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혈룡전 2권 (26화)
1장 피의 저주 (1)/
백삼십오 년 전 안휘(安徽) 황산(黃山) 혈교의 본거지.
시체의 산(屍山)과 피의 바다(血海) 한가운데 진운룡이 석상처럼 서 있었다.
진운룡을 제외하고는 주위에 살아 있는 생명체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검을 든 그의 손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한참을 움직임이 없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대체, 내가 무슨 일을…….’
역겨운 피 냄새가 그의 속을 온통 뒤집어 놓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란 말인가.
혈마를 죽인 순간 알 수 없는 기운들이 자신의 몸을 강타했고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한데 정신을 차려 보니 지금 이 상황이었다.
사방이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진운룡의 옷은 본래부터 붉은색이었던 것처럼 피에 젖어 끈적였다.
구역질 날 정도의 불쾌감이 진운룡의 가슴 한구석으로부터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마치 수천 마리의 벌레가 온몸을 기어가는 듯한 느낌에 진운룡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스으윽!
순간, 그의 손과 옷에 묻는 피가 피부로 빨려 들어왔다.
우우우웅!
구구구구!
동시에 대기가 진동하고 땅이 흔들리더니, 사방에서 핏방울들이 허공으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슈슈슈슈슈!
촤촤촤촤촤!
핏방울들은 마치 살아 있는 듯 꿈틀대며 천천히 진운룡을 향해 다가왔다.
뭉쳐지거나, 길게 늘어나며 점점 핏방울들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진운룡은 머리털이 솟아오르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그의 눈동자가 점점 붉게 변했다.
덜덜덜덜!
자신도 모르게 턱이 떨려 왔다.
슈슈슈슉!
순간, 수십, 수백의 핏줄기들이 진운룡을 향해 쏘아져 왔다.
촤아아아아악!
수백 가닥의 핏줄기들이 빠른 속도로 진운룡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마치 진운룡을 중심으로 거대한 붉은 거미줄이 펼쳐진 것 같았다.
“으으으으……!”
이유를 알 수 없는 증오와 광기가 진운룡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모든 것을 파괴하고 모든 생명체를 말살하고 싶은 참을 수 없는 욕망이 진운룡의 정신을 지배했다.
‘크으으으! 다 죽여 버리겠다! 너희의 피를 맛보고 너희의 살을 씹어 삼키겠다!’
폭발할 듯 거대한 광기에 진운룡의 의식이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때였다.
“운룡! 정신 차려요!”
목소리 하나가 그의 머릿속을 때렸다.
‘여령!’
희미해져 가던 진운룡의 의식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 * *
오랜 기억을 되짚던 진운룡이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눈으로 소은설을 바라봤다.
“너의…….”
천천히 진운룡의 입술이 열렸다.
“피가 필요해.”
소은설이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피, 피라니요?”
그녀의 머릿속은 몹시 혼란스러웠다.
피를 달라니, 왠지 소름끼치고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진운룡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왜? 순결을 주는 것 보다는 훨씬 나은 제안일 텐데?”
확실히 그 말은 맞았다.
소은설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는 스스로를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 내가 지금 무슨!’
왠지 자꾸 진운룡에게 말려드는 듯한 느낌이었다.
‘저, 정신 차리자!’
짜악!
소은설이 자신의 두 뺨을 찰싹하고 때렸다.
순간, 진운룡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홍조가 이는 두 뺨, 살짝 흔들리는 눈꼬리까지 소은설은 너무도 그녀와 닮아 있었다.
진운룡이 처음 세상에 나오게 된 이유가 되었던 여인.
그리고 지금은 눈앞의 여인이 자신을 세상으로 다시 끌어냈다.
두 여인의 얼굴이 겹쳐지며 진운룡의 심장이 뜨거워졌다.
진운룡은 순간 소은설의 입술에 입맞춤하고 싶은 유혹을 간신히 이겨 냈다.
“왜? 싫은가?”
진운룡이 흔들리는 마음을 감추며 무심한 얼굴로 물었다.
“아, 아무리 그래도 피를 달라니……. 대체 내 피가 왜 필요한 거죠……?”
소은설이 진운룡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물었다.
잠시 턱을 어루만지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던 진운룡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의 피를 흡수하지 않으면 점점 돌로 변해 버리는 저주에 걸렸거든.”
소은설은 진운룡이 농담을 하는 것인지 진실을 말하는 것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워낙 평소에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를 수시로 늘어놓는 통에 신뢰도가 떨어진 탓이다.
“그게 말이 되는 이야기예요? 나 참, 이 오밤중에 찾아와서 기껏 허튼소리나 늘어놓다니 당신도 정말 병이네요. 병!”
소은설은 결국 진운룡이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껏 자신을 놀린 것이리라 여긴 것이다.
“물론 니가 제법 놀리는 재미가 있긴 하지만, 이번 이야기는 안타깝게도 모두 사실이야. 게다가 이미 저주가 발동되기 시작했지.”
