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
/혈룡전 2권 (38화)
5장 요동치는 강호 (3)/
“이런, 아직 검기를 유형화하지 못하는 것인가?”
신웅이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도를 거뒀다.
적산의 공력이면 충분히 검기를 유형화할 수 있을 거라고 짐작해 도기를 사용한 것인데, 너무도 어이없게 당한 것이다.
“흠, 나름 흥이 났었는데, 아쉽군그래.”
신웅이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적산은 제법 손을 맞대는 재미가 있었다.
“아까 그것이 뭐요? 그 소용돌이치던 거 말이오.”
정신을 차린 적산이 상기된 표정으로 물었다.
신웅이 의아한 얼굴로 적산을 바라봤다.
“처음 보는가?”
적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 참으로 신기하군. 자네 정도 공력을 가지고 있으면 검기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것이 정상인데.”
진운룡이나, 그를 주군이라 따르는 적산이나, 기이하기 그지없었다.
“그건 도기를 유형화시킨 거라네. 검기나 도기는 알겠지?”
그 정도는 적산 역시 알고 있었다.
검이나 도에 기운을 집어넣어 강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고 책에서 배웠다.
적산 역시 자신의 기운을 검에 실을 정도는 됐다.
“하여간 검기나 도기를 유형화시키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첫째는 스스로 깨달음을 통해 심상을 만들어 내는 방법이고, 둘째는 무공 초식을 이용하는 것이라네. 상승 초식들은 기의 운용을 통해 검기를 유형화할 수 있기 때문이지. 가끔 초식 이름들을 잘 살펴보면 그 운용법을 짐작할 수도 있다네.”
상승 무공을 배우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홀로 깨달음을 통해 기를 유형화시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깨달음이라는 것이 아무나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간도 시간이었지만, 자질이나 오성이 뛰어나지 않으면 아예 포기해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무공초식을 이용하면 달랐다.
일정한 수련을 거쳐 기를 운용하고 그에 따라 몸을 움직이면 비교적 쉽게 기를 유형화시킬 수 있었다.
물론, 그것도 상당 시간의 수련과 초식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지만, 혼자서 깨달음을 얻는 것과는 천지차이였다.
특히 상승 무공일수록 그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 더 빨랐고, 기의 운용도 더욱 효율적이었다.
하급 무공이 일의 힘으로 일의 파괴력을 얻을 수 있다면, 상승 무공은 일의 힘으로 오, 십의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래서 무인들이 눈에 불을 켜고 무공비급을 찾는 것이다.
“무공 초식?”
적산이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이 아는 초식이라고는 단순히 찌르고 베는 것밖에 없었다.
“무공 초식을 모르면 할 수 없는 거요?”
“아까도 말했듯이 그러려면 깨달음이 필요해.”
“어떤 깨달음을 말하는 거요?”
신웅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적산에게 설명을 하려니 참으로 난감했던 것이다.
“뭐랄까……. 심상을 그리고, 기운을 움직인다랄까? 움직이고 싶은 경로나 만들고 싶은 모양을 생각하고, 의지를 일으켜 기운을 움직이는 것이지. 휴…… 이것 참 설명하기가 난감하군.”
신웅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생각하고 의지를 일으켜 기운을 움직인다?”
적산이 신웅의 말을 몇 번씩 되뇌었다.
“의지를 일으켜 기운을 움직인다. 의지를…….”
적산이 자신의 반 토막 난 검을 노려보며 중얼 거린지 일다경 쯤 지났을 때였다.
후우우웅!
갑자기 적산의 토막 난 검 주위로 기운이 작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헉!”
신웅이 경악스러운 눈으로 적산을 바라봤다.
자신의 눈으로 보고도 도저히 믿지 못할 상황이었다.
변변한 무공 초식도 사용하지 못하는 적산이 신웅이 해 준 몇 마디만을 듣고 기를 유형화시킨 것이다.
그것도 이토록 짧은 시간에.
‘내, 내 이야기가 무슨 깨달음이라도 준 것인가?’
신웅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듣고 적산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하하, 이거 나도 되는데?”
적산이 호쾌하게 웃었다.
“후후, 이제 나도 유형환가 뭔가 할 줄 아니 다시 붙읍시다!”
적산이 눈을 빛내며 반 토막짜리 검을 들어 올렸다.
