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혈룡전 2권 (29화)
1장 피의 저주 (4)/
모용주란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녀가 알기로 진운룡은 현재 아무런 소속이 없었다.
그것은 곧 어디에나 소속될 수 있다는 이야기와도 같았다.
만일 그를 모용세가로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엄청난 전력이 될 것이 분명했다.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진운룡과 친교를 만들어 보려 애쓰고 있는데, 도무지 진전이 없었다.
“대체 왜 아무런 반응도 없는 거지? 그자는 사내도 아니란 말이야?”
모용주란의 고운 아미가 찌푸려졌다.
이제껏 자신의 미모에 이토록 무관심한 이는 처음이었다.
유혹도 해 보고, 애교도 떨어 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봤지만 진운룡은 요지부동이었다.
무림오화 중 하나로 꼽히는 그녀에게는 무척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더욱 화가 나는 것은 그렇게 자신에게 무심하고 무감각한 진운룡이 소은설에게는 전혀 다르게 대한다는 사실이었다.
웃고, 화내고, 심지어는 농담까지 주고받았다.
게다가 그녀의 아버지를 구하는 일도 돕고 있었다.
대체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의문이었다.
“내가 그 계집보다 부족한 게 뭐야!”
아미를 추켜올린 모용주란이 짜증 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다른 여인에게, 그것도 보잘것없는 하오문 계집에게 밀리다니 그녀에게는 참을 수 없는 굴욕이었다.
“진운룡! 뭐가 그리 잘났기에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거지? 흥! 내가 이대로 물러설 줄 알고? 무슨 수를 쓰든 반드시 당신을 굴복시키고 말겠어!”
모용주란의 두 눈동자에 불길이 일었다.
* * *
제남에 도착한 지 엿새째 되는 날.
저녁 무렵 소은설이 진운룡의 숙소로 다급히 찾아왔다.
덜컹!
“하오문 제남 분타에서 연락이 왔어요!”
허겁지겁 방문을 열어젖힌 소은설이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그래? 흔적을 찾았다는 건가?”
“네!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분타로 급히 부르는 것을 보면 틀림없어요.”
소은설의 얼굴은 기대감으로 인해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지금 당장 갈 생각인데 괜찮죠?”
“물론.”
진운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빨리 가요!”
미처 진운룡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소은설이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 * *
하오문 제남 분타는 천운상회라는 도박장 지하에 위치해 있었다.
제남 분타장은 안책 이라는 오십대 사내였는데, 천운상회의 주인이자 꽤 실력 있는 도박사였다.
그는 둥근 얼굴에 전체적으로 살집이 있는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어서 오너라! 아버지 때문에 걱정이 많지?”
안책은 소은설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소진태와 안책은 예전부터 총회나 분타끼리 의견을 조율할 일이 있으면 자주 만나기도 했거니와 가끔 술도 함께하던 친밀한 사이였다.
해서 이번 일에도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고 있었다.
“그나저나 요즘 진 공자 때문에 제남이 상당히 떠들썩하더군.”
안책의 시선이 진운룡에게로 향했다.
어느새 진운룡의 능력에 대한 정보가 하오문에도 전해진 모양이었다.
하기야 천하에서 가장 많은 정보가 오고 가는 곳이 바로 하오문이었기에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찾았다는 거나 봅시다.”
진운룡은 귀찮다는 듯 안책의 관심을 무시했다.
“죄, 죄송해요. 원래 성격이 이러니 아저씨가 이해 좀 해 주세요.”
큰 도움을 받고 있는 입장인 소은설이 급히 나서서 진운룡의 무례를 사과했다.
“하하하, 괜찮다. 진 공자 정도의 고수라면 원래 주위를 잘 신경 쓰지 않는 법이지. 어쨌든 진 공자 말대로 우리가 찾은 것을 보여 주마. 따라오거라.”
강호라는 곳이 본래 나이보다는 무공의 고하로 그 지위와 권위를 인정받는 곳이었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기이이이잉!
순간, 기관음과 함께 안책 뒤쪽의 벽이 회전하며 또 다른 공간이 드러났다.
채 열 평도 안 되는 작은 석실 안에는 두루마리와 서책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석실로 들어선 안책이 왼쪽 구석 편에 있던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펼쳐 들었다.
소은설과 진운룡의 시선이 두루마리로 향했다.
“제남을 오가는 모든 움직임은 우리의 눈을 벗어날 수가 없지. 문제는 워낙에 그 수가 많다는 거야. 그중에 어떤 것이 네 아버지와 관련이 있는지 찾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지. 해서 일단은 여러 조건을 설정해서 범위를 줄였다. 첫째로 네 아버지를 납치한 자들이 이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바로 육로와 황하를 이용한 배편이지. 육로를 이용했을 경우 놈들이 옮겨야 할 인원과 규모를 감안해 봤을 때, 짧으면 육 일, 길게는 구 일 정도가 걸린다. 배편으로 이동했을 경우 바람에 따라 열사흘에서 보름 정도. 요즘 날씨를 감안했을 때, 아마도 보름 정도 소요됐을 것으로 생각한다. 우선은 그 날짜에 제남으로 들어온 배편과 수레, 혹은 마차들을 위주로 조사를 했지.”
