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룡전-39화 (39/150)

# 39

/혈룡전 2권 (39화)

5장 요동치는 강호 (4)/

지긋이 그녀를 노려보던 진운룡의 눈동자가 다시 본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동시에 목란의 육신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허어억! 우웩!”

그녀는 바튼 숨을 토해 내며 구역질을 해 댔다.

“안책이 시킨 것이냐?”

진운룡의 차가운 목소리에 목란의 가슴이 철렁했다.

“저, 절대 아닙니다! 분타주께서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말했다.

진운룡이라면 자신의 대답 여부에 따라 제남 분타를 지울 수도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제가 주제도 모르고 감히 공자님을 시험한 것이니 부디 저 하나의 목숨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쿵!

그녀가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빌었다.

첫인상과는 달리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문파를 구하려는 마음이 제법 기특해 보였기에 진운룡은 노여움을 풀었다.

“쯧, 내 맘이 변하기 전에 당장 여기서 꺼져라!”

“가, 감사합니다!”

목란은 오물로 범벅된 자신의 몰골을 추스를 생각도 못하고 서둘러 황보세가를 빠져나갔다.

목란이 물러나고 진운룡은 즉시 가주집무실로 향했다.

*   *   *

“어서 오시게 진 공자!”

진운룡이 도착했다는 말에 황보혁군은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마침 가주집무실에는 신웅과 황보영천도 함께하고 있었다.

“그래 무슨 일로 왔는가? 혹 소 낭자의 부친에 대한 정보를 얻은 겐가?”

눈치가 빠른 황보혁군이 진운룡의 방문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해 냈다.

“방염이란 자를 칠 생각입니다.”

진운룡이 그답게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말했다.

“방염? 그자라면 염상이 아닌가?”

황보혁군이 의아한 얼굴로 진운룡에게 물었다.

“방염이란 자는 왜? 혹 그자도 이번 납치와 관련이 있나?”

마침 황보가주와 함께 있던 신웅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전에 진운룡이 누군가를 찾는다는 이야기를 기억해 냈던 것이다.

“제녕에서 있었던 황포의원 화재사건과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신웅과 황보혁군의 얼굴에 놀라움이 일었다.

황포의원 화재사건은 이미 제남에도 널리 알려진 일이었다.

무려 이백 명이 넘는 환자들이 화재로 죽거나 실종되었던 큰 사건이었다.

다행히 무림맹의 명을 받은 연주의 제검문이 사건을 해결했지만, 그 배후세력에 대한 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방염이라면 그래도 염상치고는 평판이 좋은 자가 아닙니까?”

황보혁군 뒤에 서서 이야기를 듣던 황보영천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흐음……. 그건 그렇지. 기근이 들 때나 홍수가 날 때 제남 백성들에게 쌀과 음식을 풀어 인심을 제법 얻은 자지.”

황보세가와 그다지 친분이 있지는 않았으나, 몇 번 인사를 나눈 적이 있는 이였다.

상인답지 않게 큰 덩치에 서글서글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고, 남에게도 베풀 줄 아는 자였다.

“방염이 그런 일과 관계가 있다니……. 혹 진 공자가 잘못 안 것이 아닌가?”

황보혁군이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진운룡이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확실한 것은 그자가 천사교와 연관이 되어 있다는 겁니다.”

황보혁군과 신웅의 얼굴에 이채가 일었다.

천사교라면 요즘 백성들을 선동해 민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단체였다.

이상한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에서 적극적으로 뿌리 뽑지를 않고 있다는 것이다.

황보세가 역시 요즘 천사교를 주시하고 있었다.

천사교에 입교하면 일반 백성들도 순식간에 상당한 실력의 무인으로 변모한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소문뿐 아니라 실제 그런 사례들이 꽤 있었다.

물론, 그래 봐야 이류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사실 그것도 대단한 것이었다.

무공의 무자도 모르던 일반인이 한 달도 안 되어 이류고수로 둔갑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자들이 민란을 일으킨 역도들 사이에서 발견되었다.

모든 정황이 천사교에서 암중으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진운룡의 말처럼 방염이 천사교와 연관이 있다면 확실히 의심이 갔다.

“근거가 있는가?”

