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혈룡전 3권 (53화)
2장 움직이는 암류 (2)/
“이것은……!”
적산의 입꼬리가 위로 말려 올라갔다.
서책의 표지에는 무류검보(無流劍譜)라고 적혀 있었다.
드디어 진운룡이 적산에게 검법을 전해 준 것이다.
적산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감사하오! 주군!”
쿵!
적산이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무류(無流)란 흐름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흐름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무류검보는 특별한 초식을 가르치지 않고, 초식이 만들어진 원리와 인간이 검을 이용해 구현해 낼 수 있는 움직임들에 대해 기술되어 있다. 다른 이라면 쉽지 않은 검법이겠으나, 네 녀석이라면 얼마든지 이해하고 익힐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무류검보는 검법이라기보다는 검의 오의에 대해 설명한 검술서라 봐야 했다.
초식이 만들어진 원리를 배우고 검의 움직임과 기의 흐름에 대해 이해함으로써 스스로 초식을 만들어 내도록 한다.
틀이 없으니 한계 역시 없고,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했다. 그야말로 본인의 재능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검의 극의에 다다를 수 있는 최고의 검술서였다.
문제는 검보에 기술된 상승의 무리들이 범인들은 이해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난해하다는 것이다.
그도 당연한 것이, 검을 처음 배우는 이에게 검의 오의에 대해 설명한다고 해서 알아들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게다가 초식을 스스로 만들라니…… 어찌 보면 이것은 무공비급이 아니라 그저 이론서에 불과한 것이다.
때문에 오성이 떨어지거나 경지가 낮은 이들에게는 돼지 목의 진주와 같은 무서(武書)였다.
하지만 적산은 신웅의 이야기만 듣고도 검기를 발현해 낸 천고의 기재.
진운룡은 그가 충분히 무류검보를 이해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오히려 자유분방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적산에게는 한계를 정하지 않는 무류검보야말로 가장 최적화된 무공서라 할 수 있었다.
“서두르지 말고 네 것으로 완벽하게 만들 때까지는 결코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말거라. 하나가 비면 둘이 비게 되고, 시간이 흐른 뒤에는 마치 벌레가 갉아먹은 나뭇잎처럼 썩은 껍데기만 남게 된다.”
진운룡이 무겁고 엄중한 목소리로 주의를 줬다.
“명심하겠습니다, 주군!”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목소리로 적산이 대답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신웅의 마음은 한편으로는 부러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난감하기도 했다.
진운룡이 드디어 무공을 가르치기 시작한 이상 앞으로 얼마나 더 발전하게 될지 두려웠기 때문이다.
비무가 더 고달파질 것을 생각하니, 신웅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 * *
진운룡과 소은설이 천사교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 당분간 황보세가에 머물기로 하자, 소진태 역시 함께 남아 진운룡을 돕기로 했다.
사실 그가 남는다 하여 별다른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나, 진운룡에게 큰 은혜를 입은 그로서는 조금의 힘이라도 보태고 싶었기 때문이다.
소진태와 함께 갇혀 있던 자들은 대부분 문파에서 상당한 위치에 있던 이들이었다.
그중에는 남궁린을 포함 오대세가와 구파일방의 제자들도 상당수였다.
그것은 곧 이 일의 배후에 있는 세력이 결코 만만치 않은 자들이란 사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
납치당했던 무인들은 당분간 황보세가에 남아 자신들의 문파나 가문 사람들을 기다리기로 했다.
황보세가에서는 그들이 불편함 없이 감금 생활로 인해 쇠약해진 체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방염의 장원을 습격한 지 사흘째 날.
“가주님!”
황보세가 가주전이 아침부터 떠들썩해졌다.
총관 황보혁성이 무슨 일 때문인지 허겁지겁 달려온 것이다.
“무슨 일인데 그리 소란이냐?”
황보가의 가주 황보혁군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남궁공자가 깨어났습니다!”
황보혁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말이 사실이냐? 당장 가 보자!”
