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
/혈룡전 2권 (42화)
6장 비천대 (3)/
“말해도 되는 거잖아요!”
빽 소리를 질렀는데도 두 무사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제부터 중요한 순간이니까 진짜 조심해야 해.”
그때, 진운룡이 정색을 한 얼굴로 말했다.
찔끔한 소은설이 얼른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 억울한 느낌이 있었지만, 당장에는 아버지를 구하는 일이 잘못되어서는 안 되었기에 그녀는 진운룡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피슈욱!
그때, 진운룡이 두 경비무사에게 지풍을 날렸다.
순간, 두 경비무사가 마치 석상처럼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지풍으로 두 사람의 혈을 짚은 것이다.
그냥 해치워 버릴 수도 있었지만, 자칫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을 경우 곤란했기 때문이다.
“나는 전각으로 들어가 아버지가 있는 곳을 알아 올 테니, 넌 여기서 은신해 있어.”
일단 진운룡은 혼자서 전각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가까운 곳에는 딱히 다른 경비들이 없었다.
소은설 정도의 은신 실력만으로도 들킬 염려는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제령안을 쓰는 모습이 그다지 볼 만한 광경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은설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진운룡의 신형이 사라졌다.
소은설은 침을 꿀꺽 삼키며 진운룡을 기다렸다.
전각 안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너무도 조용했다.
물론, 진운룡이 기막을 이용해 모든 소리와 기척을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다린 지 반 각도 되지 않아 진운룡이 다시 지붕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알아냈나요? 아버지가 여기 계신 게 맞나요?”
다급한 마음에 소은설이 참새처럼 말들을 쏘아 냈다.
진운룡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아버지가 여기 있는지는 확실치 않아. 하지만 사람들이 갇혀 있는 곳은 어딘지 알아냈어.”
소은설이 주먹을 꽉 쥐었다.
아버지가 그곳에 있다고 믿고 싶었다.
불안한 마음과 기대가 그녀의 머릿속에 공존했다.
진운룡은 잠시 그녀가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잠시 몸을 떨던 소은설이 이를 악물었다.
‘아버지는 반드시 그곳에 계실 거야!’
그녀의 얼굴에서 결의가 느껴졌다.
“그럼 네 아버지를 만나러 가 볼까?”
소은설은 진운룡의 한 마디에 순간 울컥해서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래,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거야!’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고 그녀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진운룡이 장원으로 들어간 지 반 시진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소식이 없자 기다리던 일행들은 점점 초조해졌다.
사실 진을 통과하느라 시간이 걸린 것이었지만, 이들이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이거 무슨 일이 생긴 것 아닙니까?”
비천대 부대주 황보광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만일 무슨 일이 생겼다면, 장원이 소란스러워졌을 겁니다. 진 공자의 실력을 믿어 보십시오.”
황보영천이 그를 진정시켰다.
“그자가 그리 뛰어난 자라면 벌써 인질들을 찾았어야 하지 않습니까?”
제갈무진이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 우리 주군을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
적산이 살기 어린 눈으로 제갈무진을 노려봤다.
“흥! 주인이나 종이나 건방지기는 매한가지군!”
제갈무진이 코웃음을 치며 적산을 비웃었다.
“그러지 않아도 네놈은 한번 손봐 주려 했다!”
적산이 살기를 띤 눈으로 검에 손을 가져갔다.
당장에라도 싸움이 날 기세였다.
“지금 같은 편끼리 뭐하는 짓인가! 적이 코앞에 있는데 자중지란을 일으킬 셈인가!”
보다 못한 신웅이 나섰다.
신웅은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 무림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인물이었다.
감히 함부로 하지 못하고 제갈무진이 물러섰다.
“적산 자네도 진 공자가 경거망동 하지 말라고 한 것을 잊지 않았겠지?”
“쳇!”
적산이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신 대협 하지만, 만일의 경우도 생각해야 합니다. 혹시 지금 진 공자가 적들의 경계가 너무 삼엄해 움직이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비천대 부대주 황보광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신웅이야 이미 진운룡을 겪어 봤기에 그가 경계가 삼엄해 움직이지 못한다는 말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비천대 대원들은 그것을 알 리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짐까지 있는 상태 아닙니까?”
