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혈룡전 2권 (40화)
6장 비천대 (1)/
황보혁군의 집무실을 나서 숙소로 향하던 진운룡의 걸음이 멈췄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적산이 반쪽짜리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후우웅!
그의 검 주위로 기운이 소용돌이 쳤다 사라졌다.
“적산.”
진운룡의 목소리에 적산이 움직임을 멈추고 얼른 달려왔다.
“주군! 나 이제 이거 할 수 있소!”
우우우웅!
적산이 검 주위로 기운을 소용돌이치게 하며 자랑하듯 씨익 웃었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운룡이 입을 열었다.
“내일 저녁 방염이라는 염상을 치러 갈 것이다. 준비해라.”
무표정하게 한 마디를 남긴 진운룡이 몸을 돌려 숙소로 향했다.
“저, 정말이오? 나도 함께 가는 거요?”
적산이 놀란 얼굴로 진운룡을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진운룡은 아무런 대답 없이 자신의 숙소로 사라졌다.
“크하하하하!”
적산이 장원이 떠나가라 웃음을 터뜨렸다.
드디어 진운룡에게 처음으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이제 진운룡의 옆에서 그와 함께 실컷 싸울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지금 실력으로는 신웅조차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적산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복수를 하려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강해져야 했다.
“반드시 최고가 되어 부모님의 원수를 갚겠다!”
적산의 두 눈에서 불길이 일었다.
* * *
다음날 삼경이 넘은 시간 진운룡은 소은설, 적산과 함께 정문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신웅을 비롯해 함께 움직일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황보 공자!”
소은설이 황보영천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설마 황보세가의 후계자인 황보영천이 이런 위험한 일에 참여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물론, 진운룡과 함께라면 걱정할 것이 없다고 여겼지만, 초가장에서도 진운룡이 모두를 지켜 주지는 못했다.
자칫 운이 없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소 낭자도 함께 가시는 겁니까?”
황보영천 역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가 보기엔 가장 위험한 사람이 소은설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아버지를 구하는 일인데 당연히 가야죠!”
소은설이 다부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주께 허락은 받은 건가?”
신웅도 걱정이 됐던지 황보영천에게 물었다.
“하하, 걱정 마십시오. 제가 이래 봬도 강호십룡 아닙니까? 오히려 경험도 쌓고 일석이조지요! 게다가 진 공자가 함께 가시는데 무슨 걱정입니까? 하하하!”
황보영천은 이제 진운룡에게 공대를 하고 있었다.
나이를 떠나 진운룡은 무인으로서 극에 다다른 이였다.
강호인이라면 당연히 선망과 경외의 대상이었고, 그만큼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호탕하게 웃던 황보영천이 정색을 했다.
“제가 아직 애송이에 불과하지만 한 명의 무인으로서 그런 간악한 자들을 모른 채 할 수는 없습니다!”
“하하, 그래. 잘 생각했네. 역시 황보세가의 후계자 답구만!”
신웅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황보영천을 칭찬했다.
그러고 보니 그 옆에는 제갈무진의 모습도 보였다.
그는 이번 기회에 진운룡을 따라가 자신도 공을 세우려는 속셈으로 일행에 합류한 것이었다.
게다가 곁에서 지켜보면 혹시라도 진운룡의 약점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희망도 가지고 있었다.
제갈무진의 뜨거운 시선에도 진운룡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철없는 아이들을 일일이 상대해 줄 만큼 진운룡의 수양이 얕지 않았고, 어차피 장원에는 혼자 들어갈 것이니 일행에 누가 있든 전혀 신경 쓸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반갑습니다, 진 공자. 일단 오늘 함께할 비천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때, 황보영천이 진운룡에게 비천대 대원들을 소개했다.
대주는 황보혁제로 황보영천의 막내 숙부였다.
초절정에 근접한 고수로 황보세가 내에서도 손가락에 꼽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외에도 부대주 황보광을 비롯해 세 명이 절정을 넘어선 고수였고, 나머지 인원들도 대부분 절정 경지에 근접해 있었다.
그야말로 황보세가의 저력을 엿볼 수 있는 막강한 전력이었다.
