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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죽은자
감각을 최고로 끌어올리고, 사방을 경계했다. 한 줌의 마기라도 닿지 않도록 하면서 사탄이 나타나는 즉시 반응해야 한다.
스스스-.
날이 선 감각에 무언가가 걸렸다. 승한은 몸을 놀리며 성화의 막을 만들었다. 동시에 반대 방향으로 빠르게 몸을 내뺐다.
파사사삭-.
마기 속에서 나타난 사탄의 손이 성화의 막을 꿰뚫었다. 성화의 색이 검게 물들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후우.”
승한은 한 차례 위기를 넘겼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기 속에서 손을 꺼낸 사탄은 뒤이어 얼굴을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이제 더 이상 수가 없는 모양이구나.”
지금껏 승한은 사탄을 상대로 여러 차례 반격을 해왔다. 두 번씩이나 공격을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진심이 되어 싸우기 시작했을 때에도 그의 기습을 간파해 반격을 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듀란달이라는 검이 사라지고, 움직임에 제약이 걸린 지금 승한은 반격은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기를 피해 움직이고, 어디서 나타날지 모를 사탄의 기습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것이 현재 승한의 한계였다. 승한 역시 알고 있었다.
자신 혼자서 사탄을 상대하기란 역부족이라는 것을.
“그럼 어디, 언제까지 네가 도망갈 수 있나 보자꾸나.”
사탄의 손길이 승한을 향해 뻗어왔다.
**
사악-, 파사사삭-.
스스스스스-.
승한이 휘두른 성화의 검을 사탄이 손으로 움켜잡았다. 그의 손에는 조금의 화상 자국도, 생채기 하나도 나지 않았다.
오히려 성화의 검이 검게 변하며 소멸해버렸다. 승한은 미련 없이 검을 버리고 새로운 성화의 검을 만들며 뒤로 물러났다.
“허억, 헉.”
벌써 몇 차례나 반복된 과정이었다. 덩달아 사방에서 날아드는 마기를 피해 아래로 몸을 날렸다. 방금 전까지 승한이 있던 자리는 마기의 덩어리로 가득 차버렸다.
어느새 다시 사탄의 모습은 사라졌다. 승한은 주위를 둘러봤다. 마기로 이루어진 공간 속에 자신이 들어와 있는 이상, 사탄이 어디서 나타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끈질긴 새끼…….”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사악-!
승한의 목덜미로 사탄의 손이 다가왔다. 화들짝 놀란 승한은 고개를 숙이며 손길을 피해냈다. 휘청거리듯 거리를 벌린 승한이 다시 몸을 돌리며 뒤쪽에서 나타난 사탄을 바라봤다.
사탄은 뿔과 함께 얼굴을 드러냈다. 마기와 동화된 그의 모습은 기구하기 짝이 없었다. 이미 꽤 여러 번 본 모습이지만, 익숙해지질 않았다.
‘벌써 몇 분째지?’
한 시간? 두 시간?
아니, 실제로는 십 분이 겨우 넘은 상태였다. 워낙 집중을 하고 있던 터라 시간이 오래 흐른 것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일분 일초가 더뎠다. 조금만 긴장을 늦추고 집중력이 떨어지면 그대로 소멸할 것이다. 저 손아귀에 잡히는 순간, 승한은 영혼조차 남지 않게 된다.
“슬슬 지치지 않으냐?”
사탄은 승한의 상태를 정확하게 싶어냈다. 어깨롤 숨을 쉬고, 황금색의 눈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이전보다 움직이도 더욱 굼떠졌다.
아직까지 사탄을 피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 용할 지경이었다. 사탄은 승한의 집요함에 넌더리를 쳤다.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생각했다. 육신이 신이 되었다면, 이미 평범한 인간이라 치부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정신력은 신이 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승한은 지금 보통 사람의 한계를 아득히 벗어난 정신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승한이 사탄을 피해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반 이상이 정신력이었다.
“대단하긴 하지만 그렇게 도망만 다녀서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 텐데?”
“……나라고 그걸 모르겠냐?”
승한은 다시금 성화의 검을 부여잡으며 사탄을 향해 겨눴다. 이미 수십 번은 반복한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그래도 순순히 죽어줄 순 없잖아?”
“……어리석구나.”