순간, 신웅의 얼굴에 갈등이 일었다.
그러고 보니 진운룡이 소은설을 데리고 간 것을 간과했던 것이다.
아무리 진운룡이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 해도 소은설이 발목을 잡는다면, 황보혁제의 말대로 제대로 전진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애초에 그 하오문 계집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움직여야 했습니다!”
이 조장 황보승이 끝내 불만을 참지 못하고 나섰다.
“말을 삼가 하라!”
황보영천이 굳은 얼굴로 황보승을 노려봤다.
“어찌 황보세가의 사람이 손님되는 이를 계집이라 칭하는가!”
노기 어린 얼굴로 황보영천이 다그치자 황보승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공자.”
“어찌 됐든 부대주의 말도 일리가 있네. 만일 진 공자가 곤란한 상황이라면 지금 우리가 진입해서 돕는 것이 맞아.”
잠자코 있던 황보혁제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인질들의 안전을 고려해야…….”
황보영천이 난감한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속전속결로 해치우면 큰 문제는 없을 거야. 비천대가 어떤 곳인지 잊은 것은 아니겠지? 아마 놈들은 우리가 온 것도 모른 채 당하게 될 것이네.”
황보영천의 눈에 갈등이 얼렸다.
비천대의 실력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은신과 신법이라면 은밀하게 인질들을 구해 낼 수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이들이 돌입하면 진운룡의 운신도 더욱 쉬워질 것이다.
아버지 황보혁군이 이들을 파견한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니던가.
한 가지 걸리는 점은 인질들의 안위였다.
자칫 놈들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인질들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큭큭큭! 황보세가도 완전 콩가루군! 우리 주군의 명을 따르라는 가주의 명을 어기겠다는 건가?”
적산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감히! 세가를!”
황보광이 온몸에 기운을 끌어 올렸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언제든지 받아 주마! 후후!”
적산 역시 질세라 검을 뽑아 들었다.
“그만! 신 대협 이야기 못 들었나? 힘은 아껴 뒀다가 적들에게 사용하도록!”
황보광을 멈춰 세운 황보혁제의 시선이 신웅에게 향했다.
“신 대협은 어찌 생각하시오?”
신웅이 난감한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글쎄……. 나로서도 뭐가 맞다고 단정할 수는 없구려…….”
그의 성격상 사실 마음속으로는 당장이라도 달려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진운룡이 누구던가.
능공허도에, 삼십 장 거리의 흙더미를 단 일 수에 녹여 버리는 괴물이었다.
어쩐지 그의 말을 무시하고 이대로 장원으로 돌진하기에는 찜찜했다.
“신 대협께서도 판단하시기 힘든 상황이라면 우리는 대원들을 믿고 장원으로 돌입하겠소!”
황보혁제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신웅이나 황보영천도 마땅히 말릴 수가 없었다.
“흥! 맘대로들 하라고! 결국 그러다 주군께 방해만 될 테니까!”
적산도 불평만 할 뿐, 더는 말리지 않았다.
그 역시 속으로는 당장이라도 안으로 들어가 적들과 싸우고 싶은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대주님. 뒤쪽과 양 측면의 대원들은 어떻게 할까요?”
“일단 이곳으로 다시 불러들인 후 함께 침투한다.”
서로 너무 떨어져 있으면 원활한 연락이 불가능했다.
은밀한 침투 작전의 경우 대원 간 연계가 상당히 중요했기 때문에 미리 약속하지 않은 이상 거리를 벌리는 것은 좋지 않았다.
“존명!”
* * *
진운룡과 소은설이 도착한 곳은 장원 우측에 있는 삼층짜리 전각이었다.
“이곳인가요?”
소은설이 긴장된 얼굴로 물었다.
“그래. 이곳 지하야.”
제령안을 통해 이곳이 지하 뇌옥으로 향하는 입구라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전각에는 생각 외로 경비가 많지는 않았다.
“다섯인가?”
진운룡이 전각을 지키고 있는 경비 무사들을 보며 눈을 빛냈다.
그래도 무공 실력은 다섯 모두 일류를 넘어선 자들이었다.
이곳에 그만큼 중요한 곳이라는 방증이기도 했다.
