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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룡전-33화 (33/150)

# 33

/혈룡전 2권(33화)

4장 동창 (1)/

흙더미와 통로를 지탱하던 지지대들이 한꺼번에 뒤섞이며 뿌옇게 시야를 가렸다.

재빨리 통과해 보려고도 했으나, 그 범위가 너무도 광범위했다. 무려 삼십 장 정도의 통로가 그대로 무너져 내린 것이다.

만일 삼십 장이 넘는 깊이가 아니었다면 위쪽의 건물들이나 사람들까지 한꺼번에 매몰되었을 만큼 큰 폭발이었다.

아마도 이 정도면 진천뢰가 일곱 개가 아닌 최소한 서른 개는 넘게 숨겨져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이런!”

진운룡이 인상을 찌푸리며 신웅을 노려봤다.

통로가 끊겨 버렸으니 소녀들이 있는 곳을 찾는 일이 쉽지 않아진 것이다.

구멍을 뚫으려 해도 일단 방향을 잘못 잡으면 엉뚱한 곳을 팔 확률이 높았다.

신웅은 당장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흠흠, 미안하게 됐네…….”

이제 입구로 되돌아가서 다시 놈들의 근거지를 추적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상당한 시간을 낭비해야 했다.

그동안 놈들이 달아나거나 인질들을 상하게라도 된다면 큰일이었다.

한동안 신웅을 노려보던 진운룡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된 이상 당신이 책임을 져야겠소.”

“어, 어떻게 말인가?”

진운룡의 날카로운 눈빛에 신웅이 주눅이 든 표정으로 물었다.

“빠른 시간 안에 놈들을 찾을 방법이 있긴 한데, 당신의 희생이 필요하오.”

희생이라는 말에 신웅이 침을 꿀꺽 삼켰다.

“모, 목숨이라도 바치라는 건가? 물론, 소녀들을 구할 수만 있다면 못할 것도 없지만…….”

진운룡이 신웅의 이야기를 끊었다.

“목숨까지는 필요 없으니 걱정 마시오. 단지 그대의 피가 필요할 뿐이니까.”

진운룡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피, 피라고?”

신웅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소. 조금 많이 뽑을 것이니 어지럽기는 할 것이오. 하지만 죽지는 않으니 걱정 마시오.”

피를 흡수하면 감각의 극도로 예민해지고, 인지할 수 있는 범위도 몇 배로 넓어졌다.

근방에 납치된 소녀들이 있다면 충분히 찾아낼 수 있을 것이었다.

신웅은 잠시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피를 뽑는다니 대체 무슨 괴이한 이야기란 말인가.

게다가 그런다고 어떻게 찾아낸다는 것인가.

“소녀들을 찾고 싶지 않으시오?”

미간을 찌푸리고 진웅룡을 잠시 바라보던 신웅이 미심적은 얼굴로 물었다.

“내 피를 이용하면 소녀들을 찾을 수 있는 것이 분명한 건가?”

“분명하오.”

진운룡의 단호한 대답에 신웅이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에 소녀들을 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니, 미친 척하고 자넬 믿어 보기로 하지.”

츠읏!

순간, 진운룡의 지풍이 신웅의 팔목을 스쳐 갔다.

스스슷!

동시에 소은설 때와 같이 신웅의 팔목으로부터 핏줄기가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허…….”

신웅이 놀란 얼굴로 진운룡을 향해 빨려 들어가는 핏줄기를 바라봤다.

마치 아편을 피운 듯 조금은 몽롱하고 나른한 신웅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이게 대체 무슨 조화란 말인가?’

마인이나 사술을 익힌 자들이 인간의 피를 이용해 힘을 얻는다는 이야기는 들어 봤으나, 이렇게 직접 겪어 보는 것은 그도 처음이었다.

신웅은 혹시 진운룡도 그런 사악한 무리가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렇게 소녀들을 구하려 들지 않았겠지.’

그로서는 도무지 진운룡의 정체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때, 허공으로 솟아오르던 핏줄기가 멈추고 진운룡의 두 눈에서 신광이 터져 나왔다.

번쩍!

우우우우우웅!

진운룡의 두 눈이 노란 눈동자를 제외하곤 모두 핏빛으로 변했다.

화아아아아악!

