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혈룡전 2권 (27화)
1장 피의 저주 (2)/
“그래, 결정은 했나?”
귓가로 들려온 진운룡의 목소리에 소은설이 정신을 차렸다.
다른 복잡한 이야기들은 접어 두고 어찌 되었든 지금 진운룡이 원하는 대가는 소은설의 피였다.
조금은 섬뜩하고 두려운 일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피를 내어 주면 아버지를 찾을 수 있을 때까지 시간제한 없이 어디를 가든 진운룡이 그녀를 도울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그의 도움이 없이도 아버지를 찾을 수 있을까?’
진운룡의 도움이 있다 해도 아버지를 찾는다는 보장이 없는 상황에서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그녀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소은설이 불안한 눈으로 진운룡을 바라봤다.
혈귀곡 주변에서 목내이가 된 시신들이 발견되었던 것이 생각났다.
“피를 빼앗기면 저는 어떻게 되나요?”
그녀의 목소리는 두려움 때문인지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 두려워할 것 없어. 밥 그릇 하나 정도의 양만 있으면 충분하니, 잠깐 어지러울 수는 있지만 너에게 큰 해가 되지는 않을 거야.”
차분한 목소리로 진운룡이 소은설을 안심시켰다.
소은설이 입술을 깨물며 결심을 굳혔다.
“좋아요. 제 피를 드리겠어요.”
순간 진운룡의 눈동자가 묘하게 빛났다.
그의 눈빛은 마치 소은설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 강렬하면서도 무거웠다.
“좋아, 나도 너와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도록 하지.”
진운룡이 천천히 소은설에게 다가왔다.
소은설은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고개를 기울여 가냘픈 목덜미를 드러냈다.
진운룡이 자신의 목을 물고 피를 빤다고 생각하니, 왠지 소름이 끼치면서도 묘한 흥분이 그녀의 온몸을 자극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빳빳하게 서는 듯한 느낌에 그녀가 살짝 몸을 떨었다.
진운룡의 입김이 그녀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따끔!
“윽!”
그때, 갑자기 그녀는 손목에서 따끔한 통증을 느꼈다.
깜짝 놀라 눈을 뜬 소은설의 시야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진운룡의 얼굴이 보였다.
“설마, 내가 네 목을 물어뜯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만일 그렇다면 실망시켜서 미안한걸?”
“헉!”
순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소은설은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켰다.
손목으로부터 핏줄기가 허공으로 솟아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비리기만 한 피를 내가 왜 입으로 마시겠어?”
우우우웅!
진운룡이 오른손을 펼치자 허공으로 솟구친 핏줄기가 길게 늘어지며 손바닥 중앙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렇게 쉬운 방법이 있는데…….”
진운룡의 눈동자가 노랗게 변했다.
동시에 핏물이 빠른 속도로 진운룡에게 빨려 들어갔다.
소은설은 약간의 현기증을 느꼈다.
진운룡의 말처럼 처음의 통증이 지나자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기분이 온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술에 취한 듯 몽롱하면서도, 의식이 점점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아! 이 기분은 뭐지?’
손목으로부터 시작된 기이한 쾌감이 그녀의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으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토해 냈다.
스슷!
그러다 어느 순간 모든 느낌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길게 늘어서 있던 핏줄기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고, 소은설의 손목에는 아주 작은 핏자국만 남아 있었다.
피의 흡수가 모두 끝난 것이다.
“아……!”
소은설의 입에서 아쉬움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마치 아이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빼앗긴 느낌이었다.
“나름 나쁘지는 않았나 보지?”
진운룡의 목소리에 그제야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소은설이 얼굴을 붉혔다.
“그, 그게 아니라…….”
“굳이 해명하려 할 필요는 없어. 원래 피를 흡수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니까. 내가 악의를 가지고 억지로 피를 뽑아낼 경우라면 전혀 다른 느낌이었겠지만 말이지.”
만일 후자의 경우라면 초가장 호위단장 진화가 겪었던 공포와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이 정도면 더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겠지?”
확실히 이 정도라면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 묘하게 흥분되는 느낌은 소은설을 곤란하게 했다.
‘나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다니…….’
신음이라기보다는 여인의 교성에 가까운 소리를 과년한 처녀가, 그것도 외간 남자 앞에서 흘렸다는 것을 생각하니 당장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용기를 낸 소은설이 입을 열었다.
“한데, 왜 꼭 제 피가 필요한 거죠?”
인간의 피라면 누구의 피를 마셔도 상관이 없을 터였다.
