순의 정체였다.

“단순히 정신만 돌아왔을 뿐이에요. 아니, 정확히는 자아를 찾았다고 할까요?”

“아직 제정신으로 돌아온 건 아니고요?”

“네. 아마도요.”

승한은 다시금 바알을 바라봤다. 그는 웃고있었다. 웃으며 승한을 바라보고, 그 옆에 있는 붉은 천사와 자신의 몸속을 둘러봤다.

그 얼굴에는 언뜻 광기가 어려있었다.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도 붉은 천사나 아롤을 비롯한 신들과는 달리, 짙은 마기로 뭉쳐있었다.

“……악마네요.”

“네. 방금 전과는 달리, 자의식을 갖춘 악마죠.”

정화된 마기는 일부. 지금 눈앞에 있는 바알은 마기가 조금 정화되어서 그 마기에 의식을 먹히지 않은 악마였다.

“그래봤자 저 녀석은 본체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나?”

승한의 말에 바알이 그 말을 비웃었다. 붉은 천사 역시 회의적인 반응이었다.

“생각해 봐요. 본체가 아니라는 말은, 본체를 쓰러뜨리기 전까지는 죽지 않는다는 말과 같지 않아요?”

“……그렇긴 하네요.”

승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본체가 아닌 이상 쓰러뜨려봤자 큰 의미가 없었다. 눈앞에 있는 바알은 바알이 가지고 있던 마기의 덩어리일 뿐. 지금껏 힘없이 성화에 타들어가던 마기가 이제는 의식을 가지고 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쨌거나, 지금까지처럼 태우면 되는 것 아닙니까?”

“더 골치가 아파졌지만요.”

“이거 신과 인간이 재미있게 담소를 나누는 것도 보기 썩 나쁘지 않군.”

승한의 눈이 번쩍 떠졌다.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온 바알이 주먹을 휘둘러 오고 있었다.

쿠릉-!

바알의 주먹이 지나간 자리로 천둥소리가 터져 나왔다. 4미터에 육박하는 덩치. 결코 작은 덩치는 아니었다. 주먹이 승한의 얼굴보다 크고, 팔뚝이 승한의 허리만큼 두꺼웠다.

게다가 그 주먹에 실린 힘은 본체와 비교해서 약하다 싶을 뿐이었다. 아니, 덩치가 작아져 힘이 집중되는 정도를 보자면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말 할 때 때리는 건 좀 비겁하지 않나?”

“너도 알다시피 난 악마가 아닌가? 좀 비겁하다고 해서 욕 먹을 처지는 아니지.”

쿵-.

바알은 두 개의 주먹을 부딪치며 씩 웃었다.

“고맙다는 말을 전하지. 네 덕분에 이렇게 세상을 다시 구경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니까. 마기에 잡아먹혀 자아를 잃었을 때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부수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더군.”

“지금은 좀 상쾌해졌나?”

“그래. 네 덕이다. 적당히 마기를 정화시켜 줘서, 이렇게 정신이 맑아질 수 있었어.”

“넌 아직 정신 차리려면 더 맞아야 할 걸?”

바알은 스스로를 악마로 인식하고 있었다. 신과 악마의 사이에서 그의 의식을 자극하고 있는 기운이 마기가 월등히 강하기 때문이었다.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방금 전까지와 같았다. 바알의 형상을 이루고 있는 마기를 정화시키고, 이 공간과 바알의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마기를 정화시키는 것. 그렇게 되면 붉은 천사의 부탁대로 바알을 다시 신의 모습으로 되돌릴 수 있을 것이다.

화악-.

승한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알의 이야기를 더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강림]의 지속시간에도 분명 한계가 있을 터. 시간을 오래 끌어서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질 한 번 급하군.”

사악-.

사악, 사사삭-.

승한의 검은 빨랐다. 붉은 천사의 힘은 단순히 성화를 조종할 수 있는 권능뿐만이 아니었다. 몸을 성화로 만들어 이동할 수도 있었고, 무엇보다 신의 육체를 공유함으로서 신체적인 능력이 전반적으로 상승했다. 그 덕분에 승한은 이전보다 훨씬 더 빠르게 움직이고, 강하게 공격할 수 있었다.

