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룡전-52화 (52/150)

# 52

/혈룡전 3권 (52화)

2장 움직이는 암류 (1)/

오십여 평 넓이의 어두운 석실.

원탁을 중심으로 여덟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중에 한 사내는 놀랍게도 염상 방염의 장원에서 무사들을 지휘하던 오 사령이라 불리던 자였다.

“큭큭큭! 백승. 꽁지 빠지게 도망쳤다는 것이 사실이냐?”

꼽추에 한쪽 얼굴이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진 노인이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오 사령 백승을 보며 킥킥댔다.

“주인께서 내리신 은혜를 받고도 기껏 무인 나부랭이에게 패한 것도 모자라 도망치기까지 하고, 네 녀석이 감히 무슨 낯짝으로 얼굴을 드러낸 것이냐?”

은으로 만든 가면―특이하게도 눈물을 흘리며 웃는 도깨비 모습의―을 쓴 적발의 사내가 두 눈에서 혈광을 뿜어내며 말했다.

두 사람의 질책에도 불구하고 오 사령 백승의 얼굴은 차분했다.

백승의 한쪽 입꼬리가 위로 말려 올라갔다.

“놈은 무사 나부랭이가 아니오. 혈신대법에 대해 알고 있었소.”

백승의 말에 석실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그를 비웃던 이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 버렸다.

“어머! 그 말이 사실인가요?”

이제 갓 열일고여덟 쯤 되었을까 싶은 앳된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

마치 토끼처럼 놀라는 모습이 너무도 순수하고 귀여워 보였다.

하지만 사실 이 소녀야말로 사령들 중 가장 잔인하고 악독한 이 사령 심유화였다.

그녀는 특히 아이들의 피를 즐겨 마셨는데, 그녀의 용모가 앳돼 보이는 이유 역시 그 때문이었다.

“믿을 수 없다. 오 사령.”

“거짓말한다.”

“덮으려는 거다. 본인 잘못.”

라마승 복장의 세 중이 어눌한 말투로 앞다투어 한 마디씩 했다.

그들 세 사람은 키는 채 오 척도 되지 않았고 머리가 비정상적으로 컸는데, 마치 세 쌍둥이처럼 똑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다소 우스워 보이는 외모, 말투와 달리 그들의 목소리는 날카로우면서 한기가 어려 있었다.

셋은 잠시 백승을 노려보곤 자기들끼리 무언가 수군거렸다.

“그뿐만이 아니오. 놈은 혈신대법을 받은 방염을 꺾었을 뿐 아니라, 팔로금쇄멸혼진을 단 두 수만에 부숴 버렸소.”

“케케케……. 어차피 방염이야 혈신대법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그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을 테니 그리 놀라울 일도 아닌데, 호들갑이 너무 심하군그래.”

꼽추 노인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백승을 비웃었다.

“흐음……. 그래도 팔로금쇄멸혼진을 깬 것은 쉽게 넘길 일이 아니에요.”

이 사령 심유화가 고운 아미를 찡그리며 말했다.

“오 사령은 놈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해 보라.”

은가면 사내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체적인 분위기를 보아 은가면의 사내가 사령들의 우두머리인 듯했다.

은가면 사내의 말에 진운룡의 신위를 다시 한 번 떠올린 백승이 눈가를 가늘게 떨었다.

“놈의 능력은 그야말로 경악스러운 것이었소. 피의 권능을 사용한 상태에서도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였소이다. 게다가 놈이 사용한 무공은 이제껏 듣도 보도 못한 생소한 것이었소.”

순간 장내의 분위기가 차가워졌다.

“오 사령은 지금 감히 피의 권능이 고작 스무 살 안팎의 애송이에게 무너졌다고 말하는 것인가?”

은가면 사내의 목소리에는 살기가 담겨 있었다.

“직접 겪은 나 역시도 도저히 믿지 못할 일이오.”

이 상황에서 백승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으음…….”

은가면 사내가 침음성을 흘렸다.

피의 권능은 그들의 주인에게서 받은 특별한 은혜.

피의 권능을 사용한다면 십이천을 상대한다 해도 결코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한데,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강호 초출 애송이에게 피의 권능이 무너지다니, 너무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백승을 비웃었던 꼽추 노인조차도 피의 권능을 사용하고도 상대가 되지 않았단 말에는 입을 열지 못했다.

“죽인다. 놈을.”

“없다. 용납. 감히 피의 권능!”

“찢는다. 온몸을 갈기갈기!”

세 라마승이 정신없이 말을 내뱉었다.

“킬킬, 대계가 곧 시작되는데 겨우 애송이 하나 때문에 쓸데없는 힘을 낭비하자는 건가?”

꼽추 노인이 라마승들을 바라보며 조소를 날렸다.

“하지만 이대로 놈을 방치한다면 변수가 될 수도 있소.”

백승이 라마승들의 의견에 동의했다.

“호호호, 오 사령께서는 너무 겁을 집어먹은 것 아니에요? 설마 놈이 오 사령을 이겼다 해서 우리도 똑같을 것이라 여기는 건 아니겠지요?”

너무도 순수해 보이는 웃음과 달리 심유화의 목소리에는 한기가 흐르고 있었다.

백승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의 실력이 다른 사령들에 비해 떨어지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기에 심유화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으음…….”

은가면 사내가 고민에 빠졌다.

“제가 놈을 만나 보도록 하죠.”

그때, 관능적이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여인임에도 육 척이 넘는 큰 키를 가진 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전혀 부담감이 느껴지지 않는 균형 잡힌 몸매를 소유하고 있었다.