황보혁군이 장포 자락을 휘휘 날리며 남궁린이 있는 별채로 향했다.
가주인 그가 이토록 체통을 지키지 못하고 서두르는 이유는 아무래도 남궁린이 맹주 남궁진천의 손자인 탓이 컸다.
누가 뭐래도 남궁진천은 현 정파 무림의 태산과 같은 인물이었다.
그가 목숨처럼 아끼는 이가 바로 남궁린이었기에 아무리 황보세가라 해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별채에 도착하니 의당의 수장인 장환이 남궁린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오…… 오셨습니까?”
황보혁군을 발견한 남궁린이 휘청거리며 몸을 일으키려 애썼다.
“어허, 아직 몸도 성치 않은 사람이 뭐하는 짓인가? 무리하지 말고 그대로 누워 있게!”
황보혁군이 급히 남궁린을 말렸다.
“상태는 좀 어떤가?”
“걱정 마십시오. 오래 누워 있어 기력이 없을 뿐, 전체적인 외상과 내상은 모두 치료된 상태입니다. 아마도 내일쯤이면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겁니다.”
장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참으로 다행이군. 자네 같은 인재를 잃지 않았다는 것은 그야말로 정도 무림의 홍복일세!”
“과한 말씀이십니다. 제가 너무 미흡한지라 쓸데없이 많은 분께 걱정만 끼쳐 드렸으니 그저 죄스러울 따름입니다.”
남궁린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무림 최고의 기재네, 후기지수 중 으뜸이네 칭송받던 그였으나, 정체조차 알 수 없는 무리들에게 납치를 당하는 치욕을 겪고 나니 자신만만하던 마음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인 듯 보였다.
이제 무슨 낯으로 다시 무림인들 앞에 설 수 있단 말인가.
“의기소침할 필요 없네. 황보세가의 비천대마저 제대로 손써 보지 못하고 놈들에게 놀아났을 정도네. 어린 자네가 어찌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네.”
남궁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비천대라면 실체가 확실히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무림인들의 사이에서 암암리에 입에 오르내리는 황보세가 정예들로 이루어진 비밀조직을 일컫는 것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이제껏 단 한 번도 임무를 실패한 적이 없다고 했다.
한데, 그런 비천대가 손도 제대로 못 쓰고 당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더욱이 그 사실을 외인인 자신에게 스스럼없이 밝히는 황보혁군의 모습도 의외였다.
물론, 황보혁군은 진에 빠지는 바람에 비천대가 능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은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다.
“자네는 그저 빨리 몸을 회복해서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에만 신경 쓰게. 그것이야말로 자네가 겪을 치욕을 씻고 새로운 미래를 여는 길이네.”
“신경 써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남궁린이 고개를 숙여 황궁혁군에게 감사했다.
“한데, 그렇다면 저를 구한 것은 누구입니까?”
비천대가 무너졌다면 대체 누가 자신을 구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황보세가에서 비천대를 파견했다는 것은 이번 일을 세가 차원이 아니라 비밀리에 움직였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곧 황보세가의 다른 조직이 작전에 참여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남궁린을 구했다는 말인가.
“그러지 않아도 자네가 깨어나면 서로 인사를 시켜 주려 했었네. 황보세가에 손님으로 머물고 있는 진운룡 소협이, 자네뿐 아니라 잡혀 있던 다른 사람들과 비천대를 구했네.”
“단 한 사람이…… 말입니까?”
남궁린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도대체 누가 있어 황보세가 최고의 무력조직 중 하나인 비천대를 박살 낼 정도의 적들을 혼자서 제압했다는 말인가?
최소한 십이천(十二天) 정도는 돼야 그 가능성을 논할 수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황보혁군이 소협이라 칭하는 것을 보면 나이도 자신과 별 차이가 없는 젊은 자임이 분명했다.
이제껏 자신의 경지에 대해 나름 자부심을 느끼던 남궁린으로서는 무기력하게 납치를 당한 사건 이후로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곳이 악적들의 소굴임을 알아낸 것도 하오문과 진 공자의 공이네.”