순간, 진운룡을 중심으로 기의 파동이 동심원을 그리며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진운룡의 감각이 확장되며 주변의 모든 소리와 기운들이 하나하나 선명하게 머릿속에 잡혔다.

지하수, 흙 사이로 기어 다니는 벌레들, 삼십 장 위 건물들과 사람들의 움직임까지 마치 눈으로 보는 듯 느낄 수 있었다.

“저기군!”

진운룡이 눈을 빛내며 북동쪽의 한 방향을 가리켰다.

“여기서 오십 장 정도의 거리에 수많은 사람들이 한군데에 모여 있소. 무인은 오십여 명 정도……. 일반인이 백여 명이 넘게 있군!”

그렇다면 분명 납치당한 소녀들일 것이다.

“대단하군! 오십 장 너머 그것도 땅속의 움직임을 정확히 잡아내다니!”

신웅은 다시 한 번 진운룡의 능력에 감탄했다.

“이럴 때가 아니군! 어서 출구로 돌아가세! 한참 돌아가야 하니 서둘러야 해!”

하지만 어쩐 일인지 진운룡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방향을 알았으니, 이대로 뚫고 가겠소!”

신웅은 어이없는 얼굴로 진운룡을 바라봤다.

“지금 오십 장 거리 땅을 우리 둘이 파내자는 이야긴가?”

“무너져 막힌 거리는 삼십 장이요.”

너무도 태연히 말하는 진운룡의 모습에 신웅은 할 말을 일었다.

“아니, 삼십 장이라도 어느 세월에…….”

신웅의 이야기를 무시한 채 진운룡이 검을 꺼내 들었다.

“어차피 폭발로 무너진 흙과 돌덩이들은 아직 그리 단단하지 않은 상태이니 가능할 듯하군……. 뒤로 물러서시오!”

구우우웅!

순간, 엄청난 압력이 비밀통로를 가득 채웠다.

“허억!”

신웅이 자신도 모르게 뒤로 밀려날 정도로 어마어마한 압력이었다.

동시에 진운룡의 검에 눈이 부실 정도로 시린 빛이 어렸다.

우우우우우웅!

‘저, 저게 뭐지? 검강도 아니고.’

마치 태양을 보는 듯 직접 마주 볼 수 없을 정도의 강렬한 빛이었다.

츠아아아아악!

번쩍!

진운룡이 검을 앞으로 밀어내자 섬광과 함께 빛줄기가 길게 늘어났다.

파츠츠츠츠츠!

빛줄기는 일직선으로 쏘아져 나가 막혀 있던 흙더미에 작렬했다.

“크으으으!”

신음을 토해 내는 진운룡의 피부 위쪽으로 혈관이 검푸르게 실금을 그려냈다.

피를 흡수한 뒤라 광기와 마성(魔性)이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전 소은설의 피를 흡수해 몸 안의 마기를 많이 희석시킨 상태였기에 충분히 제어할 수 있을 정도였다.

“크윽! 대, 대체!”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섬광에 고개를 돌린 신웅은 순간 두려움에 휩싸였다.

마치 악귀처럼 변해 버린 진운룡의 모습에 그의 정체에 대해 다시 한 번 의심이 일었기 때문이다.

만일 진운룡 같은 고수가 사악한 마음을 품고 있다면 강호는 혈신(血神)을 맞이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런 자 같지는 않은데…….’

신웅이 짧은 시간 동안 지켜본 진운룡은 조금 차갑고 무뚝뚝하긴 했으나, 결코 함부로 손을 쓰는 이는 아니었다.

그때, 비밀통로를 환하게 밝히던 섬광이 사라졌다.

신웅이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진운룡이 천천히 검을 거두고 있었다.

“후우…….”

괴물 같던 그에게도 상당히 힘든 일이었던 것인지, 진운룡은 잠시 숨을 골랐다.

“허억!”

진운룡에게서 시선을 돌려 흙더미에 막혀 있던 비밀통로를 확인한 신웅은 순간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그곳에는 어느새 반대쪽이 훤히 보일 정도의 제법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던 것이다.

겨우 세 호흡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무려 삼십 장에 가까운 동굴을 한 사람이 뚫어 낸 것이다.

문득 신웅은 진운룡 같은 이가 광산 인부를 하면 순식간에 수백 명 분의 일을 하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가?”

신웅이 반쯤 얼이 빠진 얼굴로 터벅터벅 걸어 구멍의 안쪽을 살폈다.

