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혈룡전 2권(35화)
4장 동창 (3)/
숙소로 돌아온 모용주란은 뜨거운 물에 수차례 몸을 씻었다. 마치 온몸에 오물이 묻은 것처럼 피부가 벌게질 때까지 씻고 또 씻었지만, 그녀의 더러운 기분은 그대로였다.
몸을 씻던 모용주란이 손을 멈춘 채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의 처녀를 그런 더럽고 보잘것없는 자에게 빼앗기다니, 결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다.
하지만 어찌 보면 스스로 갖다 바친 셈이니, 어디다 하소연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만일 아버지나 가문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게다가 세상에 알려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제갈무진뿐 아니라 그녀 자신까지 모두 끝장나고 말 것이다.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모든 게 결국 진운룡 그자 때문이야!”
원망의 화살이 진운룡에게로 향했다.
만일 이 모든 일이 자신 스스로 초례한 결과라고 생각하면 그녀는 너무도 비참해지기 때문이었다.
진운룡을 만나러 가지 않았다면, 그때 진운룡이 방을 비우지 않았다면, 자신이 당했던 끔찍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녀는 억지를 부렸다.
그것에는 자신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던 진운룡에 대한 원망도 있었다.
비천하고 보잘것없는 하오문 계집에게는 따뜻한 눈길을 보내던 그가 모용주란에겐 마치 소 닭 보듯 무심했다.
모용주란의 존재 자체가 진운룡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듯했다.
심지어 자존심을 버리면서까지 진운룡에게 찾아갔던 그녀였지만, 결국 돌아온 것은 기억하기도 싫은 치욕뿐이었다.
“진운룡! 제갈무진!”
모용주란은 두 사람의 이름을 되뇌었다.
“반드시 네놈들에게 이 고통의 대가를 치르도록 하겠다!”
그녀의 두 눈에서 살기가 일었다.
* * *
계단 끝에는 철문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따로 잠금 장치는 보이지 않았다.
진운룡은 우선 감각을 끌어 올려 바깥쪽을 살폈다.
철문 뒤쪽으로 서른 명 정도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모두 앞에서 상대했던 자들처럼 보잘것없는 수준의 무사들이었다.
‘이상하군. 초가장에서 상대했던 놈들보다 너무 수준이 형편없어.’
초가장의 경우 절정을 넘어선 자만해도 셋이나 됐고, 일류를 넘어선 무사들의 숫자도 거의 서른 명이 넘었었다.
한데, 이곳은 절정은커녕 일류 수준의 무사조차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상대했던 자들 중 그나마 가장 강했던 이가 동창 당두였는데, 그자 역시 일류에도 못 미치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초가장에서 이곳으로 납치한 자들을 보냈다면, 이곳이 초가장보다 위 단계의 거점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오히려 초가장보다 전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민에 빠져 있던 진운룡이 고개를 저었다.
우선은 나머지 놈들을 정리하는 것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잠시 의문을 접은 진운룡의 신형이 철문 밖으로 쏘아져 나갔다.
퍼퍽!
“크악!”
철문과 가장 가까이 위치해 있던 두 명의 무사가 진운룡의 지풍에 이마가 뚫린 채 바닥으로 무너졌다.
두 무사를 해치운 진운룡은 우선 주변을 확인했다.
계단의 출구가 연결된 곳은 백 평은 족히 넘는 커다란 창고였다.
천향루의 입구와 비슷한 구조였다.
“저, 적이다!”
“누구냐!”
진운룡이 갑작스런 등장에 놀란 무사들이 허둥대며 고함을 쳤다.
“무슨 일이냐!”
소란을 들었음인지 창고 바깥쪽에 있던 무사 다섯도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하지만 진운룡에게서 돌아온 것은 대답 대신 열 줄기의 날카로운 지풍이었다.
슈슈슈슈슈욱!
“크악!”
“아악!”
순식간에 열 명의 무사가 몸에 구멍이 뚫린 채 쓰러졌다.