“오늘은 진 공자의 명을 우선적으로 따를 것이니,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황보영천의 소개가 끝나자 진운룡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비천대 대주 황보혁제를 비롯 몇몇 무사들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로서는 진운룡에 대한 소문만 들었을 뿐 실제로 그의 실력을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진운룡의 행동이 상당히 오만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나이도 어려 보이는 진운룡이 세가의 후계자인 황보영천을 아랫사람 대하듯 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진운룡은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이들은 만일을 대비한 전력일 뿐이었다.
쓸데없이 신경 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적산이 무사들을 잠깐 노려보긴 했으나, 주인이 나서지 않는데 함부로 경거망동 할 수는 없었기에 곧 고개를 돌렸다.
“일단 내가 먼저 들어가 인질들의 안전을 확보할 것이오. 내가 신호를 보낼 때까지 나머지 인원은 근처에서 대기해 주시오.”
진운룡의 이야기에 황보세가 무사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당신 혼자 움직이려면 대체 우리는 왜 함께 가는 거요?”
결국, 참지 못한 부대주 황보광이 불만 어린 얼굴로 물었다.
“아직은 방염의 혐의가 확실한 상황이 아니오. 그대들은 증거가 확인된 후 움직여도 늦지 않소.”
황보관은 못마땅한 표정을 풀지 않은 채 콧방귀를 꼈으나, 더 이상 진운룡에게 따지지는 않았다.
나름 일리가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정보가 잘못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해야 했다.
아무리 비천대가 외부에 알려진 조직이 아니라 해도, 그들도 황보세가의 일원이었다.
죄가 없는 자를 함부로 핍박하는 것은 황보세가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리고 가주의 명이 있었으니 불만이 있더라도 일단은 진운룡의 뜻에 따르는 것이 옳다 여긴 것이다.
저 오만하고 건방진 진운룡이 실패했을 때, 그때 자신들이 나서서 보란 듯이 콧대를 꺾어 주면 된다.
물론, 진운룡의 속마음은 전혀 달랐다.
방염을 처리하는 것은 되도록 혼자서 할 것이고, 이들은 장원 밖에서 도주하는 자들을 감시하는 역할만 하도록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괜히 사실대로 이야기해 귀찮음을 무릅쓸 이유는 없었다.
“나, 나도 말인가?”
신웅이 눈을 꿈뻑이며 물었다.
“신대협은 일단 소 소저의 안전을 맡아 주시오.”
신웅이 소은설과 진운룡을 번갈아 바라봤다.
소은설은 잔뜩 기합이 들어간 모습으로 뻣뻣하게 서 있었다. 아무래도 아버지를 찾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긴장으로 이어진 것이리라.
“호위라…….”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그의 성격과 어울리지 않았다.
“뭐, 정 원한다면 함께 움직여도 좋소. 단, 날 방해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말이오.”
진운룡이 냉소 섞인 얼굴로 말했다.
이미 진운룡의 어마어마한 능력을 확인한 신웅이었다.
솔직히 진운룡이 마음먹고 움직일 경우 따라갈 수 있다는 자신이 없었다.
“알겠네. 일단 자네의 신호를 기다리도록 하지.”
길게 한숨을 내쉰 신웅이 결국 진운룡의 말에 따랐다.
“꼭 아버지를 찾아 주세요!”
소은설이 간절한 얼굴로 진운룡에게 부탁했다.
진운룡의 시선이 소은설에게 향했다.
‘또 저 눈빛이군.’
진운룡의 왼쪽 가슴에서 아련한 통증이 느껴졌다.
―부탁이에요. 꼭 약속을 지켜 줘요.
하나의 목소리가 진운룡의 머릿속에 울렸다.
눈앞에 서있는 소은설과 여령의 마지막 모습이 하나로 겹쳐졌다.
진운룡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의 모습은 어느새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피식!
진운룡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괜히 나서지 말고 적산과 신 대협 옆에 붙어 있도록 해. 이미 알고 있겠지만 너는 나에게 무척 소중한 사람이거든.”
진운룡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야릇한 대사를 날리자 모두의 시선이 소은설에게로 향했다.
대체 두 사람이 무슨 관계란 말인가.
이름과 엄청난 무공 실력을 가졌다는 것 외에는 신비에 싸여 있는 진운룡이었다.