사탄은 마기 속으로 숨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마기 속에서 온 몸을 드러내고는 승한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애초에 사탄은 몸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정면으로 싸운다 해도, 승한은 사탄의 상대가 되질 못했다. 사탄이 자신의 몸을 보호하고자 한다면 승한은 그의 발끝도 건들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사탄은 마기에 몸을 숨겨 승한을 공격했다. 이미 그는 방심하다 승한에게 공격을 허용한 적이 있었다. 그 때문에 사탄은 승한을 인정했고, 다시 그런 상처를 입지 않도록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승한은 지치고, 힘이 많이 빠진 상태였다. 사탄은 정면에서 그와 싸운다 해도 전혀 위협이 되지 않다고 판단했다. 다 죽어가는 반쪽짜리 신을 상대로 몸을 숨기는 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승한은 사탄이 가까이 다가오자 뒤로 조금씩 물러났다. 하지만 승한이 뒤로 물러나는 속도보다 사탄이 다가오는 속도가 더 빨랐다.
“드디어 끝났구나.”
사탄이 손을 들어올렸다. 그대로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승한은 피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고, 사탄은 승한을 살려줄 생각이 없었다.
“왜…….”
승한의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왜 이리 늦었습니까?”
그 순간, 사탄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푸욱-!
새하얀 검신이 그의 목젖을 꿰뚫었다.
**
승한은 방금 전보다 훨씬 빨라진 속도로 사탄과 거리를 벌렸다. 아무리 목젖이 검에 꿰뚫렸다지만 그 정도로 사탄이 죽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반면 사탄이 마기를 머금은 손을 뻗는 순간, 승한을 죽을 수밖에 없었다.
사탄의 목젖을 꿰뚫은 검. 승한은 그것을 보다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성화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그 검, 다른 사람 손에 있으니 영 어색하군요.”
“원래 내 검이다, 이건.”
성검 듀란달. 그것으로 사탄의 목을 꿰뚫은 것은 바로 아롤이었다. 새하얀 순백의 갑옷을 입은 그의 난입에 사탄은 이를 악물었다.
“네놈…….”
화아악-!
사탄의 몸에서 거센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역시나, 목을 꿰뚫은 정도로 사탄을 죽일 수는 없었다. 아롤은 목에 꽂아 넣은 듀란달을 크게 휘둘렀다.
촤악-!
목을 꿰뚫은 듀란달이 사탄의 목을 반 정도 베어냈다. 사탄의 목이 덜렁거리며 마기가 폭주하던 마기가 흔들렸다. 아롤은 사탄과 거리를 벌리며 승한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저거 아직 안 죽었는데?”
“이 정도로 죽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생각 이상이었다. 기습이라고는 하지만 사탄의 목을 꿰뚫었다. 사탄의 관심이 온통 자신에게로 팔려 있었던 덕분이었다.
사탄의 목은 기구한 방향으로 꺾여있었다. 반 이상 잘려나간 목이 온전할 리가 없었다. 다른 악마들과는 달리, 사탄의 몸은 제대로 빠르게 재생이 되지도 않았다.
“사탄을 속여먹을 생각을 한 녀석은 네가 처음일 거다.”
“이런 거라도 안 하면 저 녀석을 어떻게 이깁니까?”
만약 사탄이 아롤의 존재를 미리 알고 있었다면 저런 꼴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화를 두른 검조차 막아내던 사탄이, 순수한 검으로 찌른 일격에 당한다는 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듀란달은 소멸한 게 아니었다. 듀란달은 애초에 승한에게 귀속된 검이고, 승한이 마음먹기에 따라 언제든지 사라지게 할 수 있었다. 승한은 듀란달이 사탄의 마기에 소멸하기 직전에 다시 듀란달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사탄은 그것을 듀란달이 자신의 마기에 소멸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승한은 그런 사탄의 착각을 작은 틈으로 이용했다.
“네놈들… 감히…….”
“덜렁거리는 목으로 저렇게 말하니 참 역겹네.”
아롤은 승한에게 듀란달을 건넸다.
“이제 네가 써라.”
“감사합니다.”
승한은 [강림]을 사용해 아롤의 힘을 받아들였다. 방금 전의 기습을 위해 지금까지 아롤의 힘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지만, 기습이 끝난 지금에는 거리낄 게 없었다.