그러자 남은 무사들이 혼비백산한 채 흩어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보잘것없는 그들의 실력으로 진운룡에게서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퍼퍼퍼퍼퍽!
서른 명이 넘는 무사들이 모두 바닥에 드러눕기까지는 고작 세 호흡도 걸리지 않았다.
진운룡은 신음을 흘리며 꿈틀대는 무사 하나에게 다가갔다.
“끄으으…….”
무사는 복부에 구멍이 뚫린 채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진운룡은 차가운 시선으로 무사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지하 말고 이곳에 잡혀 온 이들이 갇혀 있는 다른 곳이 있나?”
“크윽! 자, 잡혀 온 자들은 모두 지하에 있소. 자, 장원은 그저 지하옥사를 위장을 하기 위한 곳이오.”
진운룡의 살벌한 눈빛을 마주한 무사가 두려움에 몸을 떨며 대답했다.
그에게 있어 진운룡은 그야말로 사신이나 마찬가지였다.
진운룡이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소진태는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이들이 소진태를 납치하지 않았든지, 아니면 이미 소진태를 다른 곳으로 이동시켰든지.
“혹시 다른 곳으로 이동시킨 인질들 중에 중년 사내도 있었나?”
진운룡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무사에게 확인했다.
“사, 사내? 이곳에 잡혀 온 이들은 소, 소녀들뿐이오. 쿨럭!”
힘겹게 대답한 무사가 피를 한 움큼 토해 냈다.
무사의 표정으로 보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결국, 소진태를 납치한 것은 이자들이 아니라는 건가?’
그렇다면 엉뚱한 곳을 뒤진 셈이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이곳 역시 수상한 곳임에는 틀림없었다. 동창에 어린 소녀들 납치까지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음모의 냄새가 났다.
‘그렇다 해도 어차피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
세상을 구한다든지 영웅이 된다든지 하는 일은 진운룡과는 맞지 않았다.
그저 마음이 가는대로 어떤 것에도 구속받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어쨌든 이렇게 된 이상 소녀들을 마저 안전하게 구해 내면 이곳에 더 이상 볼일은 없었다.
진운룡은 혹시 모르니 마지막으로 동창 당두의 기억을 조사한 후에 황보세가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혹시 남은 잔당들이 있는지 살펴야 했다.
창고 밖에서는 무인들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이곳에 있는 서른 명과 아까 뛰어 들어왔던 다섯 무사가 전부였던 모양이었다.
창고 밖으로 나와 보니 앞쪽에 바로 황하(黃河)가 흐르고 있었다.
강가에는 아마도 소녀들을 나르기 위해서 대기시킨 듯한 꽤 큰 배가 한 척 세워져 있었다.
선원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 무공을 모르는 일반인이었다.
진운룡이 선원들과 선장을 제압한 후 심문해 보니 이들은 그저 동창 당두에게 고용된 자들이었다.
이들은 제남에서 북경까지 화물을 실어 나르는 역할을 했는데, 항상 수레가 있는 칸에는 선원들조차도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기에 화물이 무언지조차 알지 못하고 이 일을 해 온 듯했다.
북경에서는 포구에서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이 화물을 회수해 갔기에 화물이 최종적으로 어디로 가는지는 이들도 알지 못했다.
막 심문이 끝날 즈음해서 신웅이 소녀들을 데리고 창고 밖으로 나왔다.
“허……. 이거 나는 손을 쓸 필요도 없겠군!”
신웅이 사방을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 짧은 시간에 진운룡이 잔당들을 모두 처리한 것이 놀라웠던지 연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참, 이놈은 어찌할 건가?”
털썩!
신웅이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동창 당두를 바닥에 내던졌다.
“크윽!”
갑작스런 충격에 동창 당두가 정신을 차렸다.
진운룡이 천천히 당두를 향해 걸어갔다.
제령안을 사용해 놈의 기억을 훑어보기 위해서였다.