굳이 계약을 맺으면서까지 그녀의 피를 원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물론, 억지로 다른 사람의 피를 마시는 것이 싫어서일 수도 있지만, 진운룡의 성격상 전혀 그런 것을 고려할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정 양심에 걸린다면 악당들의 피를 마시거나 돈을 주고 사든가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진운룡은 잠시 소은설을 바라봤다.
과연 그 이유를 그녀에게 말해 줘야 할까 잠시 망설였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들은 어찌 보면 그에게는 약점이 될 수도 있는 내용들이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굳이 약점이라고 할 수도 없지…….’
결정을 내린 진운룡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피는 부작용이 없기 때문이야.”
“부작용…… 요?”
“그래, 인간의 피를 마시게 되면 내 몸속에 마기(魔氣)가 점점 쌓이게 되거든. 마기가 쌓이면 차츰 자아를 잃고 광기에 휩싸이게 되지. 결국, 종국에는 내가 바로 또 다른 혈마가 되어 버리고 마는 거야. 하지만 네 피는 아무리 흡수해도 전혀 마기가 쌓이지 않아. 아니, 오히려 쌓인 마기를 소멸시키더군.”
“가, 가만! 지금 그 이야기는?”
소은설이 정색을 했다.
그것을 안다는 것은 언젠가 그녀의 피를 흡수해 봤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도, 도대체 언제 내 피를 흡수한 거죠?”
혹시 자신이 잠든 사이에 몰래 뽑아 간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쓸데없는 오해는 사양하지. 네가 처음 혈귀곡에 들어왔을 때 넌 상처를 입은 상태였고, 혼몽연(昏夢煙)에 취해서 내 앞에서 쓰러졌지. 그때, 흘러나온 피가 석화된 나를 깨우게 된 거야.”
소은설의 머릿속에 어렴풋이 그 당시 상황이 떠올랐다.
하얀 길, 모옥, 그리고 꿈속에서 본 듯한 석상…….
‘맞아! 그때 무슨 석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진운룡이 분명 피를 흡수하지 못하면 돌로 변하게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때 비몽사몽간에 봤다고 느꼈던 석상의 정체가 진운룡이었던 게 분명했다.
아마도 소은설의 상처에서 흐른 피가 진운룡을 다시 깨운 모양이었다.
“호, 혹시, 그럼 처음부터 피 때문에 절 따라 나온 건가요?”
소은설이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그것도 이유들 중 하나지.”
물론, 그것만이 그녀를 따라 세상에 나온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으나, 진운룡은 굳이 따로 설명하지는 않았다.
다른 이유들을 말하기 위해선 자신의 과거를 끄집어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그에게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소은설은 이제야 그동안 진운룡의 말들과 행동들이 모두 이해가 갔다.
아마도 그는 지금껏 진실을 이야기했을 것이다.
단지 너무도 허무맹랑한 이야기였기에 그녀가 믿지 못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소은설은 어쩐지 속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진운룡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다거나 그녀를 이용해 먹었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진운룡이 자신에게서 피를 억지로 빼앗은 것도 아니었다.
자신에게 허락을 구했고, 공정한 계약을 맺었다.
여러 면에서, 어찌 보면 그녀에게는 더욱 잘된 일이다.
서로에게 필요하다는 것은 믿음에만 기대는 관계보다는 훨씬 견고할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쩐지 서운한 느낌이 드는 것은 그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휴……. 얼마나 자주 피를 흡수해야 되는 거죠?”
소은설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원래 오 일에 한 번은 인간의 피를 흡수해야 하지. 하지만 동물의 피를 흡수하면서 버티면 열흘까지는 부작용이 나타나지 않아. 피를 흡수한 지 이미 열흘을 넘긴 상태라 이렇게 석화가 진행되기 시작한 거야.”
그렇다면 최소한 오 일에 한 번, 동물의 피를 흡수할 경우라 해도 열흘에 한 번씩은 오늘과 같은 경험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래도 순결을 잃는 것보단 낫잖아?’
소은설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어느새 본래의 씩씩한 그녀로 돌아와 있었다.
어쨌든 오 일에 한 번씩 피를 주면 이백 살이 넘은 절대고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약간의 현기증 외엔 그녀의 몸에 큰 문제가 벌어지는 것도 아니니, 그녀로서는 상당히 남는 장사였다.
“오늘 들은 이야기들은 당분간 너와 나만의 비밀로 하기로 하지.”
그때, 진운룡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어차피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한다 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기에 소은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