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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룡전-36화 (36/150)

# 36

/혈룡전 2권 (36화)

5장 요동치는 강호 (1)/

새벽부터 황보세가에는 난리가 났다.

갑자기 이백 명이 넘는 어린소녀들이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가주를 비롯 세가의 식솔들이 모두 달려 나와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소녀들을 맞이했다.

“아니! 신도무적 아니신가?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보고를 받고 급히 온 가주 황보혁군이 신웅을 발견하고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황보 가주님, 오랜만입니다!”

황보혁군과 안면이 있는지 신웅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상당히 공손한 모습이었는데, 강호 배분상으로나 나이로나 황보혁군이 위였기 때문이다.

“이 소녀들은 모두 최근 납치사건의 피해자들입니다.”

“납치라면, 혹 요즘 산동지방에 벌어지고 있는 어린 소녀들의 실종을 말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황보혁군의 눈이 커졌다.

“아니! 그럼 그 소녀들이 실종이 아니라, 악적들의 손에 납치 되었었단 말인가?”

신웅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이럴 수가……. 그나저나 신도무적께서 이번에도 정말 큰일을 하셨네!”

황보혁군이 감탄 어린 얼굴로 신웅을 바라봤다.

워낙 강호에서 협행으로 이름이 높은 신웅이었기에 당연히 이번 일도 그의 공이라 여긴 것이다.

“흠, 사실 저는 별로 한 것도 없습니다.”

신웅이 겸연쩍은 얼굴로 말했다.

의외의 말에 황보혁군이 의아한 얼굴로 신웅을 바라봤다.

“그게 무슨 소리신가? 신 대협이 아니면 누가 이들을 구했단 말인가?”

“자세한 이야기는 따로 나누기로 하고 일단 아이들부터 좀 쉬게 해 주십시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힘든 일을 겪어 충격들이 컸을 것입니다.”

신웅의 말에 황보혁군이 자신의 이마를 쳤다.

“아! 이거 내가 경황이 없어 아이들을 미처 생각 못했군그래! 뭣들 하느냐! 어서 아이들을 쉴 곳으로 안내해 주고 음식도 내주거라! 그리고 의당의 신 의원에게 말해 혹 아프거나 다친 아이가 있으면 돌봐 주도록 해라!”

아직 어린 나이에 너무도 큰 고초를 겪은 불쌍한 아이들이었다. 당장에 안정을 취하게 해주는 것이 중요했다.

그때, 천향루에 갔던 진운룡이 세가에 도착했다.

“벌써 천향루를 정리한 것인가?”

신웅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천향루의 있던 무사들의 수만 해도 족히 백 명은 넘을 것 같았었기 때문이다.

“이미 놈들은 도주했소. 아마 폭발이 일어났을 때 도망쳤든지 아니면 서로 연락을 취한 모양이오.”

신웅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황보혁군은 그제야 자신은 별로 한 일이 없다던 신웅의 말이 이해가 갔다.

“진 공자가 저들을 구한 것이었군! 허허, 참으로 대단한 일을 했네! 이거 이름만 축내는 우리 늙은이들이 부끄럽구만!”

황보혁군이 흐뭇한 얼굴로 탄성을 터뜨렸다.

이제 겨우 이십대의 젊은이가 실력에다 인성까지 갖추다니 그야말로 무림의 홍복이 아닌가.

“그럼 이 일을 벌인 놈들의 정체는 밝힌 것인가?”

신웅이 나섰다.

“동창이 관계된 것 같습니다.”

“동창?”

황보혁군을 비롯 황보세가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이 그동안 많은 몹쓸 짓을 저지르기는 했으나, 이렇듯 죄 없는 어린 소녀들까지 납치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동창이 움직이는 일은 거의 정적의 숙청, 혹은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였다.

한데, 아이들을 납치하는 일이 그들에게 무슨 이익이 있단 말인가?

자칫 세상에 알려지기라도 하면 동창을 해체하려는 반대세력에 좋은 빌미만 제공하게 될 것이다.

“골치 아프게 됐군.”

황보혁군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그렇습니다. 동창의 짓이라면 우리로서는 함부로 추궁할 수도 없습니다.”

동창에서는 혐의를 부인할 것이다.

동창 당두가 불순 세력과 손을 잡고 혼자 벌인 일이라고 꼬리 자르기를 할 것이 분명했다.