승한의 검은 바알의 몸을 난도질했다. 성화가 맺힌 검이 그의 몸을 난도질 할 때마다 그의 몸이 잔상처럼 흔들렸다. 성검 듀란달과 성화가 그의 몸을 이루고 있는 마기를 정화하고, 베어냈다.

솨악-.

승한의 검이 바알의 머리를 베어냈다. 바알의 목이 검은 마기로 변하더니 다시 붙었다. 마기는 정화되었지만, 금방 다시 재생되는 것처럼 들러붙었다.

‘본체가 아니니 어쩔 수 없나?’

승한은 아무리 베어도 베어지지 않는 바알을 보며 질린 표정을 지었다. 너무 거대해서 베어도베어도 티가 나지 않던 바알의 본체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물론 끝은 있을 것이다. 바알의 마기도 무한하지는 않다. 저 작은 몸체를 이루고 있는 것은 거대한 마기의 덩어리. 차라리 넓게 퍼져있는 마기를 성화를 휘둘러 정화시키느니, 이렇게 한데 뭉쳐 있는 편이 수고는 덜할 것이다.

“이제 슬슬 좀 익숙해지는군.”

스스스스-.

승한은 갑작스럽게 등 뒤로 나타난 또 하나의 바알을 눈치 채고는 눈을 부릅떴다.

“싸움이라는 게 말이야.”

콰앙-!

승한의 몸이 날아올랐다. 고개를 뒤로 돌리는 것과 동시에 바알이 주먹을 휘둘러 턱을 올려친 것이다.

사사사사삭-.

어디선가 흘러나온 검은 마기가 승한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턱을 얻어맞아 정신이 없는 와중에 승한은 검을 크게 휘둘렀다. 승한을 향해 다가오던 검은 마기가 흩어지며 사라졌다.

“바알이… 둘?”

승한은 갑작스럽게 또 하나 나타난 바알을 번갈아봤다. 하긴, 애초에 본체가 아닌 마기의 덩어리로 이루어진 만큼 하나가 더 나타난다 해도 문제 될 건 없었다. 오히려 하나밖에 없는 게 이상할 따름이었다. 바알의 마기는 무한은 아니지만 무한에 가깝고, 그의 덩치를 생각해 보면 마기의 덩어리로 이루어진 바알은 너무나도 작았으니까.

승한은 얻어맞은 턱을 어루만졌다. 제대로 몸을 보호하지 못한 탓에 충격이 컸다. 아마 이전 같았다면 그대로 머리가 날아갔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둘이라… 조심해야겠어.’

아무리 힘이 강해졌다고 한들 둘을 상대로는 신경이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과 같은 공격을 얻어맞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뭘 그렇게 놀라지?”

바알은 놀란 표정의 승한을 보며 비웃었다. 주위를 빙 둘러보던 승한의 한숨을 더욱 깊어졌다.

“아무래도 선택을 잘못 한 것 같습니다.”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늦었어요.”

어느새 다시 승한의 옆으로 나타난 붉은 천사가 대답했다. 승한은 수백, 수천.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아진 바알‘들’을 보며 검을 겨눴다.

“이걸 다 어쩐다…….”

분신술을 사용한 것도 아니고, 하나밖에 없던 바알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이 가득 늘어나 있었다. 하나만 해도 죽지 않아서 골치가 아프다 생각했는데, 이 많은 수를 언제 다 일일이 쓰러뜨릴지 난감할 따름이었다.

‘수가 많아졌다면…….’

화륵-.

듀란달의 검신에 맺혀있던 성화가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듀란달의 새하얀 검신을 감싼 성화가 점점 더 그 모습을 유지하며 거대해졌다.

화르르르륵-.

10미터에 이르는 성화로 이루어진 거대한 거검. 많은 수의 바알을 상대하기 위해, 승한이 이 자리에서 바로 생각해 낸 방법이었다.

태우기만 해서는 안 된다. 태우면서, 함께 베어내야 한다. 형체가 없던 마기라면 모를까 그것이 형체를 갖췄다면 이 거검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무기가 될 것이다.

승한은 익숙하지 않은 듯 거검을 휘두르며 중얼거렸다.

“이거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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