정황상 소진태의 납치와는 관련이 없을 것이 거의 확실했으나,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하려는 것이다.
“허억!”
진운룡을 발견한 동창 당두가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이미 진운룡의 실력과 거침없는 손속을 확인한 그였기에 공포를 느끼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운룡은 당두의 머리통을 잡고 시선을 맞췄다.
놀란 동창 당두가 눈을 감으려 했으나 눈꺼풀이 말을 듣지 않았다.
번쩍!
순간 진운룡의 두 눈에서 황금빛 광채가 터져 나왔다.
“끄아아아악……!”
뇌가 녹아내리는 듯한 극심한 고통에 당두가 비명을 질렀다.
진운룡은 동창 당두의 머릿속을 마음껏 헤집고 다녔다.
놈의 기억들이 조각조각 진운룡의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끄으으으…….”
동창 당두가 입에 거품을 문 채로 경련했다.
“허, 상대의 심령을 제압하는 것인가?”
옆에 서 있던 신웅이 눈살을 찌푸리며 진운룡을 바라봤다.
설마 진운룡이 이런 식으로 상대에게 비밀을 알아내리라고는 생각을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수법들은 대체로 사파나 마교, 밀교 등에서 쓰이는 수법이었다.
점점 더 진운룡의 정체에 대해 의문이 가기 시작했다.
그때, 기억을 읽는 것을 끝낸 진운룡이 동창 당두에게서 손을 땠다.
털썩!
동창 당두의 육신이 그대로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혼이 빠져나간 듯 동창 당두의 눈은 초점도 없이 흐릿해져 있었다.
“흠, 뭐 좀 알아낸 것은 있나?”
조금은 못마땅한 목소리로 신웅이 물었다.
“일단 납치에 동창이 관련된 것은 확실하오. 첩형까지 관계된 것을 보면 분명 조직 차원에서 움직인 것이겠지. 그리고 산동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일이 진행되고 있는 듯하오.”
신웅의 얼굴이 굳었다.
예상은 했지만, 동창이 직접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들으니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이자들이 소녀들을 납치하는 이유는?”
“이자 역시 첩형의 명을 따랐을 뿐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었소.”
신웅이 인상을 찌푸렸다.
첩형까지 관계가 되었다면 동창 전체가 관련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동창이 무슨 연유로 이런 일을 벌인 것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신웅의 시선이 불안한 모습으로 떨고 있는 소녀들에게 향했다.
“이 아이들을 어찌해야 하나…….”
동창이 관련되어 있다면 관에 맡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혼자 집으로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일단은 황보세가에 맡기는 것이 좋겠소. 그들이라면 이 아이들을 안전하게 집으로 보내줄 수 있을 거요.”
“그게 좋겠군! 황보세가라면 충분히 이 아이들을 맡을 수 있지! 관에서도 함부로 수작을 부리지 못할 테고.”
“당신이 이들을 데리고 황보세가로 향해 주시오. 나는 천향루도 마저 정리하겠소.”
천향루의 종업원과 기녀들 역시 이번 사건을 벌인 자들과 같은 무리였다.
조금 번거롭기는 했지만, 이왕 손을 쓴 김에 마저 마무리를 지으려는 것이다.
“그러지. 그럼 황보세가에서 보세.”
신웅이 소녀들을 데리고 황보세가로 향한 후 진운룡은 천향루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미 천향루는 비어 있는 상태였다.
진운룡과 신웅이 소녀들을 구출하는 동안 어느새 모두 도주한 것이다.
진운룡은 잠시 흔적을 쫓을까 생각하다 발길을 돌렸다.
어차피 소진태의 납치와는 관계없는 자들임을 확인한 이상 일부러 심력을 허비하면서까지 그들을 쫓을 필요는 없다 여긴 것이다.
그보다는 나머지 한 곳 염상 방염을 조사하는 것이 먼저였다.
한 번 더 천향루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진운룡은 그대로 황보세가로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