진운룡이 자신의 오른쪽 손등을 내밀었다.
소은설의 눈이 동그래졌다.
진운룡의 손등에는 검은 핏줄이 마치 거미줄처럼 퍼져 있었다.
“이, 이게 뭐죠?”
“피가 굳어 가고 있는 거야. 먼저 피가 굳고 그다음에 피부와 장기가 굳고, 결국엔 모두 돌이 되어 버리는 거지.”
소은설이 진운룡의 눈과 손등을 번갈아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이번에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저, 정말인가요?”
진운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소한 오 일에 한 번은 인간의 피를 흡수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점점 석화가 진행되지.”
“그, 그럼 그동안은 어떻게 버틴 거죠?”
“일단 동물의 피로 석화의 진행을 늦추었어. 하지만 그것도 이젠 한계군.”
소은설은 그제야 진운룡이 밤에 사냥을 나갔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피를 흡수하지 못하면 돌로 변하다니…….”
소은설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눈으로 진운룡을 바라봤다.
그때, 소은설의 기억에 혈귀곡에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혈귀가 살고 있다던 소문이 떠올랐다.
“호, 혹시 그럼 당신이 혈귀인 거예요?”
“혈귀? 그건 또 무슨 소리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진운룡이 두 손을 들어 올렸다.
“혈귀곡의 주인이자 혈귀곡에 살고 있다는 피를 빨아먹는 괴물이 바로 혈귀예요.”
“글쎄…….”
무언가 닿지 않는 먼 곳을 바라보듯 진운룡의 시선이 허공에 멈췄다.
―운랑……. 당신은 괴물이 아니에요.
너무도 그리운 목소리가 진운룡의 머릿속에서 속삭였다.
그녀로 인해 지옥 같은 저주를 버텨 낼 수 있었다.
진운룡의 입가에 아련한 미소가 걸렸다.
“내가 그곳의 주인이라는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나는 그곳에 있는 동안 한 번도 피를 마시지 않았어. 어차피 혼원구궁마라진 때문에 그곳은 인간이 들어올 수 없었거든.”
“하지만 저는 들어갔잖아요? 그리고 그 무덤의 주인도…….”
소은설은 순간 진운룡의 눈동자에 슬픔이 어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슬픔은 너무도 빨리 사라져 버려서 그녀의 머릿속에서도 순식간에 지워졌다.
진운룡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그 무덤의 주인은 혈귀곡을 만든 장본인이야. 아니, 너희가 혈귀곡이라고 부르는 곳은 원래 내가 살던 곳이고, 그녀는 혼원구궁마라진을 만들었지. 그러니 당연히 진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어.”
진운룡의 시선이 다시 소은설에게로 향했다.
어느새 그의 두 눈은 평상시처럼 무심하게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네가 그곳에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 천령안을 타고났기 때문이야. 천령안은 모든 진법과 기운의 흐름을 꿰뚫어 볼 수 있거든.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길이 너에게 보이는 이유지.”
소은설로서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이야기였다.
모든 진법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을 타고나다니, 그런 게 과연 존재한다는 말인가.
‘하기야 예전부터 도둑질할 때, 내가 함정이나 그런 걸 잘 찾아내기는 했어.’
생각해 보니 아버지 소진태도 그런 자신을 신기한 모습으로 바라보곤 했던 기억이 있었다.
“가만! 그렇다면 당신은 혈귀곡이 생겨날 때부터 그곳에 있었다는 말인가요?”
소은설이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소리쳤다.
진운룡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자면 그는 최소한 혈귀곡에 진이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그곳에 있었다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내가 좀 나이가 많다고 했을 텐데?”
진운룡이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진실을 말해도 믿어 주지 않는다면 그로서도 방법이 없었다.
“그, 그럼 백 살이 넘었단 말이에요?”
“혈귀곡에 혼원구궁마라진이 펼쳐지기 전에 이미 백 살이 넘은 상태였으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백 살이 넘었다고 해야겠지.”
꿀꺽!
소은설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진운룡을 바라봤다.
그게 사실이라면 진운룡은 정말 반로환동의 고수였던 것이다.
문득 소은설의 머릿속에 혈귀곡에서 진운룡이 혈마를 죽였다고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럼 그 혈마가 백수십 년 전 혈마!’
정확치는 않지만 백 년도 훨씬 전 혈마라면 전설처럼 전해지는 괴물이 하나 있었다.
당시 무림을 피로 물들이다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는 고금 제일의 대마두.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가 죽인 무인들의 수가 만 명을 훌쩍 넘겼고, 그의 손에 무너진 문파와 가문이 수백에 달했다고 한다.
그런 혈마를 진운룡이 죽였다는 이야기였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소은설로서는 진운룡의 능력이 도무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너무 많은 충격이 한꺼번에 몰려오다 보니 이제는 더는 놀랍지도 않았다.
반면 그토록 충격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인 진운룡의 반응은 너무도 담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