남궁린은 황보혁군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가주님. 죄송하지만, 진 공자를 한번 만나보고 싶군요.”
“그래. 자네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면 내가 따로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지. 우선은 다른 생각은 말고 회복에 중점을 두게.”
“감사합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황보혁군은 다시 한 번 남궁린에게 몸조리에 신경 쓰라 당부하고는 별채를 나서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다.
“진운룡이라…….”
진운룡의 이름을 되뇌는 남궁린의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 * *
진운룡과 소은설, 소진태 세 사람은 천사교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하오문 제남 분타인 천운상회로 걸음을 옮겼다.
도박장 특유의 쾌쾌한 공기를 참아 내며 지하로 내려간 세 사람을 맞이한 것은 뜻밖의 인물이었다.
“어서 오시오, 진 공자. 말씀은 많이 들었소이다.”
동그란 눈에 툭 튀어나온 입술, 얼핏 보면 마치 붕어나 잉어를 닮은 듯한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외모를 가진 중년 사내가 반갑게 인사를 해 온 것이다.
“무, 문주께서 어찌?”
소진태가 놀란 얼굴로 중년 사내를 바라봤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내는 바로 하오문 문주 곽지량이었던 것이다.
“하하하, 뭘 그리 놀라나? 내가 못 올 곳에 오기라도 했나?”
곽지량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진운룡의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곽지량이 이곳까지 온 이유는 빤했다.
바로 자신 때문이리라.
“서 있지들 말고 일단 자리에 앉읍시다.”
유들유들한 웃음을 지으며 곽지량이 일행에게 자리를 권했다.
진운룡과 일행은 의구심을 품은 채 곽지량을 바라봤다.
“하하하. 맞소이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진 공자 때문이오.”
곽지량은 의외로 순순히 자신의 의도를 인정했다.
“명색이 하오문 문주라는 사람이 궁금한 것을 참을 수는 없지 않겠소? 이거 이렇게 직접 만나 보니 소문보다 더 미남이시구려?”
눈을 빛내며 싱글거리며 곽지량의 모습은 하오문 문주라기보다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는 순수한 어린아이의 그것과 같았다.
하지만 곽지량의 의도가 진정 순수하다고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난 다른 사람의 호기심거리가 될 생각은 조금도 없소만.”
진운룡의 냉랭한 대답에도 곽지량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하하하! 그렇다고 절대 진 공자를 귀찮게 하지는 않을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그나저나 이렇게 예까지 직접 찾아온 것을 보면 무슨 용건이 있는 듯한데…….”
곽지량이 진운룡의 눈치를 살피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눈빛은 진운룡에 대해 파악하기 위해 여념이 없었다.
진운룡의 미간에 내 천(川) 자가 생겨났다.
다른 이들의 분석거리가 되는 일은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오문의 정보가 필요한 상황이었기에 일단은 참기로 했다.
“천사교에 대해 알고 싶소.”
곽지량의 관심이 거북했던 진운룡이 거두절미 하고 곧장 용건을 말했다.
“호오……. 의뢰로군요?”
“크흠…… 문주. 의뢰라니요? 진 공자는 제 은인이십니다. 제 제량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까?”
소진태가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어허, 소 분타주. 성격도 급하시오. 내 말을 끝까지 들어 보시구려.”
곽지량이 짐짓 소진태를 책망했다.
“천사교에 대한 정보 요청은 의뢰임은 분명하나…….”
잠시 뜸을 들인 곽지량이 말을 이었다.
“진 공자는 소 분타주의 은인이시니, 이는 곧 하오문의 은인과 같소이다. 우리 하오문은 밑바닥 인생들이 모인 곳인 만큼 은원을 확실히 하지요. 그러니 문주의 재량으로 진 공자에게는 대가를 받지 않도록 하지요!”
마치 큰 인심이라도 쓴다는 듯 생색을 내는 곽지량의 모습에 소진태가 헛기침을 했다.