“자, 자네 대체 어떻게 깨달음을 얻은 것인가? 설마 원래부터 사용할 수 있으면서 나를 속인 것은 아니겠지?”
신웅이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물었다.
“무슨 소리요? 난 그냥 머릿속으로 당신이 했던 소용돌이를 떠올리고 기운을 움직였을 뿐인데. 그냥 집중하니까 되던데?”
“허…….”
신웅은 허탈한 얼굴로 적산을 바라봤다.
‘그냥 집중했다?’
참오(參伍)를 통해 깨달음을 얻거나 순간적으로 신웅의 말을 통해 각성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본능적으로 기를 움직이고 유형화시킨 것이다.
적산은 한마디로 타고난 천고의 기재였다.
“주인이나 수하나 다 괴물들이군…….”
신웅이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말했다.
“뭐하오? 다시 붙자니까?”
적산이 답답한 듯 신웅을 재촉했다.
“됐네. 오늘은 흥이 안 나니 이만 하지.”
힘이 빠진 모습으로 신웅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신웅이 방으로 들어간 이상 적산도 더 이상 억지를 부릴 수는 없었다.
“쳇!”
적산은 아쉬운 표정으로 신웅의 숙소를 빠져나왔다.
* * *
진운룡은 우선 방염에 대한 더 세밀한 정보를 하오문에 요청했다.
어차피 천향루가 정리된 상태이니, 방염에게만 집중하면 지금보다 정보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소은설은 조급함에 당장에라도 쳐들어가자고 했으나, 아무래도 황보세가에 도움을 요청하려면 어느 정도 근거가 필요했다.
소진태를 확실히 확보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혼자 움직이는 것보다 황보세가와 함께하는 편이 나았던 것이다.
천향루를 정리한 지 사흘째 되는 날 하오문에서 연락이 왔다.
이번에는 하오문에서 직접 사람을 보내 정보를 건네줬다.
직접 가져온 이는 의외로 목란이라는 기녀였다.
그녀는 스무 살 후반의 육감적인 몸매를 가진 미녀였는데, 하오문 제남 분타의 부장이었다.
“공자께서 요청하신 자료예요.”
목란은 무척 정중하고 조심스럽게 진운룡을 대했다.
그도 당연한 것이 이미 암암리에 알려진 진운룡의 무서운 능력을 강호 최대의 정보단체인 하오문에서 모를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특유의 요염한 미소와 몸짓은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진운룡의 관심은 오직 그녀가 가져온 정보에만 있었다.
정보의 내용을 살피던 진운룡의 눈동자가 빛났다.
‘이 정도면 충분히 황보세가를 움직일 수 있겠군.’
모두 정황 증거에 불과하긴 했지만, 누가 봐도 방염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증거들이었다.
진운룡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맺혔다.
한편, 목란은 진운룡에 대해 호기심이 일었다.
사내라면 누구나 혹할 수밖에 없는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것이다.
‘호오, 제법인데?’
왠지 그녀는 오기가 생겼다.
사실 진운룡이 대단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소문은 항상 부풀려지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설령 진운룡이 소문처럼 대단한 자라 해도 결국 사내. 그것도 한참 혈기왕성할 나이의 수컷이었다.
사내인 이상 자신이 유혹하지 못할 사람은 없었다.
‘어디 이것도 당해 낼 수 있나 볼까?’
그녀는 천천히 자신의 특기인 미혼공을 일으켰다.
그녀의 동작과 숨소리에서 은은하고 끈적한 기운이 흘러나와 진운룡에게로 향했다.
순간, 정보를 읽던 진운룡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일었다.
씨익!
동시에 목란은 등줄기에 서늘한 한기를 느꼈다.
‘허억!’
진운룡이 천천히 고개를 들자 숨조차 쉴 수 없는 공포가 그녀를 덮쳤다.
그녀는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바로, 누군가 날 시험하는 것이다.”
진운룡의 붉은 입술 사이로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눈동자는 어느새 노랗게 변해 있었다.
“끄으으……. 요, 용서…….”
극한의 공포와 두려움이 머릿속을 하얗게 채워 버려 목란은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치마 밑으로 누런 액체가 흘러내렸다.
“사, 살려…….”
목란이 눈을 뒤집어 깐 채 간절히 애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