한데 그런 그에게 소중한 여인이라면 당연히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무, 무슨 소리예요!”
당황한 소은설이 얼굴이 벌게진 채로 손사래를 쳤다.
마치 고백이라도 받은 듯 심장이 두근거리고 상기된 양 볼은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쓸데없이 피 흘리지 말란 말이야. 아까우니까.
그때, 진운룡의 전음이 소은설의 귓가로 파고들었다.
들떠 있던 소은설의 마음이 순식간에 식어 버렸다.
진운룡에게 앞으로 계속 피를 바쳐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자신의 피가 특별하다는 이야기도.
‘그럼 그렇지. 대체 내가 무슨 생각을…….’
고개를 휑하니 돌리는 소은설의 모습을 확인한 진운룡이 피식 웃고는 앞장서 정문을 나섰다.
* * *
방염이 거처하는 장원은 규모가 상당했다.
그가 염상(鹽商)임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였다.
건물들만 해도 수십 채에 이르렀고, 장원 외에도 소금을 보관하고 운반하는 창고를 포구에 따로 가지고 있었다.
하오문의 정보에 의하면 포구 쪽 창고는 아무래도 사람들의 왕래가 많기 때문에 소진태나 다른 사람들을 가둬 두기엔 부적합했다.
만일 소진태가 방염의 손에 있다면 장원 어디엔가 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진운룡 일행은 장원에서 오십 장 정도 떨어진 건물들 지붕 위에 몸을 숨긴 채 상황을 살폈다.
장원은 의외로 경계가 심하지 않았다.
늦은 시간이어서 그런지 정문을 지키는 위사조차 보이지 않았다.
보통 염상들이 상당수의 사병과 무사들을 거느리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의외였다.
어쩌면 방염의 평판이 비교적 괜찮은 편이라 적이 많지 않은 탓일 수도 있었다.
‘어차피 진짜는 안쪽에 있겠지!’
진운룡이 황보영천에게 시선을 돌렸다.
“일단, 놈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할 필요가 있으니, 인원을 나눠서 장원 양 측면과 반대편에도 대기시켜 주시오.”
“적은 인원이 흩어지는 것은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황보영천이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천하무적 진 공자께서 움직이는데 무슨 일이야 있겠습니까?”
제갈무진이 잔뜩 꼬인 표정으로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진운룡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혹시 예상치 못했던 변수가 생길 것을 대비하기 위해서요. 어차피 정예들 아니오? 염상이 무사들을 데리고 있어 봐야 그대들을 당할 수 있겠소?”
오히려 진운룡은 비천대 무사들의 자존심을 살짝 건드렸다.
곧바로 반응이 왔다.
“진 공자의 말이 맞소. 열 명이든 백 명이든 염상의 호위무사들 정도야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지!”
비천대주 황보혁제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사실 도주하는 적을 감시하기 위한 배치였으나, 황보영천 등이 진운룡의 의도를 알리는 없었다.
황보혁제는 즉시 서른 명의 무사들을 움직여 장원의 측면과 뒤편에 각각 열 명씩 배치하도록 했다.
“신호는 이것을 쏘아 올려 주십시오.”
황보영천이 폭죽을 하나 건넸다.
폭죽을 건네받은 진운룡이 신웅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소 소저를 잘 부탁하오. 적산 너는 함부로 경거망동 하지 말고 그 아이 옆에 붙어 있거라.”
적산이 깊숙이 고개를 숙이는 것을 확인한 진운룡이 장원을 향해 몸을 날렸다.
‘두 사람이 대체 무슨 관계야?’
신웅은 신기한 표정으로 소은설과 진운룡을 번갈아 바라봤다.
진운룡이 왜 소은설의 아버지를 찾기 위해 이토록 애를 쓰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같은 하오문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진운룡 같은 고수가 돈을 받고 고용됐을 리도 없었다.
‘진 공자 성격상 다른 사람을 동정해서 도와줄 리도 없고, 그렇다면…… 설마!’
신웅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두 사람이 연인이라고 생각하기에는 관계가 그다지 가까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말 알수록 독특한 인간이군.’
신웅의 시선이 멀어지는 진운룡의 뒷모습을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