황보혁군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방염의 장원으로 천사교의 교령과 핵심 인물들이 드나드는 것이 목격되었습니다. 조사에 따르면 천사교에 암암리에 자금과 물품도 지원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황보혁군의 미간에 내 천자가 새겨졌다.

“한데 그것이 그자가 제녕 사건과 연관이 있다는 증거는 아니지 않는가?”

천사교와 관계가 있다는 것은 분명 의심스러운 일이었으나, 그렇다고 방염이 화재사건에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제녕에서 온 화물들의 움직임을 관찰한 결과 화재사건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의심이 되는 물건들이 방염에게 전달된 것을 확인했습니다.”

진운룡은 하오문에서 조사했던 사항들을 두 사람에게 설명했다.

“그래서 천향루에 왔던 거구만?”

신웅이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황보혁군은 확신이 서지 않는 표정으로 고민에 빠졌다.

분명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세가의 이름을 걸고 움직이기엔 근거가 너무 약했다.

게다가 상대는 제남에서 상당히 명망이 있는 자.

확실한 근거도 없이 잘못 건드렸다가는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도 있었다.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습니다.”

진운룡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진운룡의 입장에서는 황보세가의 도움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머리 아프게 두 사람을 이해시켜 가면서까지 도움을 요청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난 진 공자와 함께 움직이겠네.”

그때 신웅이 진운룡을 지지하고 나섰다.

이번 사건을 통해 진운룡의 능력과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한 그였다.

정체가 의심스럽긴 했지만, 결코 허튼소리를 하는 이는 아니었다.

게다가 방염은 확실히 수상한 면이 있었다.

만일 진운룡의 말대로 방염이라는 자가 제녕 화재사건에 관련이 있다면, 소녀들의 납치만큼이나 용서할 수 없는 일임이 분명했다.

의(義)와 협(俠)을 평생의 기치로 삼고 있는 그로서는 절대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음…….”

신웅까지 나서자 황보혁군도 더는 고민만 하고 있을 수 없었다.

“좋아. 세가도 돕도록 하지. 대신 전면적으로 돕지는 못하네. 자네도 이해하겠지만, 확실한 근거가 없이 황보세가의 이름을 걸고 상대를 핍박하는 것은 여러모로 힘들어. 바람직한 일도 아니고. 하지만 소규모 지원이라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지. 비천대(飛天隊)를 붙여 주도록 하지. 정탐이나 은밀한 행사에 특화된 사람들이니 이번 일에 도움이 될 걸세.”

비천대는 황보세가의 음지에서 움직이는 조직이었다.

정보수집, 비밀 경호, 정찰, 심지어는 적의 암살에 이르기까지…… 드러내 놓고 할 수 없는 일을 처리하는 이들이었다.

모두 오십 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은신과 신법이 뛰어났고, 무공 실력 또한 세가의 정예들이었다.

게다가 외부에 알려진 조직이 아니었기에 일이 잘못되었을 경우에도 황보세가로 화살이 돌아올 일은 없었다.

속이 빤히 보이는 꼼수였으나, 황보혁군을 탓할 일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이렇게라도 진운룡을 돕겠다는 그의 의지를 보인 것이다.

진운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일단 진운룡이 먼저 잠입해 소진태나 인질들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먼저였고, 어차피 그가 휘젓고 다닐 동안 바깥쪽에서 놈들이 도주하는 것을 막을 인원이면 충분했기 때문이다.

“언제 움직일 텐가?”

신웅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로서는 당장에라도 쳐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일 밤 늦게 움직이도록 하지요.”

이렇게 다음 날 방염의 장원을 확인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   *   *

“이런 병신들!”

쿠당탕!

벼루가 날아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내의 이마를 강타했다.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왔지만 사내는 미동도 없이 조용히 엎드려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 자신의 앞에서 화를 내고 있는 이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동창의 이인자인 장형천호(掌刑千戶) 첩형관 조문이었기 때문이다.

조문은 서른 초반으로 보이는 다소 마른 사내였는데, 특이하게도 백발에 피처럼 붉은 입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 앞에 엎드려 피를 흘리고 있는 사내는 조문의 수하로 영반(領班)의 지위에 있는 위혁이라는 자였다.

조문의 입 언저리가 실룩거렸다.