흙과 돌덩이들이 마치 용암이라도 뚫고 지나간 듯 모두 녹아내려 있었다.

잠시 부글대며 끓던 그것들은 곧바로 식어 단단한 벽과 바닥으로 변했다.

“자, 자네 정말 인간이 맞는가?”

신웅이 떨리는 목소리로 진운룡에게 물었다.

“실없는 소리는 관두고 빨리 소녀들이나 구하러 갑시다. 나도 광멸섬(光滅閃)을 쓰려면 좀 무리를 해야 해서 어서 마무리 짓고 쉬어야겠소.”

진운룡은 시큰둥한 얼굴로 곧장 구멍 속으로 몸을 날렸다.

광멸섬은 위력이 큰만큼 사용되는 진기의 양 역시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진운룡은 피곤하다든가, 진기가 고갈된다든가 하는 문제보다는 몸 안에 다시 또아리를 틀기 시작한 마기(魔氣)가 못마땅했다.

소은설의 피를 흡수하면서 반 이상 사라져 있던 마기가 다시 그 양을 조금씩 늘여 가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신웅이 급히 그 뒤를 따랐다.

*   *   *

삼십 장 길이의 구멍을 빠져나오자 멀지 않은 곳에서 소란스러움이 느껴졌다.

“놈들이군! 우리가 온 것을 눈치챈 모양이야!”

하지만 그 많은 인원들을 준비도 없이 이동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자칫 이동하다 다른 이들의 눈에 띠게 될 경우도 생각해야 했다.

“머, 멈춰라!”

역시 아직 달아나지는 못한 듯, 열 명 정도의 무사들이 커다란 철문 앞을 막고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철문 뒤에 소녀들이 갇혀 있을 것이 분명했다.

진운룡과 신웅은 눈빛을 교환한 후 곧장 무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피를 흡수해 마성이 일어난 진운룡의 손속은 인정사정이 없었다.

한 수 한 수가 치명적이지 않은 것이 없었고, 무사들에게는 사신의 등장과도 같았다.

신웅 역시 이런 자들에게 사정을 봐줄 만큼 무른 인간은 아니었다.

퍼퍽! 슈악!

“크악!”

“으악!”

무사들의 머리통이 터져 나가고 팔다리가 잘려 나갔다.

열 명의 무사가 모두 쓰러지기까지는 고작 한 호흡도 걸리지 않았다.

그들과 같은 일반 무사들로는 신웅 한 사람만도 버거운 상대였기에 당연한 결과였다.

진운룡은 지체하지 않고 철문을 향해 발길질을 날렸다.

콰아아앙!

높이와 폭이 족히 일 장은 넘는 큰 철문이 진운룡의 발길질 한 방에 튕겨져 날아갔다.

“젠장!”

신웅이 욕지기를 토해 냈다.

칼질을 세 번이나 하고서야 간신히 철문을 베어 냈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니 자괴감이 들었던 것이다.

“하기야 괴물과 인간을 비교할 수는 없지! 쳇!”

혀를 찬 신웅이 곧장 철문 안쪽으로 몸을 날렸다.

철문 뒤로 드러난 공간은 관아의 옥사처럼 철창이 가로막힌 방이 여러 개가 늘어서 있었다.

옥사 안에는 각기 대여섯 명씩의 소녀들이 갇혀 있었다.

“이놈들!”

소녀들의 모습을 확인한 신웅이 이를 악물었다.

죄 없는 소녀들을 마치 짐승처럼 좁은 철창에 가두다니 놈들의 만행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적이다! 막아라!”

“어서, 계집들을 이동시켜라!”

두 사람이 생각보다 빨리 안쪽으로 난입하자 당황한 무사들이 우왕좌왕했다.

“아악!”

뒤쪽에서 소녀들이 무사들에게 끌려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계단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지상으로 연결된 통로인 듯했다.

이미 십여 명의 소녀가 계단을 오르고 있는 상태였다.

“응?”

그때, 진운룡의 눈에 이채가 일었다.

무사들에게 명을 내리고 있는 자의 얼굴이 낯이 익었기 때문이다.

“네, 네놈은! 대명호 근처에서…….”

그자 역시 진운룡을 알아본 듯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쳤다.

그는 바로 적산과 시비가 붙었던 동창의 당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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