아롤과 함께 싸우는 것도 좋지만 아롤이 가진 힘과 성화의 힘, 그리고 [증폭]의 힘은 조합이 잘 맞았다. 따로 싸우는 것보다는 승한이 듀란달을 손에 쥐고, 그 힘들을 한데 모으는 것이 더욱 효율적이었다.
사탄의 안광이 붉게 번뜩였다. 승한은 그 눈빛을 보며 질겁해서 뒤로 물러났다.
‘화가 많이 난 모양인데요?’
‘목이 썰렸는데, 안 나는 게 이상하지. 저 녀석이 성인군자도 아니고.’
맞는 말이었다. 이전보다 훨씬 거칠어진 기세는 그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승한은 씩 웃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이제 혼자가 아니라는 건가?”
승한의 중얼거림에 사탄이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나서야 근처에 있는 게 자신과 승한만이 전부가 아님을 알아차렸다.
우웅, 우우웅-.
사탄과 승한의 주위를 둘러 싸고 있는 수십 명의 신들. 그들은 바로 승한을 비롯한 헌터들이 에덴의 땅을 밟았을 때 만났던 신들이었다.
하나같이 고위 신급의 존재들. 아롤은 혼자서 승한과 함께 사탄을 상대하겠다고 온 게 아니었다. 사탄을 상대하기 위한 충분한 전력을 모아서 온 것이었다.
‘다른 악마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몇 놈이 손을 써 놓은 모양이야. 길진 않겠지만, 당분간 이 주위로 다른 악마들은 못 들어와.’
사탄과 승한, 그리고 신들의 주위로는 수 키로미터 반경의 거대한 황금색의 막이 펼쳐져 있었다. 수십 명의 고위 신들이 힘을 모아서 만들어낸 막은 악마들의 침입을 거부할 수 있었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바로 사탄의 힘이었다. 아무리 수십 명의 고위 신들이 함께 만들어낸 막이라지만, 사탄의 마기로부터 얼마나 버텨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었다면… 그걸로 됐습니다.”
상황이 변했다. 승한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사탄은 주위로 몰려든 신들을 보며 일그러진 입매를 씰룩였다. 그 웃음이 어떤 의미인지는 곧 그의 입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떼로 몰려오면, 뭔가 달라질 것이라 생각했느냐?”
수십 명의 고위 신들의 가운데서도 사탄은 전혀 겁먹은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미련하구나! 영생을 허락받은 신이라는 존재가 이리 미련하다니. 너희는 나를 잘 모르는 모양이구나.”
-우리는 당신을 알고 있다.
신들의 목소리가 사방을 뒤흔들었다. 수십 명의 신들이 힘을 흘려보냈다. 사탄의 마기와 수십의 고위 신들의 힘이 부딪혔다.
파즈즈즈즉-.
쿠르릉-!
두 가지의 상반된 힘이 부딪히자, 그 주위로 힘의 파편이 튀었다. 밀리는 것은 신들이었다. 한 명의 개인이라지만, 사탄의 힘은 그만큼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던 승한을 확신할 수 있었다.
‘약해졌어.’
처음 사탄을 마주했을 때, 승한은 그의 힘이 어디까지인지 끝을 볼 수 없었다. 아무리 거대한 힘이라도 그의 마기에 닿는 순간 그 즉시 소멸해버리고, 그렇기에 도저히 상대할 엄두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사탄은 몇 번의 치명상을 입었다. 승한에게 두 차례, 그리고 아롤에게 한 차례. 그리고 그렇게 입은 상처는 아직까지 회복되지 않고 있었다.
사탄의 능력은 죽음에 관련된 모든 힘이었다. 그것은 절대적이지만, 반대로 치료와 관련된 힘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다른 악마들은 스스로의 상처를 빠르게 회복할 수 있다. 사탄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절대 다치지 않을 수 있었지만, 다치게 된다면 그것을 회복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가능성이 있어.’
사탄과 싸우기 시작하고 처음으로 희망이 보였다. 승한은 듀란달을 움켜잡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간.
그 때, 승한의 발걸음을 잡으며 한 신이 곁으로 다가왔다. 황금색의 투구를 뒤집어 쓴 신을 돌아본 승한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내 이야기를 잠시 들어볼 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