잠시 숨을 돌린 안책이 다시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여섯 명의 사람과, 약품에 담긴 백 개의 심장을 옮기려면 그 규모가 제법 커야 하니, 작은 규모의 움직임들은 제외했다. 세 번째로 되도록 은밀히 움직여야 할 테니, 운송하는 화물들을 외부에 노출시킨 경우도 제외하고……. 이렇게 하고 나니 육로는 모두 일곱 건, 배편으로는 모두 세 건의 운송이 남더군.”
소은설은 뭉클한 마음이 들었다.
수천 건이 넘는 움직임들을 파악해 열 건으로 좁히기까지 안책과 제녕 분타 문도들이 상당한 고생을 했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 육로는 모두 제남표국으로 가는 화물들이었다. 제남표국은 우리 문도들도 몇 쟁자수로 들어가 있기에 화물의 내용물을 알아내는 것은 큰 무리가 없지. 만일 문도들이 알아내지 못할 정도로 비밀리에 운송했다면 그것은 무척 수상한 화물임이 분명해.”
가끔 의뢰자가 화물의 내용을 밝히지 않고 비밀리에 운송을 맡기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 그런 경우는 표국에서 의뢰를 맡지 않았다.
표물의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는 것은 곧 그만큼 위험하고 수상한 물건이라는 이야기였다.
표국에서 가장 중요시 하는 것이 바로 안전이었기 때문에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의심스러운 일에 말려들 이유가 없는 것이다.
“어쨌든 그 일곱 건의 운송은 모두 정상적인 표행이었음을 확인했지.”
그렇다면 이제 배편으로 들어온 세 건의 움직임만 남았다.
“세 건의 배편 중 한 건은 조사 결과 소금을 밀수하던 배였다. 그래서 은밀하게 화물을 숨겨 들여온 것이었지. 그래서 나는 나머지 두 건의 배편 중 하나가 네 아버지 납치와 관련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소은설의 얼굴에 기대감이 어렸다.
“그 두 배편의 화물을 받은 자가 누구죠?”
화물을 수령한 곳을 조사하면 아버지를 찾을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물론, 소진태가 아직 살아 있을 경우에 한해서지만…….
“두 곳 모두 상당히 수상한 곳이야. 한 곳은 염상인 방염이라는 자인데, 우리가 그동안 조사한 정보에 의하면 천사교와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높은 자야.”
“천사교?”
천사교라는 말에 진운룡이 관심을 보였다.
“천사교라면 얼마 전 천미각에서 얼핏 봤던 그 이상한 광신도들 아니에요?”
소은설도 기억을 해냈다.
당시 그들은 탐관오리와 간신들을 욕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원하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한데, 그런 자들이 부패와 탐욕이라는 단어와 가장 어울리는 염상과 관계가 있다니 무척 모순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역시 무언가가 있군…….’
진운룡의 눈동자가 빛났다.
어쩐지 천사교가 그저 백성들이나 선동하는 사이비 종교가 아닐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자네들도 벌써 본 모양이군? 요즘 그들 때문에 산동 전체가 소란스럽지. 민란의 배후에도 그자들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네. 그런데도 이상한 것은 관에서 전혀 그들에 대해 제지하지 않고 있다는 거야.”
안책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확실히 수상하네요.”
소은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안책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다른 한 곳은 천향루라는 기루인데, 제남에서 유일하게 하오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지.”
하오문의 손이 닿지 않는 기루라니 좀처럼 상상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그것은 곳 그곳에서 일하는 점소이나 숙수, 기녀, 기도들까지 하오문과 연관된 이가 하나도 없다는 이야기였다.
처음부터 자기 사람들로만 채워 넣은 것이 아니라면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곳에서 일하는 자들은 모두 무공을 익히고 있어. 심지어는 기녀와 점소이까지도 무공을 가지고 있지. 누군가가 배후에 있는 것이 분명해.”
하오문과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점소이까지 무공을 익힌 기루라.
확실히 천향루 역시 방염이라는 자만큼이나 수상한 곳이었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천향루의 화물이 무척 수상하다는 거야.”
안책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어렸다.
“수상하다니요?”
“부두에서 일하는 우리 문도 중 하나가 배에서 내리던 수레 안에서 인기척을 들은 것 같다고 했거든.”
“저, 정말인가요?”
소은설이 상기된 목소리로 물었다.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확인해 볼 필요는 있지.”
“그럼 천향루부터 확인해야겠군.”
일단은 화물이 사람이 가능성이 있는 천향루 쪽을 조사해 보는 것이 먼저였다.
“한데, 어떻게 확인할 생각인가? 혹여 도움이 필요하면 이야기하게. 우리 문도들을 지원해 줄 테니.”
“나 혼자 움직이는 게 편하오.”
“하기야 자네 정도의 고수라면…….”
안책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오문 무사들의 수준으로는 오히려 진운룡이 움직이는 데 걸리적거리기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애써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이 은혜 잊지 않을게요.”
소은설은 안책에게 감사 인사를 한 후 진운룡과 함께 천운상회를 나왔다.
어느새 밖은 어둠이 내려 있었다.
진운룡은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오늘밤 끝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나는 곧장 천향루로 향할 테니, 넌 일단 세가로 돌아가 기다리고 있어.”
“혼자 간다구요? 안 돼요! 저도 갈 거예요.”
소은설이 펄쩍 뛰며 반발했다.
“그곳에 네 아버지가 있다는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어.”
진운룡은 단칼에 소은설의 요청을 거절했다.
“하지만……!”
소은설이 미처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진운룡의 신형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