“이 일을 대체 어떻게 수습하란 거냐! 네놈 하나를 죽인다고 해서 무마될 상황이 아님은 알고 있겠지?”

특수한 무공을 익힌 듯 방 안에는 서리가 얼 정도로 한기가 가득했다.

“이게 다 네놈이 병신 같은 조카 녀석을 너무 믿은 탓이란 말이지…….”

조문이 이를 갈며 말했다.

사실 제남의 사건에서 진운룡에게 백치가 되어 버린 동창 당두는 위혁의 조카였다.

그를 제남 책임자로 조문에게 추천한 것이 바로 위혁이었다.

한데, 이번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사실 그의 조카가 할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북경을 왔다 갔다 하면서 천향루와 연락을 하고 그들을 관리하는 것이 전부였다.

물론, 비밀을 유지하면서 상황을 관리하는 것이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조카가 제법 머리가 좋은데다 금의위 시절부터 수하들을 다루는 데도 일가견이 있었기에 믿고 맡겼던 터였다.

“어디 변명할 것이 있으면 해 보거라!”

방 안의 한기가 더욱 짙어졌다.

“죽여 주시옵소서!”

위혁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그저 처분을 기다렸다.

퍽!

쨍그랑!

이번엔 자기로 된 연적이 날아왔다.

“하찮은 네놈 하나를 죽여서 끝낼 일이었으면 내가 이렇듯 분노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분노를 억누르며 조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체 신도무적이란 놈이 누구냐?”

이번 일에 신도무적이란 강호인이 관계되었다는 보고를 들었던 터였다.

“무림에서 협객으로 이름이 높은 자인데, 평상시에도 협행을 한다 하여 산적들을 토벌하거나,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을 징벌하고 다니는 모양입니다. 아마도 나서기 좋아하는 그자가 소녀들의 실종을 조사하다 어떻게 꼬리를 잡은 듯합니다.”

위혁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조문의 입가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다시 실룩였다.

“겨우 무인 나부랭이에게 동창이 꼬리를 잡혀? 게다가 제대로 대항도 못해 보고 괴멸되었다?”

조문의 두 눈에서 살기가 일었다.

“백 년을 넘게 일인지하 만인지상으로 군림해 온 동창이 이런 치욕을 당하다니! 개, 돼지에게 동창 제복을 입혀 놔도 네놈들보다는 제대로 일을 할 것이다!”

다시 한 번 조문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동창이 어떤 기관인가?

이 시대 권력의 꼭대기에 위치해 있는 곳이 바로 동창이었다.

동창이 행하고자 하면 이 나라에서 못할 것이 없었으며, 동창의 이목에 포착되고도 벗어날 수 있는 자 또한 없었다.

동창의 명은 곧 황제의 명이었으며, 동창에 적대하는 행위는 곧 역모였다.

한데, 한낱 무인 나부랭이에게 그들의 행사가 방해받은 것이다.

아니, 방해받은 것뿐 아니라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네놈도 우리가 이번에 입은 타격이 얼마나 큰지는 잘 알겠지?”

조문의 얼굴에 가늘게 경련이 일었다.

제독의 차가운 얼굴이 떠올랐다.

동창 제독 육환은 생각만으로도 두려운 이였다.

육환의 의중이 어떨지 알 수는 없었으나 자칫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을 조문에게 물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동창의 이인자인 그라도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다.

“젠장!”

조문이 이를 악문 채 욕지기를 토해 냈다.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다시 기회를 얻어 실수를 만회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를 위해서는 일단 계획에 큰 타격을 준 놈들을 응징하는 것이 먼저였다.

“너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마! 그 버러지 같은 신웅이란 놈을 죽여라! 그리고 놈과 이번 일에 관계한 자들 역시 모두 처단하라! 특무 창위들의 동원을 허가한다!”

특무 창위라는 단어에 놀란 위혁이 급히 고개를 들었다.

“트, 특무 창위를 얼마나?”

“다섯!”

위혁이 눈을 부릅떴다.

“다, 다섯이나 말입니까?”

조문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에게 동창을 건드린 대가가 얼마나 큰지 똑똑히 알려 주도록 해라!”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놈들에게 최대한 고통스러운 죽음을 내려라!

“존명!”

위혁이 부복을 한 후 방을 나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