무림 세력 같으면 일단 무력으로 제압한 후 심문을 하거나 시시비비를 밝히겠으나, 동창은 황실 직속 기관이었다.

그런 식으로 움직였다간 역적으로 몰리기 십상이었다.

결국, 일단은 어린 소녀들을 구한 것에 만족하면서 놈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주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동창 역시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것은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그런 일이 있었으면 미리 이야기를 하지 그랬나? 세가에서 도움을 줬을 것인데.”

황보혁군이 조금은 서운한 얼굴로 진운룡에게 말했다.

“확실치 않았던 상황이라 별로 소란 피우고 싶지 않았습니다.”

진운룡이 귀찮은 듯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까칠한 진운룡의 태도에 조금은 멋쩍은 얼굴로 황보혁군이 헛기침을 했다.

“큼큼, 어쨌든 자네는 우리 가문의 귀한 손님이니 다음부터는 개의치 말고 필요한 것을 말하게. 게다가 이 제남 땅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우리 황보세가에게도 바로잡아야 할 책임이 있다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진운룡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다음에는 꼭 도움을 요청하도록 하지요.”

천향루가 소진태와 관계가 없었으니 이제 방염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차피 이번에는 소은설도 데리고 갈 겸 황보세가와 같이 움직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무래도 그편이 소은설의 안전에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혼자 움직이는 것은 자칫 천향루처럼 인질들을 빼돌릴 경우 자칫 놓칠 가능성도 있었다.

한 무리가 시간을 끌고, 나머지 무리는 흩어져 달아난다면 진운룡이 몸이 여러 개가 아닌 이상 모두 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진운룡이 선뜻 긍정을 표하자 황보혁군도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하루 만에 절정 고수를 뚝딱 만들어 내는 능력을 가진 진운룡이었다.

게다가 무공 실력은 황보혁군조차 경지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였다.

되도록이면 친분을 만들어 두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한 것은 당연했다.

“그럼 소녀들은 가주께 맡기겠습니다.”

더 있다간 이것저것 귀찮게 할 것이 분명했기에 진운룡은 곧장 자리를 떴다.

그 뒷모습을 제갈무진과 모용주란이 노려보고 있었다.

*   *   *

황보혁군 등과 헤어진 진운룡은 소은설의 숙소에 도착했다.

“어떻게 됐나요?”

방에 들어서자마자 소은설이 조바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잠시 소은설을 바라보던 진운룡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놈들은 너희 아버지와는 관계가 없다.”

소은설의 얼굴에 실망이 일이었다.

“아직 한 군데가 남았으니 실망하긴 일러.”

소은설이 입술을 깨물었다.

진운룡의 말처럼 아직 방염이라는 염상이 남아 있었다.

“이번엔 저도 따라가도 되는 거죠?”

하오문의 정보가 정확하다면 이번에야말로 소진태를 찾을 수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그녀가 따라가면 방해만 될 터였지만, 되도록이면 아버지를 직접 구해 내고 싶었다.

피식 웃은 진운룡이 자신도 모르게 소은설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열의에 찬 눈동자가 오래된 기억 속 여인의 그것과 너무도 흡사했기 때문이다.

“그래, 이번은 너도 함께 가도록 하자. 대신 하오문에 놈들에 대한 정보를 조금 더 요청하도록 해. 그래야 황보세가도 함께 움직일 수 있을 테니.”

소은설은 순간 심장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그것이 직접 아버지를 구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인지 아니면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진운룡의 미소와 그의 손길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 알았어요.”

소은설은 붉어진 얼굴을 들킬까 봐 얼른 진운룡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   *   *

다음 날 아침 잔뜩 흥분한 적산이 진운룡을 찾아왔다.

“주군!”

숙소가 떠나갈 듯한 적산의 고함소리에 진운룡이 방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어째서 나를 데려가지 않은 거요!”

적산이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쳤다.

“어딜?”

진운룡이 귀찮은 듯 짜증스런 얼굴로 물었다.

“천향루 말이오! 천향루! 그 동창 놈들이 있던 곳 말이오!”

진운룡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 피식 웃었다.

“나도 동창 놈들이 거기에 있는 줄은 몰랐다. 그리고 알았다 해도 너는 데리고 가지 않았을 거야.”

“대체 무엇 때문이오! 내가 왜 이토록 무공을 익히려는지 주군은 잘 알잖소!”