오히려 요염하기까지 한 그녀의 풍만한 육체는 어느 사내라도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놈을 직접 만나 본다?”

은가면 사내의 두 눈에 이채가 일었다.

“놈이 벌써 두 번씩이나 우리 일을 방해한 이상, 반드시 그에 대한 응징을 해야 한다는 것에는 모두 동의하시겠죠?”

사령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왕 놈을 해치울 거라면 오 사령이 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해야 해요.”

오 사령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으나, 따로 반박하지는 못했다. 어쨌든 자신이 임무에 실패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놈에 대해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죠.”

여인의 눈동자에 빛이 일었다.

“또, 놈의 배후가 있을 가능성도 생각해야겠지요. 결국, 놈을 죽이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니 제가 놈에게 접근해서 혈신대법에 대해 알고 있는 이유와 정체, 배후를 알아 오도록 하지요. 그 후에 제가 직접 놈의 껍질을 벗기고 사지를 잘라 감히 우리에게 도전한 대가를 치르도록 할 거예요.”

여인이 혀로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육 사령이 직접 나서 준다면 고마운 일이지.”

은가면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육 사령 홍혜란은 사령들 중 가장 늦게 주인의 은혜를 입은 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다른 사령들이 무시할 수 없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옥기린 남궁린의 일도 그녀의 공이 컸다.

게다가 어지간한 사내보다 독하고 강단이 있었으며 머리도 뛰어났다.

그녀라면 충분히 정체불명의 애송이에게 접근해 정보를 알아낼 수 있으리라.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어떤가?”

은가면 사내가 다른 사령들에게 의견을 물었지만,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없었다.

그들 역시 육 사령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좋아. 그렇다면 육 사령이 놈을 맡아 주게. 방법은 전적으로 그대에게 맡기겠네.”

“기대를 저버리지 않도록 하지요.”

만면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은 육사령이 다른 사령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천천히 석실을 나섰다.

*   *   *

소은설은 안절부절 못하며 방 안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내, 내가 어젯밤에 대체 무슨 소리를 한 거야…….’

진운룡에게 남아 달라고 울먹이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니 자꾸만 얼굴이 화끈거렸다.

다시 생각해 보니 자신의 모습이 마치 정인에게 제발 자신을 떠나지 말라 매달리는 여인의 그것과 흡사했기 때문이다.

‘저, 절대 딴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야! 그저 그 사람이 다시 혼자 쓸쓸히 돌이 되어 버리는 것이 너무 불쌍해 보여서 그랬던 것뿐이야!’

소은설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혼란스러운 마음을 억지로 잠재웠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은 의지와는 다르게 진운룡을 생각할 때마다 두근대고 있었다.

‘그 사람이 무슨 이상한 술법이라도 쓴 거야! 아니면 내가 미쳐 가는 게 분명해! 으…… 소은설! 정신 차려!’

머리를 쥐어뜯던 소은설이 침상에 몸을 던졌다.

*   *   *

“하압!”

콰악!

적산의 검이 땅바닥을 찍으며 흙이 튀어 올랐다.

어느새 신웅은 긴 수염을 휘날리며 일 장 뒤로 훌쩍 물러선 상태였다.

적산은 개의치 않고 그대로 몸을 날렸다.

쉬이익!

동시에 적산의 검으로부터 검기가 마치 채찍처럼 쭈욱 늘어나 신웅을 향해 쏘아졌다.

신웅이 눈을 부릅뜨며 급히 신형을 낮추었다.

스악!

검기가 신웅의 머리 위를 간발의 차로 스치고 지나갔다.

‘대단하군!’

적산의 발전 속도는 그야말로 경악스러운 수준이었다.

검기를 발현시키기 시작한 지 이제 겨우 며칠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어느새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있었다.

아직 공력에서는 신웅에게 한참 못 미쳤지만, 초식의 응용이나 검기를 다루는 실력은 결코 얕잡아 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때문에 처음에는 적산이 하도 끈질기게 어쩔 수 없이 대련을 받아 주었지만, 요즘은 오히려 자신의 수련에도 도움이 되고 있었다.

‘세상에 천재니 기재니 하는 이들을 많이 만나 봤지만 이 녀석은 정말 괴물이군!’

신웅이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타앗!”

어느새 신웅을 따라잡은 적산이 위에서 아래로 벼락처럼 검을 내려쳤다.

쩌어엉!

신웅이 재빨리 도를 들어 적산의 검을 막아 냄과 동시에 적산의 오른다리가 하체를 쓸어 왔다.

터억!

공력을 끌어 올린 신웅이 두 다리를 단단히 하며 버텨 내자 적산의 검기가 다시 한 번 불을 뿜었다.

파파파파팍!

검이 분열하며 전광석화 같은 공격이 연달아 쏟아졌다.

“크하하하하! 내 오늘 수염을 깔끔하게 정돈해 드리겠소!”

지치지도 않는지 적산은 숨 쉴 틈도 없이 검을 휘둘렀다.

팔, 다리, 옆구리, 가슴 등 가리지 않고 온몸 구석구석 쏟아지는 검격에 신웅은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쩌어엉!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공력을 잔뜩 끌어 올려 적산의 검을 튕겨 낸 신웅이 뒤로 훌쩍 물러섰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세. 이러다 내가 제명에 못 살겠네.”

신웅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쳇!”

적산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이리 가까이 오거라.”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던 진운룡이 적산을 불렀다.

흐트러졌던 적산의 모습이 순식간에 진중해졌다.

“주군.”

천천히 다가선 적산이 진운룡에게 고개를 숙였다.

“받아라.”

진운룡이 서책 하나를 적산에게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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