“확실히 천향루와는 차원이 다르군.”
장원 전체 무사 수준도 그렇고 천향루의 경계 수준을 훨씬 웃돌고 있었다.
“그럼 움직여 볼까?”
일류고수라 해도 진운룡에게는 사실상 일반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소은설을 한쪽에 낀 채로 진운룡의 신형이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슈슈슈슈슈욱!
동시에 다섯 갈래의 지풍이 무사들을 덮쳤다.
퍼퍼퍼퍼퍽!
미처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경비 무사들이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역시 바닥에 쓰러져 소리를 내는 것을 막기 위해 지풍으로 점혈한 것이다.
동시에 진운룡이 전각 안쪽으로 몸을 날렸다.
“엇!”
안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두 명의 무사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미처 무릎이 펴지기도 전에 두 사람의 목이 피를 뿌리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어느새 진운룡의 오른손에는 검이 쥐어져 있었다.
잔인한 광경에 소은설이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어차피 그녀도 무림인이었다.
이 정도 일은 앞으로 수도 없이 겪게 될 것임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마음이 약해지면 안 돼!’
이를 악문 소은설이 다시 눈을 떴다.
전각 안쪽은 서른 평 정도의 넓은 방이었다.
진운룡은 그 한가운데에 멈춰 섰다.
“일단 비밀 통로가 있겠지?”
지하로 통하는 입구를 찾기 위해 진운룡이 사방을 훑었다.
“저, 저쪽 바닥이 조금 수상한데요?”
그때, 소은설이 장식장이 놓인 바로 앞쪽 바닥을 가리켰다.
“이런 것도 찾아내는 것인가?”
신기한 얼굴로 진운룡은 소은설이 가리킨 곳으로 향했다.
얼핏 봐서는 수상한 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부셔 버릴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아래쪽에서 알아차릴 가능성이 높았다.
그때, 소은설이 장식장 위에 있는 도자기를 옆으로 밀었다.
딸깍!
구우우우웅!
동시에 기관음이 들리며 서서히 지하로 향하는 입구가 열렸다.
“제법 쓸모가 있는데?”
진운룡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소은설을 바라봤다.
‘하긴 그녀도 이런 일은 곧잘 했지.’
그의 눈동자에 쓸쓸함이 어렸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내려가 볼까?”
드러난 입구는 계단으로 이어져 있었다.
진운룡은 우선 감각을 끌어 올려 아래쪽을 살폈다.
‘역시 다섯.’
아마도 층이 여럿 있는 듯했고, 각 층마다 다섯 명의 무사가 지키고 있었다.
“저곳인가? 한데 이 기운은…….”
진운룡이 눈살을 찌푸렸다.
가장 아래쪽으로 생각되는 곳에 서른 명 정도의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기운이 미약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인질들로 보였다.
게다가 그곳을 지키고 있는 이들은 무공 수준이 상당했다.
모두 절정을 넘어선 고수였고, 한 명은 초절정의 경지를 넘어선 자였다.
그런데 그곳으로부터 상당히 이질적인 기운 하나가 느껴졌다.
‘분명 낯이 익어.’
진운룡이 기억을 더듬었다.
‘가만! 이것은?’
진운룡의 얼굴이 굳었다.
“혈마!”
어딘가 조금 다르긴 했지만, 분명 혈마에게서 느껴지던 기운이었다.
‘대체 왜 이곳에 혈마의 기운이.’
혈교는 분명 자신과 정파연합의 손에 말살되었다.
한데 어찌 그 흔적이 이곳에서 나타날 수 있다는 말인가.
“저……. 무, 무슨 일인가요? 호, 혹시 문제라도 있는 거예요?”
심각한 진운룡의 표정에 소은설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소은설의 목소리에 진운룡이 상념에서 깨어났다.
“일단 내려가서 확인해야 할 게 있어! 지금부터는 절대 내 옆에서 떨어지면 안 돼.”
만일 혈교와 관계가 있는 곳이라면 결코 소은설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아, 알았어요.”
진운룡의 모습에서 소은설도 상황이 심각함을 느꼈다.
그녀는 혹시 아버지가 어떻게 된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저 무슨 일이 있었든지 제발 살아 있기만을 간절히 기도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