씩씩거리는 적산을 진운룡이 시큰둥한 얼굴로 바라봤다.

사실 적산은 동창에 의해 부모님이 죽임을 당했다.

적산의 부모님은 그저 평범하게 변두리에서 조그만 식당을 운영하던 이들이었다.

사실 그들이 동창과 엮일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의 잘못은 단지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 있었던 것뿐이다.

동창의 암살 현장이 하필 적산의 부모님이 운영하던 식당이었던 것이다.

살인멸구(殺人滅口)!

적산의 부모는 물론 현장에 있던 손님들까지 모두 동창 위사들의 검에 목숨을 잃었다.

적산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어머니 덕이었다.

영업이 거의 끝나 갈 무렵이었기에 적산과 어머니는 주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소란을 들은 적산의 어머니가 그를 급히 찬장에 숨겼다.

적산은 찬장 안에서 그의 어머니가 적의 검에 목숨을 잃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붉은 피가 주방 바닥을 흥건히 물들이고, 그의 어머니의 시신이 차갑게 식어 갈 때까지 적산은 찬장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충격과 두려움이 그의 몸과 마음을 마비시켜 버렸기 때문이었다.

“크으으…….”

적산은 동창 위사의 검에 쓰러지던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렸다.

“왜 날 데려가지 않겠다는 거요!”

적산이 악을 쓰며 물었다.

“아직 네놈 실력으로는 방해만 될 뿐이야. 내가 굳이 네놈을 돌봐 주면서 데리고 다닐 이유가 없잖아?”

진운룡의 냉정한 이야기에 적산이 이를 악물었다.

적산이 전보다 많이 강해진 것은 사실이었으나, 이 정도로 진운룡의 눈에 찰 리가 없었다.

파천신공을 배우기 시작한 지도 이제 겨우 열흘도 지나지 않은데다, 사용할 수 있는 무공이라고는 삼재검과 육합권이 전부였다.

적산이 분노를 억누르며 물었다.

“내가 얼마나 강해져야 함께 움직일 수 있는 거요?”

진운룡의 시선이 천천히 적산에게 향했다.

“네 녀석이 삼재검과 육합권만으로 신웅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면 생각해 보지.”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신웅이 누구던가. 강호 백대 고수 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실력을 가진 고수였다.

한데, 삼재검과 육합권만으로 그를 이기다니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적산은 결코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두 눈에 불꽃을 번뜩이며 의지를 다졌다.

“흥! 내 반드시 신웅을 꺾고 말거요!”

적산이 씩씩대며 진운룡의 숙소를 나섰다.

그 뒷모습을 보는 진운룡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일었다.

*   *   *

천향루 사건은 제남은 물론 산동 전체를 뒤흔들었다.

이백 명이 넘는 소녀들이 납치되었다는 사실과 동창 당두가 관계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그 여파가 컸다.

그렇지 않아도 땅에 떨어진 민심이 자칫 폭동으로 변할 수도 있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무척 곤란한 사건이었다.

사건의 규모도 그렇고, 황보세가까지 나선 상황이라 억지로 덮을 수도 없었다.

결국, 예상대로 동창과 관에서는 납치사건과 관계가 있음을 전면 부인했다.

모든 일은 동창 당두가 불온 세력과 손을 잡고 벌인 일이며 그와 관계된 자들을 찾아내 반드시 심판하겠다고 천명했다.

또한, 들끓는 민심을 가라앉히기 위해 소녀들의 귀향을 돕는 데 적극 나섰다.

심지어는 위로금 명목으로 소녀들 한 명당 은자 두 냥씩 쥐어 주기까지 했다.

쌀 한 섬이 은자 한 냥임을 생각하면 상당한 금액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창의 해명을 믿는 백성들은 별로 없었다.

이미 그들의 폭정과 약탈에 당할 만큼 당한 민초들이기에 조정과 황실을 향한 불만은 더욱 깊어만 갔다.

한편, 이번 사건으로 인해 신웅의 이름이 다시 한 번 강호에 진동했다.

무림인들은 역시 신도무적이라며 신웅의 협행을 찬양했다.

반면 진운룡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귀찮음을 피하기 위해 진운룡이 신웅과 황보세가에 부탁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암암리에 진운룡에 대한 정보는 각 가문과 문파, 무림맹에 전달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번 사건으로 인해 진운룡은 구대문파와 세가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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