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룡전-50화 (5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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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룡전 2권(50화)

9장 새로운 계약/

일행이 돌아오자 황보세가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방염의 정체를 밝히고 납치되었던 사람들을 구한 것도 대단한 일이었지만, 더욱 큰 사건은 바로 남궁린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야말로 강호를 뒤흔들고도 남을 일이었다.

황보혁군은 즉시 무림맹과 남궁세가에 전서구를 보냈다.

그리고 진운룡과 황보영천, 신웅을 치하했다.

비록 비천대가 절반에 가까운 손실을 입었으나, 이룬 성과가 그를 덮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남궁린은 황보세가에 도착해서도 좀처럼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

의원의 말에 의하면 단지 기운이 조금 쇠약해진 것 외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했다.

황보혁군은 일단 남궁세가나 무림맹에서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리며 지켜보기로 했다.

황보세가의 연락을 받은 남궁세가와 무림맹은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무림맹과 남궁세가는 즉각 남궁린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움직였다.

무림맹주이자 남궁린의 조부(祖父)인 남궁진천이 직접 황보세가로 향했다.

남궁세가에서도 남궁린의 아버지 남궁진이 직접 온다는 연락이 왔다.

이렇게 황보세가에 강호의 모든 이목이 집중되고 있었다.

*   *   *

세가로 돌아온 다음 날 저녁 진운룡은 소은설의 처소로 찾아갔다.

하루 동안 많은 생각을 했지만 결국 답을 얻지 못했다.

이젠 사실대로 말하고 그녀의 선택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오, 오셨어요?”

갑작스런 방문에 놀란 소은설이 약간은 어색한 얼굴로 진운룡을 맞이했다.

“아버지를 찾은 것 축하해.”

진운룡이 담담하게 말했다.

“고마워요.”

소은설은 얼굴을 붉히며 진운룡을 방으로 들였다.

두 사람은 둥근 나무탁자를 가운데에 놓고 마주앉았다.

진운룡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했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사실 제가 해 준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너무 많은 것을 받은 것 같아요.”

소은설이 나직한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

처음 혈귀곡을 탈출시켜 주는 대가로 아버지를 찾아 달라고 했던 자신의 말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 이제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진운룡은 그의 말대로 언제든지 혈귀곡을 오갈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너는 내게 피를 줬잖아. 그거면 충분해.”

진운룡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소은설이 무언가 말을 하려다 주저했다.

진운룡은 그녀의 입이 열리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건가요?”

소은설이 진운룡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이제 진운룡과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섭섭하면서 허전했다.

아니 그것을 넘어선 무언가가 소은설의 마음을 흔들었다.

“글쎄……. 이제 계약도 끝났고…….”

진운룡이 허공에 시선을 둔 채 먼 곳을 바라봤다.

그가 혈귀곡을 나온 이유는 소은설 때문이었다.

과거 그가 사랑했던 여인, 여령과 너무도 비슷한 그녀.

소은설을 마주할 때마다 진운룡의 평정심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회색으로 채워진 그의 세상은 하나둘씩 색을 찾기 시작한다.

이백 년을 넘게 살아온 진운룡에게 그것은 무척 낯설면서도 흥미로운 일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피는 마성을 정화하는 신비스러운 힘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의 피가 자신의 저주를 풀 열쇠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혈신대법을 사용하는 자들에게서도 무언가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당연히 그로서는 소은설을 더 지켜보면서 그 실마리를 찾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 혼자 원해서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가 이 세상에 머물기 위해선 소은설이 계속해서 피를 제공해야 한다.

다른 인간의 피를 마시게 되면 언젠가는 마성이 골수에 파고들어 또 다른 혈마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닷새에 한 번씩 피를 빼앗겨야 한다는 것은 소은설에게는 일종의 족쇄와 같았다.

그런 일로 그녀에게 부담을 주는 것은 옳지 못했다.

‘차라리 화운곡(花雲谷)으로 돌아갈까…….’

지금은 혈귀곡이라 불리는 그곳, 그녀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차라리 아무 생각 없는 돌이 되어 버리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진운룡의 시선이 소은설에게 향했다.

진운룡의 모습을 몰래 훔쳐보던 소은설이 움찔해서 고개를 숙였다.

진운룡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일었다.

소은설은 여령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분명 달랐다.

그야말로 빈틈없는 천재였던 여령과는 달리 놀리는 재미가 제법 있었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엉뚱한 면도 있었다.

잠시 소은설을 바라보던 진운룡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대로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어.”

소은설이 긴장된 눈빛으로 진운룡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이대로 떠나려는 걸까?’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녀가 잡을 수는 없었다.

초조함에 그녀가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그 일을 하려면 네 도움이 필요해.”

소은설의 눈이 동그래졌다.

“내, 내 도움요?”

진운룡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다시피 너의 피를 마셔야 돌이 되거나 마성에 빠지지 않거든.”

소은설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이 사람은 내 피가 필요한 것이구나…….’

어쩐지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하지만 너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아. 난 너의 선택에 따를 거야. 네가 괜찮다면 남을 것이고, 아니면 혈귀곡으로 돌아갈 거야.”

진운룡이 조금은 슬픈 눈빛으로 말했다.

소은설은 갑자기 심장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

‘혈귀곡으로 돌아간다고…….’

그렇게 되면 진운룡은 다른 누군가가 다시 깨울 때까지 돌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곳은 소은설 외에는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곳.

결국, 영원이 깨지 않는 잠에 빠지고 말 것이다.

죽음과도 같은 잠.

왠지 그것만은 싫었다.

지금 진운룡은 자신의 눈앞에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 있는데, 다시 영원한 잠에 빠진다니 왠지 그녀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괜찮아. 석상이 되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아. 네가 책임을 느낄 필요는 없어.”

소은설의 마음을 짐작한 진운룡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 가지 말아요!”

그때, 소은설이 울먹이며 소리쳤다.

“이곳에 남아 주세요! 내, 내가 당신을 도울게요.”

소은설이 흔들리는 눈으로 진운룡을 바라봤다.

진운룡의 눈이 아련하게 빛났다.

그는 소은설의 두 뺨을 잡고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했다.

“고맙다. 네가 날 떠나지 않는 한 너를 지켜 주마.”

순간, 소은설은 가슴 한구석에서 무언가가 쿵 하고 터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불안하기도 하고 그녀를 들뜨게도 하는 그런 생소한 느낌이었다.

소은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이렇게 두 사람 사이에 새로운 계약이 성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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